1. 갓쓰고 영어를 배우다
남궁억은 1863년 12월 27일,왜송곡(현 정동)에서 철종때 무과를 지낸 남궁영씨의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본관은 함열이요,자는 치만,호는 한서이다.
본래 양반집 가문에서 출생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아버지를 일찍 잃은고로 덕수 이씨인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고생스럽게 자라났다. 그러나 그 용모가 준수하고 재질이 남보다 뛰어나 어깨너머로 공부를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사서와 삼경을 통달하였고,그가 21세가 되면 1883년에는 문중들의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관립 영어학원에 입학하였다.
때는 미국에 공사관이 서울 정동에 설립이 되고 영국과 독일이 수교 조약을 체결하던 때로,나라가 인재양성을 필요로해서 재동에 영어학교를 세웠다. 이때의 학생으로는 남궁억,송달현,주우남 단 세사람 뿐이었는데 모두 도포를 입고 통량갓을 쓰고 앉아서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그 이듬해에는 유창하게 영어를 말할 수 있게 되어 독일인 모렌도르프(P.G.Mollendorff,)가 총해관에 해무사무와 외교고문으로 있을 때에, 견습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이것이 그가 국가 기관에 첫발을 들여 놓게 된 시작이었다.
2. 첫 발을 벼슬살이로
그러나 그가 정식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한 것은 1886년이었다. 내부주사로 피임되어 어전 통역을 맡았고, 1887년에는 조민희씨가 이끄는 외국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통역과 서기관으로 일하였다. 1889년에는 궁내부 별군직에 임명되어 4년 동안을 일하였고 1893년에는 궁내부 별군직에 임명되어 4년 동안을 일하였고 1893년에는 경상도 칠곡의 부사로 취임하여 갑오년의 동학란과 청일전쟁을 임지에서 겪었다.
1895년은 칠국 부사를 사임하고 내부 토목국장으로 들어왔다. 그때의 종로통은 서울의 중심가 였으며 정동 일대는 외국공관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수백년을 내려오는 퇴락된 집들로 인해서 길이 좁고 구불거렸다. 그는 일찌기 선진국을 다녀본 경험으로 길의 넓고 좁음이 바로 문명의 척도가 된다는 생각아래,우선 종로통과 정동의 거리를 확장케 하였다. 그리고는 도심지일수록 휴식공간이 필요하다고 하여 탐골공원도 건설하였다.
1896년에는 종전까지 청국의 년호를 써오던 것을 버리고 건양이라는 새 년호를 쓰며 소학교를 세우며 종두볍을 시행하며 단발령을 내리자,이에 반발하고 일어난 의병들이 있었다.
이에 정부는 그들을 무마하기 위해 선유사를 보내게 되었는데 남궁억이 그 일을 맡게 되었다. 선유사의 임무를 어렵게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있어서 일대 전환기가 다가왔다. 그것은 일본과 청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나라를 구출하기 위해,서재필을 중심한 독립협회라는 단체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제 그는 벼슬 길에서 떠나 독립협회의 수석 총무로 앉으면서 또 다른 차원에서 나라를 위해 일하게 되었다. 성토대회도 열고 정부의 비리를 공격하기도 하며 또 한편 민중을 깨우치기도 하였다.주로 그는 그때 친노파와 싸웠다. 이로 인해서 여러번 투옥되기도 하였다. 1897년에는 언론에 투신하여 황성신문을 창간하였다. 여기에서도 정부의 박해를 받아 1903년 부득이 그만두게 되었다.
3. 교육구국의 대열에
그 이듬해에 또 다시 정부에 들어가 일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를 양양군수로 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그는 을사보호조약을 맞았는데, 이로 인해서 그는 큰 충격을 받고 이제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인재를 기르는데 있다고 생각되어 교육에 큰 뜻을 두게 되었다. 그래서 현산학원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보다 교육운동을 널리 펼치기 위해 최초로 교육월보를 창간하기도 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군수직에서 물러나 있던 중,1911년 배화학교에 선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기독교 여성교육에 전적으로 몸 담게되었다.그리고 여성교육을 위해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언제 그가 남감리교회의 교인이 되었는지 확실하게 연대는 알 수는 없다. 다만 그가 독립협회 시절에 윤치호씨와 관계를 가짐으로 믿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가 배화학교 교사로 들어간 것이 바로 그러한 신앙 줄기로 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가 1918년 몸의 휴양을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때, 종교교회의 본처전도사(장로)였다는 것을 보면, 1910년대는 교회에서 인정하리 만큼의 신앙인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학교에서의 그의 교육의 특이성은 국가현실을 감안한 역사교육과 시대적으로 여성들이 꼭 알아야할 진보적 여성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영어를 가르치다가 틈만 나면 한국역사를 가르쳐 주었으며, 그것도 부족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무궁화 꽃을 가지고, 삼천리 금수강산을 수놓는 지도를 수본으로 만들어 수를 놓게 하고,태국기도 그렇게 수놓게 하였다. 이것은 배일사상에서 나온 것이라 하여 압수를 당하고,그것으로 인해 더욱 주목받기도 하였다.
4. 강원도 보리울로의 낙향
1918년 그는 8년이란 기간동안 일해오던 학교를 뒤로하고, 영원한 고향이 될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국으로 낙향하게 되었다. 그것은 낮이면 배화학교에서 일하고, 밤이면 상동 교회 청년학원장으로 수고를 거듭하던 중,극도의 건강 악화로 더 이상 서울에 머물러 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모곡에 와서도 그는 쉴 수가 없었다. 그는 먼저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평일에는 그 건물을 이용해서 학원을 시작하였다. 그는 고향에 내려와 일하면서,할 일은 태산 같은데 일꾼이 부족함을 탄식하여 1922년 저 유명한 찬송가 371장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이라는 찬송가를 지었다. 이것은 일제가 애국성이 농후하다고해서,부르지 못하도록 한 제1호 찬송가였다. 1924년에는 단군 조선으로 시작해서 3.1운동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동사략 이라는 역사책 5권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1929년에는 동화체로서 사화를 기록했는데, 그 정신은 선인들의 모화사상을 일깨워 자주할 수 있는 정신을 길러주기 위한 책으로 조선 이야기 5권을 저술하였고 그 외에도 조선어보충 조선어문법 등을 저술하였다. 이 모든 책들이 애국충성에서 저술된 것이었다.
5. 무궁화 사건
그는 또 낙향한 후,자신의 밭 수천평에다 무궁화 묘목 밭을 만들고, 학새들로 하여금 가꾸게 하고 해마다 수 십만주씩 길러,전국 기독교학교와 교회 및 기독교단체 또는 가정에 분배하였다. 그 이유는 무궁화는 우리나라의 국화로서,계속 피어나는 것처럼 역사가 바로 그와 같다는 것을 은연 중에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는 그가 낙향한 후,그의 과거의 행적으로 보아 의심스러웠기 때문에,예정에도 없는 주재소를 모곡리에서 가까운 곳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의 교회생활, 교육사업, 저술활동 일체를 감시하던 중,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생각했던지 홍천경찰서원인 신현규를 시조 잡지를 파는 사원으로 위장하여 침투시켜 그의 사상을 유도심문하여 결국은 그를 올가미에 걸고 말았다. 1933년 11월 4일 남궁억 장로는 체포되고 말았다. 그만이 아니라 학교,교회,온 동리가 수색을 당하고,교회목사 유자훈을 비롯해서 수 명의 교사가 함께 검거되었다. 남궁억 장로는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1년 징역에 3년 집행유예를 받았다. 1936년 74세의 노쇠한 몸으로 옥중에서 병들어 보석된후, 1939년 4월 5일 77세를 일기로 소천하였다.
6. 그의 생의 교훈
그의 일생을 돌이켜 볼 때, 그는 일생동안 참으로 많은 일은 한 장로였다. 할일 많은 이 세상,일끈이 부족한 때에,교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정말 일을 많이 하였다. 그는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교육가요, 정치가요,저술가요,계몽운동가요,언론인이요,무궁화 애호가요,거기다가 음악가도 된다. 그는 현대 음악뿐 아니라 시조와 가야금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그의 재능과 활동은 모두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위하는 일로 사용되었다. 그가 양양군수로 부임할 때 지은 시
설악산 돌을 날라 독립기초 다져놓고
청초호(靑草湖) 자유수(自由水)를 영(嶺) 너머로 넘겨
민주의 자유강산을 이뤄놓고 보리라.
를 보면, 그이 애국충정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그많은 활동을 통해 애국자의 길을 가는 동안 수많은 고난을 당하였다. 5번이나 옥에 갇히었다. 일제가 1910년대의 무단정치의 실패는 정치자금의 부족에 있다고 판단하고, 1920년대 문화정치시에는 무수한 작위와 자금으로 독립운동가를 매수하였다. 그로 인해서 수만은 애국자들이 변절하고,부끄러움 속에 소리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아니하였다.그는 무궁화 동산에서 무궁화와 더불어 살다 가셨지만 지금 우리 가슴에는 무궁화와 함께 살아 계신 것이다.
1977. 독립유공자가 추가 보상자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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