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대처는 어떻게?
급성장하는이슬람,어떻게대처할까?
황인철 목사, 이슬람의 역사적 배경에서, "이슬람 전통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은 그의 어머니 하갈과 함께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서 처음 살기 시작하였다고 주장"한다고 밝혀
이슬람은 6세기 초반 우상숭배자들이 넘쳐났던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되었다. 이슬람 전통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은 그의 어머니 하갈과 함께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서 처음 살기 시작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메카는 우상의 도시였으며, 외부의 영향으로 그들은 다양한 종교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은 최고의 높은 신으로 알라를 믿었으며, 사바인의 영향으로 별, 천사, 그리고 우상들과 동등하게 믿었다. 특히 카바(Kaaba)신전 주변에는 360개의 우상을 가지고 일 년 동안 매일 하나의 우상들을 섬기는 다신론 숭배지역이었다.
카바 신전은 아담이 세웠으나 무너진 것을 아브라함이 재건했다고 믿고 있으며, 이 카바 신전이 메카에 세운 최초의 경배지로서 아직도 인류에게 복을 내리고 인류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믿고 있다.
이슬람이 형성되는 배경에는 유대교와 기독교 영향 이전에 먼저 부조들의 종교인 애니미즘을 무시할 수 없다. 벨(R.Bell)이란 이슬람 학자는, 이슬람은 “알려지지 않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종파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아시아에 있는 종교 생활의 전체 흐름에서 일어났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슬람은 1세기 유대교의 지대한 영향, 4세기 기독교 이단의 부정적인 영향, 6세기 기독교인의 영향, 그리고 많은 우상숭배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서 오면서 유대교가 전파 되었다. 그래서 7세기 무함마드 시절에는 메디나 주변에 유대 부족들이 많이 살았고, 코란은 유대교 영향을 가장 많이 받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기독교보다 더 자신들의 종교는 문화적, 역사적 발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떨어졌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아라비아에 이미 있었던 애니미즘과 유대교와 기독교와 기타 종교의 영향권에서 형성된 종교이다.
이슬람교를 처음 창시한 사람은 무함마드(Muhammad)이다. 그의 최초의도는 기존 종교의 정화 . 개혁이었지만 반드시 새로운 종교의 창시는 아니었다. 그가 내세운 유일신 알라는 아랍세계에 과거부터 있었던 아랍 민족 공통의 최고의 신이다. 무함마드는 알라는 이외의 모든 신을 다신교적 우상숭배의 미신으로 모두 부정하는 한편 혈연 공동체 개념을 배제하여 유일신 알라로의 절대 귀의를 통해 아랍민족 전체의 결합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무함마드는 고도 메카의 명망 있는 꾸라이쉬 부족의 하쉼 가문 출신이다. 570년경에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고아로 자랐다. 낙타몰이꾼으로 대상에 참가해 북쪽 시라아 지방을 자주 내왕하면서 기독교를 비롯한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미래의 꿈을 키워갔다. 25세에 15세 연상의 부유한 과부 카디자와 결혼한 후 생활이 안정되자 메카 부근의 히라 동굴에 들어가 명상과 사색에 잠겼다.
15년 이란 긴 세월이 흘러 마침내 나이 사십에 천사 가브리엘(Gabriel)을 통해 “읽어라! 창조주이신 너의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께서는 한 방울의 정액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라는 알라의 첫 계시를 받는다. 그는 이것으로 각성하여 ‘라쑬룰 라’(알라가 보낸 사람)로 자처하면서 유일신 알라의 종교인 이슬람 포교에 나섰다.
그의 생애의 나머지에 걸쳐서(그는 AD 632년에 62세의 나이로 죽었다) 무함마드는 수많은 다른 계시들을 받았고 이들은 “낙송”을 의미하는 코란에 수집되었다. AD 613년까지 무함마드는 공개적으로 그의 메시지를 설파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알라에게서 온 것으로 메카의 사람들더러 알라에게 복종하고 부복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우상숭배 하던 것을 중단하고 이기심과 물질주의를 버리라고 외쳤고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일부는 귀담아듣고 복종하였으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새로운 가르침을 설파한지 6년이 지나자(613-619) 부유층들이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메카에서 우상 무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부유한 상인들이 이 가르침 때문에 위협 받게 된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무함마드는 그해 여름에 아랍 부족들의 초청을 받아 개종자 70명과 함께 622년, 메디나로 이동하는데 이 해는 이슬람 역사에서 무척 의미 있는 해가 된다. 바로 622년을 기준으로 이슬람 달력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슬람에서는 메디나로 이주를 “헤지라(거룩한 천도)라 하고, 이때 무함마드와 함께 이주한 70명을 ‘무하지룬(이주한 자)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기독교의 12사도와 같은 최고의 존경과 권위의 대상이 된다. 무함마드의 이주와 함께 ’야스리브‘라는 도시의 이름은 ”메디나(예언자의 도시)로 바뀌었다.
또한 사회성도 풍부한 것이 특색이고, 이슬람의 주체성에 대한 교리가 완성되어 간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종교적 의무의 규정과 일상생활에 관한 구체적인 계시가 내려져 후세 샤리아 법학의 원천이 되었다. 이 시기의 계시들은 실로 법률적이라 할 정도로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고 이 가운데는 당시 사회의 전통을 타파하는 혁신적인 요소가 많다.
이 메디나 기간의 계시는 이슬람 세계라는 새로운 사회를 탄생시켰고 그 때까지 내려오던 전통적인 부족 사회를 대신하는 윤리를 내놓았으며 이를 기초로 하여 앞으로 있을 이슬람 세계의 정신적인 바탕과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였다.
무함마드가 메디나에서 많은 추종자를 얻긴 했지만 그의 진짜 목표는 메카의 정복이었다. 그러니깐 메디나는 일종의 피난처였던 곳이다. 그는 메카 사람들이 자신을 반대하는 이유가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고려 때문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만일 그들이 거절하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믿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624년에는 메카의 대상을 습격하는 동시에 예배의 방향을 예루살렘에서 메카로 변경함으로써 메카 정복의 의지를 나타내었다.
이슬람교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무력으로 메카를 정복하여 메카를 이슬람교의 성지로 한 것이다. 서기 630년 마침내 메카를 무혈정복하고 잡다한 우상을 제거한 후, 이곳을 이슬람 성지로 만들었다. 무함마드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메카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이슬람교를 무력으로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무함마드는 승리를 장담하는 첫 전투에서 입을 다쳤으며, 많은 신도들이 죽음으로 한때 수렁에 빠지기도 하였다. 부득이 그는 메카와 평화 협정을 맺고 화해를 하였지만 메디나로 친거 8년 만에 평화조약을 깨고 무력으로 메카를 정복했다.
그는 메카를 정복 한 후에 명실 공히 정치와 종교의 수장으로 신정 국가를 건설, 메카를 성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메카의 함락과 이슬람교 성지로서의 정착은 주변에 아랍인들에게는 큰 두려움이 되어 결국 주변의 아랍 부족들은 무함마드에게 굴복하였다. 또한 무함마드는 알라신의 이름으로 당시에 부족 간의 갈등의 종식시키고 부족 통일에 전력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과 부족들을 알라 신의 뜻에 복종시키기 위하여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죄악으로 생각하지 않음으로 이슬람교를 사랑의 종교로 보다는 칼의 종교로 만들게 하였고, 이것으로 인하여 지금도 이슬람교 국가는 종교가 정치 이데올로기로 변질하여 종교의 정치화를 초래하였다.
이슬람교는 정통 칼리파 시대(632~661 A.D)로부터 우마이야 왕조(661~750 A.D), 압바스 왕조(750~1257 A.D) 및 오스만 트르크 제국(1299~1922 A.D)을 거치면서 중동지역의 아랍족은 물론 이민족까지 교화시켜 왔다.
황인철 목사/ 남부산교회, Ph.D(교회사)
'━━ 지성을 위한 ━━ > 이슬람에대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슬람에게 속고 있는 한국 (0) | 2017.03.18 |
---|---|
기독교인이 알아야 할 이슬람 교리 몇 가지 (0) | 2016.11.11 |
무슬림에 대처하자! (0) | 2016.11.09 |
이슬람교 (0) | 2016.10.29 |
꼭 알아야 할 이슬람 관련 10가지 (0) | 2016.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