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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연[朴 堧, 1378(우왕 4) -1458(세조 4)]

Joyfule 2014. 2. 16. 23:42

 

 

박 연[朴 堧, 1378(우왕 4) -1458(세조 4)]

 

 

개요 : 조선 초기의 음악가. 본관은 밀양. 초명은 연(然).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蘭溪),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왕산악(王山岳)·우륵(于勒)과 함께 한국의 3대 악성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태종 11년 (141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판서·대제학에 이르렀다. 대금을 잘 불고, 현경을 만들었으며, 악기의 신조와 용법의 개량, 악곡의 개정과 형식의 확립, 아악·향악·당악의 음계 조정, 정재무의 정리, 악제의 혁신 등 한국 고유 음악의 토대를 굳혔다.

세종 때 율관(律管:동양에서 악율의 표준을 정하기 위하여 만든 12개로 된 관)을 만들어 편경(編磬)을 제작하는 등 조선 초기 음악완비에 많은 공헌을 했다.

 

초년 : 할아버지는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시용(時庸)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천석(天錫)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이다. 어려서 고향인 충청북도 영동의 향교에서 공부를 했다. 11세에 모친상을 당하자 1년의 상이 끝난 뒤에도 3년 동안 여막에 거처했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상을 치렀다. 예악(禮樂) 연구에 뜻을 두어 유적(遺籍)을 수집하여 그 의칙(儀則)을 연구했으며, 음률에 대한 이해가 뛰어났다. 1405년(태종 5) 생원시에, 1411년 문과에 급제했다. 그후 집현전교리·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을 거처 세자시강 원문학으로 있으면서 당시 세자였던 세종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아악의 정비 : 세종 때는 고려말 이래의 혼란이 수습되고 정국이 안정되어 문물제도의 정비사업이 각 방면으로 전개되었는데, 그는 음악면에서 세종을 보익(輔翼)하여 구래의 면목을 일신하게 되었다. 1426년(세종 8) 봉상판관(奉常判官) 겸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향악(鄕樂:우리나라 음악을 당악에 대하여 이르는 말), 당악(唐樂:신라시대 이후에 전래된 중국 속악의 총칭), 아악의 율조(律調) 등을 조사했으며, 악기의 그림과 악보를 실어서 한 권의 악서(樂書)를 편찬하자고 상소했다. 그는 아악을 정비하는 데 있어서 먼저 편경과 편종(編鐘)을 조율하는 데 필요한 율관 제작에 착수했다. 해주산의 거서(?黍)와 남양산의 경석(磬石)을 사용하여 제작한 율관에 의거하여 1427년 편경 12매(枚)를 만들었다.

 

1430년 악기의 조율을 새롭게 한 그는 조정의 조회(朝會)에 향악 대신에 아악을 쓸 것을 건의했다. 그의 개혁안은 매달 1일과 16일의 조회에만 아악을 쓰고, 당상(堂上)과 당하(堂下)의 관현악을 동시에 합주하고, 조회의 아악은 선궁(旋宮) 즉 이조(移調)를 쓰자는 것이었으며, 이해 10월에는 남급(南汲)·정양(鄭穰) 등과 함께 조회악기(朝會樂器)를 제작했다.

이듬해 정월, 세종이 근정전(勤政殿)에서 신년하례를 받을 때 새롭게 제정된 아악을 처음으로 연주하게 해 안마(鞍馬)를 하사받았다. 같은 해 회례(會禮)에도 아악을 사용하자고 건의하여 5월에 정양과 함께 회례악공(會禮樂工)과 무동(舞童)의 관복(冠服)을 왕에게 올리고, 사정전(思政殿)에 나온 세종 앞에서 문무이무(文武二舞)의 작변지절(作變之節)과 속부남악지기(俗部男樂之伎)를 추게 했다. 1433년 정월 처음으로 문무이무가 회례에 채택되었고, 속악정재(俗樂呈才:궁중 잔치에 사용하던 춤과 노래)에도 기생을 폐하고 남자가 추게 했다.

 

만년 : 1433년 7월 요언혹중(妖言惑衆)의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박도(朴蹈)의 상소로 파직되었으나, 세종의 배려로 아악에는 그대로 종사했으며 공조참의·첨지중추원사·동지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1445년 명나라 황제 영종(英宗)의 설절사로 다녀온 뒤 중추원부사·인수부윤 등을 역임했다. 1488년 세종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소전(文昭殿) 옆에 불당을 낙성하자 경찬회(慶讚會)에 사용될 관현악 반주곡을 새로 짓고 악기를 새로 만들어 공인(工人) 50명과 무동 10명에게 연습시켰다. 1456(세조 2) 셋째 아들인 계우(季愚)가 단종복위에 관련되어 죽음을 당했으나, 그는 3조(朝)를 역사(歷仕)한 원로라 하여 죽음을 면하고 파직되어 고향에 내려갔다. 저서로는 〈난계유고〉가 있다. 영동 초강서원(草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아들 季愚 : 집현전학사인 세째아들 季愚가 단종 1년(1453. 10) 계유정난으로 구금, 국문 당하고 안평대군 黨與, 訛言(거짓말, 유언비어-계유정난때 단종 임금의 자리를 빼았으려 한 자가 안평대군이 아니라 수양대군이다)을 한 姦黨의 根柱라며 1454. 8. 15 추석날 단종이 동구릉의 현릉과 건원릉에 추석제를 지내고 돌아오던중 중랑포 주정소에서 교형 명령을 하여 대기하던 중 1454. 9. 9 중구날 처형되었다. 하지만 박 연은 3朝에 걸친 원로였던 까닭에 연좌죄를 면하고 목숨을 구하였으나 두 아들과 손자까지 전국에 흩어져 유찬(유배)되었고 난계 박연은 高山에 (1454. 9. 9-1458. 2. 2) 3년 5개월간 安置(귀양)되었다가 풀려나 49일만에 서거하셨다.

 

박계우가 1454. 9. 9 重九날 교형 당하고 약 9개월 후 1455. 윤6. 11 단종은 손위(임금의 자리를 내놓음)하고 세조는 수선(임금의 자리를 빼앗음)하였다. 絞刑 약 1년 後 1455. 9 死六臣은 集賢殿에서 朴季愚의 貞忠卓節義 精神을 거울 삼아 제1 端宗 復位 運動을 始作하였으나 9개월뒤 擧事하기로 한 날인 1456. 6. 1 成均館 司藝(正4品) 金 ?, 右贊成(종1품) 鄭昌孫의 告發로 事前 綻露나, 軍器監 앞에서 死六臣 等 많은 忠節臣이 1456. 6~7 斬刑되였다.

 

박 연(네델란드인)

조선 인조 때에 귀화한 네덜란드인. 일본을 향하던 중 제주도에 표착했다. 훈련도감에서 근무했고, 병자호란 때 출전했다. 포로 왜인의 감시·통솔, 홍이포의 제조법·조작법을 지도했다.

본명은 벨테브레(J.J.Weltevree)이다. 홀란디아호 선원으로 아시아에 왔다가 1627년 우베르케르크호로

바꿔 타고 일본을 향하여 항해하던 중 제주도에 표착했다. 동료 D.히아베르츠, J.피에테르츠와 함께 음료수를 구하려고 상륙하였다가 관헌에게 붙잡혀 서울로 호송되었다.

훈련도감에서 근무하였는데, 병자호란 때 세 사람 모두 출전하여 박연을 제외한 두 사람은 전사하였다.

그는 포로가 된 왜인들을 감시·통솔하는 한편 명나라에서 들여온 홍이포의 제조법·조작법을 지도하였다.

1653년 H.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이르렀을 때 그들을 서울로 호송하고, 하멜이 도감군오(都監軍伍)에 소속되자 그를 감독하는 한편 조선의 풍속을 가르쳤다. 조선여자와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다.

 

박연폭포(朴淵瀑布) [소재 : 경기도 개성]
박연폭포

겸재 정선(鄭敾, 1676~1759) 작품

 

옛날 송도삼절이라 하여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 이 세가지를 일컸는데 지금은 가볼수 없지만 박연폭포의 장관은 아주 멋있다고 한다. 그런 박연폭포의 명칭에 대한 한 이야기가 내려오는데...

옛날 철마산 가까운 마을에 박진사라는 선비가 살았는데 그는 퉁소를 매우 잘 불기로 소문이 났다.
하루는 철마산의 폭포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어머니께 권유를 했다. 허나 몸이 조금 불편했던 어머니라 거절을 했다. 그런 연유로 그는 이웃 친구들과 산에 올랐다.
과연 산은 아름다웠고 폭포 역시 장관이었다. 그는 이내 퉁소를 불기 시작하였다. 폭포소리와 퉁소소리는 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었다.
그랬던지 박진사는 그칠 줄 몰랐다. 그만 내려가자는 친구들의 말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도취해 있었다. 어쩔 수 없었던지 친구들은 돌아가고 해 지기 전에 돌아오라는 어머니의 말을 잊은 채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차분한 퉁소소리는 물 속의 용녀에게까지 들려 그녀를 잠 깨우게 했다. 용녀는 통소 부는 박진사에게 반했고 이내 유혹할 궁리를 하였다. 그리하여 용녀는 아리따운 여인으로 변신해 접근하였다. 그리고는 세속을 떠나 홀로 사는 여인이라며 집으로 초대를 하고싶다고 박진사에게 말했다. 이런 산중에 집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한 그는 곧 따라갔다. 하지만 용녀의 집은 물 속에 있었다. 용녀는그를 믿게 하고는 물 속으로 데려갔다.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는 폭포로 찾아 나섰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 헤매고 또 헤매었지만 아들을 찾을 수 없자 슬픔에 잠겨 그만 폭포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후 박진사가 빠져 죽었다 하여 박연폭포라 부르게 되고 용녀가 살았다 하여 선폭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개성시 북쪽 16㎞ 지점에 있는 천마산(757m)과 성거산 사이의 웅장한 화강암 암벽에 걸쳐 있다. 높이 37m, 너비 1.5m. 북한 천연기념물 제 3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산성폭포라고도 하며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 가운데 하나이다. 예로부터 명유 서경덕과 명기 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유명하다. 박연이라는 명칭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옛날 박진사가 이 폭포에 놀러 왔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도취되어 못 속에 사는 용녀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진사의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폭포에 떨어져 죽었다고 생각하고 비탄에 빠져 자신도 떨어져 죽었다.

 이때부터 그 못을 고모담이라 했으며 박씨 성을 따서 박연폭포라 불렀다고 한다. 폭포 위쪽에 있는 직경 8m의 박연(朴淵)은 큰 바위가 바가지 모양으로 패여 생긴 것이며, 그 한가운데에 큰 섬바위가 솟아 있어 흘러내린 물이 이 바위에 부딪쳐 박연에 담겼다가 폭포로 떨어진다. 또한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밑에는 직경 40m나 되는 고모담이라는 큰 못이 있다.

고모담 동쪽 언덕에는 범사정이라는 정자가 있으며, 서쪽에는 용바위라고 하는 둥근 바위가 물에 잠긴 채 윗부분만 드러내고 있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모습은 마치 은하수가 떨어지는 듯 아름다우며, 그 소리는 천둥 소리와 같다. 물이 수정같이 맑으며, 층암절벽이 폭포수 주변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봄에는 진달래, 여름에는 우거진 녹음, 가을에는 단풍 등 계절에 따라 변하는 모습이 일품이다.

 

폭포 위에는 고려 때 축성한 둘레 약 10㎞ 되는 대흥산성(大興山城)이 주위의 험준한 산봉우리들을 연결해주고 있다. 주위에는 대흥사, 관음사약수, 만경대, 고려시대의 이궁지(離宮址)를 비롯한 많은 고적들이 있다. 1957년 박연폭포 주변이 휴양소로 지정되면서 현대적인 체육시설과 각종 오락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개성-박연 간에 버스가 왕래하며, 해마다 국내외의 많은 관광객이 찾아든다.

 

박연폭포(개성난봉가) - 김점순

 

박연 폭포 흘러가는 물은

범사정으로 감돌아 든다

에~ 에헤야~ 에~에루화

좋고 좋다 어라 함아 디여라 내사랑아~

 

건곤이 불로 월장재 하니

적막강산이 금백년이로다

천기청량한 양춘가절에

개성명승고적을 순례하여 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