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민주화 운동’ 했다는 이들의 착각과 오만 _
최보식 선임기자
문재인도 받았고
동의대 사건 관련자도
'왕재산 사건'의 간첩도
'민주화 증서'를 받았다
모두 9800여명
보상금 총액 1100여억원...
대입 전형에서 ‘민주화 특혜’가 생겼고 또 ‘민주화 유공자 가족 혜택 법안’도 국회에 제출됐다고 했을 때, 다섯 번 수감돼 총 9년 이상 살았던 장기표 선생을 떠올렸다. “사실 나는 데모할 수 있는 대학생이어서 특혜를 받았다”는 그는 10억원가량 민주화보상금을 거부했다. 지금 세태를 보면서 그때 괜히 그랬나 후회하지 않을까 싶다.
김대중 정권 시절인 2000년 ‘민주화보상법’ 제정이 이뤄지자, ‘왕년에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신청자들의 접수가 넘쳐났다. 당시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는 한 번 회의 때마다 수십 명, 많게는 100여명씩 민주화 운동 관련자를 쏟아냈다. 당사자들에게 ‘귀하는 대한민국의 민주헌정 질서 확립에 기여하고…’라는 문구의 증서가 주어졌다.
이는 노무현 정권까지 계속돼 민주화 증서를 받은 숫자는 9800여명이 넘었다. 지급된 보상금은 총 1100여억원이었다. 5·18 광주민주화 유공자들은 이와는 별도였다. 노무현 정권 시절 문재인 민정수석도 ‘대학에서 시위를 주도하다 경찰에 맞서 투석전을 전개한 활동으로 집시법 위반,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된 사실’로 민주화 공인(公認)을 받았다.
1980년대부터는 집시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유치장이나 구치소 구경을 해본 학생들이 넘쳐났다. ‘투사’는 아니어도 시위대에 따라다니다가 무더기 연행· 훈방 조치를 받은 적 있을 것이다. 이런 경험도 당사자에게는 민주화 투쟁 기억으로 남아있을지 모른다. 강도(强度)의 차이가 있었을 뿐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정의감, 약자 편에 서겠다는 휴머니즘이 충만했던 시대에 살았다.
이들 중 누구는 민주화에 기여한 유공자가 되고, 나머지 전부는 왜 안 됐을까. 민주화보상법에는 ’1964년 이후 권위주의적통치에 항거하여 헌법이 지향하는 이념 및 가치의 실현과 민주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라고 해놓았지만, 실제 심사 잣대는 달랐다. 헌법 가치나 민주 헌정 질서와는 상관없이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시국 사건으로 구속⋅수감됐느냐가 기준이었다. 가령 5공 시절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관련해 징역 3년을 선고받은 학생들이 나중에 민주화 관련자가 됐다.
진압 경찰·전경 7명이 숨진 ‘동의대 사건(1989년)’의 시위 학생 46명도 모두 민주화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당초 입시 부정을 규명하라는 학내 시위가 참변이 발생하자 ‘민주화 운동’이 된 것이다. 이들에게 평균 2500만원의 보상금이 지급됐다. 특히 화염병을 던져 현장에 불을 낸 혐의로 무기징역을 받았던 학생은 5000만원을 받았다. 그는 두 번 감형으로 총 6년 3개월 살고 특사로 풀려났다. 당시 문재인 변호사가 학생 측 변호인이었다. 경찰 유족이 ‘경찰 죽음에 책임 있는 이들을 민주화 관련자로 인정한 것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냈지만, 노무현 정부 시절 헌법재판소는 이를 각하했다.
북한의 대남 혁명 노선에 동조해 친북·반미 활동을 했거나 법원에서 이적(利敵) 단체로 판결난 조직 구성원들도 대부분 ‘민주화 증서’를 받았다. 특히 80년대 학생 운동은 김일성 주체사상이나 사회주의 혁명 이론을 근간으로 삼았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국가정보원이 오랜만에 자생적 간첩 조직을 적발한 적 있었다. 소위 ‘왕재산 사건(2011년)’이다. IT 개발업자 등이 북한 지령을 받고 10여년간 간첩 행위를 해온 것이다. 이 중 두 명은 김대중 정부 시절 ‘민주화 관련자’로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각각 420만원, 14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고 한다.
뒤돌아보면 80년대는 젊음의 열정과 이념 서적 몇 권으로 진로(進路)의 좌표를 찍던 시절이었다. 두 차례 수감 생활을 했던대학 후배는 “그때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여겼지만 실상은 시대착오적 이데올로기 투쟁이었고 역사를 후퇴시켰다”고 말했다. 그 세대가 좀 더 현명하고 양심적이었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이념으로 우리 사회를 가두었던 자신의 책임도 성찰했을 것이다.
물론 민주화 과정에서 어떤 이들은 더 많은 열정과 헌신, 희생을 바쳤다. 대중 앞에 나서는 몇몇 명망가도 필요했다. 하지만 민주화는 ‘경제 발전’이라는 기반에서 가능했다. 5공 시절 중산층이 대거 형성됐기 때문이다. 경제에 여유가 생기자 정치 민주화의 욕구를 분출했다. 권위주의 체제로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음을 당시 정권도 알았다. 1987년 직선제 개헌은 ‘넥타이 부대’로 상징되는 일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얻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80년대 운동권은 여전히 그 민주화를 자신의 공(功)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런 집단이 북한 정권 민주화 요구에는가장 겁을 내는 것도 아이러니다. 세월이 갈수록 이들은 배타적인 권력 패거리가 됐고, 마침내 정의와 공정의 반대편에서 ‘민주화 특권 계급’을 형성했다. 자기들끼리 많이 축하했을 것이다.
/ 조선일보 [최보식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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