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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석옥린 목사 (장로교)

Joyfule 2009. 7. 3. 01:15

순교자 석옥린 목사 (장로교)

 

 

석옥린 목사(1900-1950)


일신의숙 이사장으로 민족교육을 시도하였다. 부백리교회에는 인근 동리에서 몰려온 청소년들로 가득찼다. 그들앞에 나선 석옥린목사는 청중을 휘둘러 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아는 것이 힘입니다. 배워야 삽니다. 우리 조선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이 고생을 하는 것도 공부하지 못한 대중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 따라서 하세요. 아는 것이 힘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배워야 산다” 청소년들은 목에 힘을 주고 교회가 떠나가라 외쳤다.

 

일신학원은 석옥린목사에 의해 세워진 민족학교였다. 석옥린은 1900년 2월 28일 평안남도 평원군 동암면 부백리에서 석은찬 영수의 3남으로 출생했다. 부친 석영수는 부백리교회를 개척 설립한 인물로서 비교적 개화된 사람이었다. 그래서 석옥린은 한문만 읽은게 아니라 보통학교도 다닐 수가 있었다.

그가 20살 되던 해에 3.1만세운동이 터졌다. 석옥린은 청년들을 이끌고 부백장터에서 만세를 불렀다. 일경은 눈이 시뻘개서 석옥린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산속으로 들어가 1년을 숨어 살았다. 그러다가 시국이 좀 잠잠해지자 나와서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 아무래도 민족을 이끌려면 배워야 하겠다고 생가해서 21살이란 나이에 중등교육기관에 뛰어든 것이다. 5년의 중등교육 과정을 마친 그는 숭실전문대학으로 가지 않고 평양신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신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전도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신학생이란 개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다녔는데 한학기 공부하고 1-2년 쉬고 또 등록해서 공부하는 것이었다. 석옥린도 그런 교육과정을 밟았다. 그래서 그는 신학교를 9년만에 졸업했다. 1941년 36회로 졸업을 한 것이다. 석옥린은 목사가 되어 아버지가 세운 부백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을 했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 평소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민족교육에 대한 계획을 실천해 나갔다. 一信學院을 창교한 것이다.

 

평원군은 내륙고원에 위치한 산골이어서 가난이 깊었다. 주민들은 공부하기 보다 먹고 살기에 바빠 흙 두더지처럼 땅만 파고 살았다. 석목사가 일신의숙을 사작한다고 간판을 내 걸었을 때에 구름떼처럼 모여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군 전체를 발로 뛰며 지역민들을 설득했다.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제 이름자나 쓸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면사무소에서 공문이 날아들면 무슨 공문인가 읽을 줄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를 보내십시요. 무료로 가르쳐 주겠습니다.” 무료라고 해도 무지한 주민들은 선뜻 아이들을 보내지 않았다. 그 어린아이의 일손도 귀해 당장 급한 농사를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석목사는 일신의숙을 낮에만 가르치는 주간학교를 운영하지 않고 야간학교까지 운영했다.

그들이 바로 이 나라의 부흥을 책임진 동양의 재목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학생들을 교육하며 민족의식과 함께 신앙을 아울러 주지시켰다. 민족의식 교육은 이 나라에 태어난 것에 대한 자각의식이고 신앙교육이란 하나님의 뜻때로 살아갈 의로운 백성을 만드는 지름길이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석옥린은 목사가 되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이 뛰었다. 일제하에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구호를 복창하며 일신학원 창교하여 8.15해방까지 민족의식과 함께 신앙심을 아울러 주입시키고 실천했다. 해방직 후 동암국민학교 명예교장으로 교회를 시무하면서도 학교를 재건축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해방 후 기독교도연맹 결성하고 가입을 강요하는 강양욱의 요구를 거부하고 김화식목사를 중심으로 의식있는 목사들이 기독교자유당을 창당하여 남북이 통일될때 기독교정신을 구현할 민주정부 수립을 목표로 창당준비를 할때 석옥린목사도 중심멤버가 되었으나 내부고발로 창당도 못하고 체포당해 함흥 본궁교화소(형무소)에 수감되어 강제도동에 시달리든중 6.25가 터졌고 1950년 12월 북진하는 UN군들의 의해 함흥과 흥남이 접수되자 퇴각하는 공산당들은 10월 15일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석옥린목사등 애국지사들을 무차별 사살했다. 장남 석윤경목사 차남 석윤식목사 삼남 석윤초장로 장녀 석윤란집사. 손자 석남식목사. 증손 석승권(장신대)으로 신앙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