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신앙인물

순교자 최상은 목사 (장로교)

Joyfule 2009. 8. 12. 00:58

순교자 최상은 목사 (장로교)

 

 

최상은 목사(1904-1950)


최상은은 1904년 11월 21일 황해도 평산에서 최일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네살에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안고 자랐으며 어려서는 한문과 붓글씨에 명필이였다.

1918년 미션스쿨인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 3.1만세 대열에 가담하였고 졸업 후 그는 일본인 경영 방직회사에 취직하여 사회 곳곳의 각종 일에 부딪치면서 일제의 수탈과 극심한 차별대우를 뼈저리게 경험하는 등 나라를 빼앗긴 서러움에 피가 꺼꾸로 솟구쳐 올랐고 일제에 대한 인상은 곱지 않았다.

그가 노동쟁의에 가담하게 된 것은 1924년 봄이었고 시위내지 파업건수가 전국적으로 45건에 이르렀다. 일경은 그를 반역행위로 규정하고 구속하여 심한 고문을 했고 재판결과 4년의 중형이 내려졌다.기도로 옥고를 극복한 후 그는 문평 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 마르다 성경학교를 졸업한 전현숙과 결혼하고 교사로 있으면서 영흥교회의 전도사가 되었다.

 

평양신학교에 재학시 신사참배 반대설교가 적힌 노트의 학생들을 모두 잡아갔다.

1938년 8월 21일 신사참배불참이유로 학교를 자진 폐쇠하고 재학생들에게 무기휴학 통지를 발송했고 27회 총회가 9월 10일 신사참배를 결의하게 되었다.

1939년 평신을 졸업한 그는 함해노회에서 목사로 안수 받은 후 혼자서 50여 교회를 순회하며 돌봤다. 패전이 가까울 무렵에는 더욱 교회를 탄압하여 문을 닫는 교회가 많았다.

 

8.15해방과 더불어 새아침이 밝았으나

1946년 11월 3일 주일선거 강요상황에서 1947년 5월초 아내와 식솔들을 월남시키고 수일 후 결국 자신도 38선을 넘었다.

1947년 응암교회 제 3대 담임으로 부임 교회가 부흥하여 건축이 과제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 공비들이 예배를 방해하는 등 행패가 심하였다. 공비의 표적이 된 그는

 

1950년 6월 18일 당회 앞에 사표를 내고 원남동 처가에 가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중 6.25동란이 터지고 설상가상 아들의 늑막염으로 장례를 치루는 등 슬픔에 잠겨 통곡의 기도를 하는 중 세사람의 내무서원에게 영행되어 소식이 끊겼으니 그의 나이 47세였고 사모와 8남매를 남겨둔채 아무 말없이 갔다. 전현숙 사모는 모진 고통과 가난의 굴례를 뚫고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웠으며 사모는 삼양제일교회 전도사로 귀감이 되었고, 자부 한병옥 전도사는 순교자 유족회 총무로 봉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