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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가와 훈수꾼 _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Joyfule 2021. 5. 12. 07:06



실전가와 훈수꾼 _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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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靑실장, 정치인 장관이 부동산·최저임금 정책 만들어
나라 경제를 이념의 칼로 난자… 선수·코치 역할 따로 있다
암 환자에 어떤 치료법 쓸지 결정하는 일은 실전가의 영역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교수 휴게실은 오후가 되면 종종 바둑 열기로 가득했다. 고수로 통하는 교수끼리 맞붙으면 앞다퉈 훈수를 두고 또 누군가는 구수한 해설로 재미를 더했다. 바둑이라곤 ‘아다리’밖에 모르는 필자 입장에서야 무슨 소린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나 곁에서 노(老)교수님들의 입씨름을 듣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한 교수님은 훈수에 있어서 최고수로 통했는데 실제 대국을 두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궁금해서 여쭤봤더니 ‘세상엔 실전에 강한 사람이 있고 훈수에 강한 사람이 있는 법이네’라며 빙긋 웃으셨다.

 

세상사가 다 그렇다. 전성기 시절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타이거 우즈도 전담 코치를 두고 계속 스윙을 점검받았다. 그렇다고 코치들이 실전에서 타이거 우즈보다 골프를 잘 치진 못했을 것이다. 산업 현장의 컨설턴트도 마찬가지다. 컨설턴트로서 탁월한 실력을 지녔다 해서 현업에서 실력이 발휘된다는 보장은 없다. 실제 이들을 비싼 몸값에 영입했다 말아먹은 회사가 부지기수

다. 반대로 실전에 강하다 해서 반드시 좋은 훈수꾼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스타플레이어는 좋은 코치가 되기 힘들다. 세상은 훈수꾼과 실전가의 영역이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이 정부는 과거 참여 정부 시절 자신들이 추구했던 경제 개혁 정책들이 좌초한 이유 중 하나로 보수적 관료들의 저항을 꼽았다. 이에 따라 되도록 관료를 배척하고 특히 586 세대 정치인이나 교수 또는 시민단체 출신을 각료로 중용했다. 청와대 정책실이나 경제수석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각 부처에서 ‘에이스’라고 불리던 관료들이 도태되기도 했다. 훈수꾼이 등판하면서 실전가를 ‘구축(驅逐)’한 것이다.

 

이러니 시행하는 정책마다 부작용이 속출했다. 스물세 번인지 스물네 번인지 ‘두더지 잡기’형 부동산 정책이 대표적이다. 교수출신 정책실장과 정치인 출신 장관 조합이 만든 정책들은 부동산 가격을 폭등시켜 역대 최대의 자산 격차를 초래했고 MZ 세대들의 미래를 압류했다. 부동산 전문가뿐 아니라 전직 관료들까지 우려를 표했지만 결국 ‘마이 웨이(My Way)’를 부르짖다 이런 사달이 났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은 저임금 근로자들의 실직을 불러왔다. 52시간 근로제는 화이트 칼라와 블루 칼라, 대기

업 종사자와 중소기업 종사자 간 임금 격차를 더 확대하고 말았다. 성장은커녕 이 정부가 그렇게 외치던 분배가 소득과 자산, 즉 플로(flow)와 스톡(stock) 양쪽에서 모두 악화되었다. 한 번도 제대로 실전을 경험한 적 없는 훈수꾼들, 더군다나 ‘정치적 또는 학자적 소신’으로 무장한 확신범들이 등판해 사구(死球)를 남발한 격이다. 정치와 이념의 칼로 국가 경제를 ‘실험실의 청개구리’처럼 난자한 것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란 격언처럼 정책 당국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정책 목표의 설정뿐 아니라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최적의 정책 조합을 찾아내는 직관과 스킬셋(skill set)이다. 이러한 직관과 스킬셋은 경험을 통해 체화된 숙성의 결과물이다, 종양내과 의사들이 암 치료를 할 때 방사선을 써야 할지, 화학·표적·면역항암제 중 어떤 종류를 어떤 시점에 얼마만큼 투약해야 할지, 치료법을 병용할 것인지 아닌지 그 효과와 부작용에 대해 경험에 기반한 입체적 분석이 필요하듯 경제 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경험의 유무가 훈수꾼과 실전가의 결정적 차이다,

경제정책 어젠다 2022

 

최근 김낙회·변양호·이석준·임종룡·최상목, 장·차관급 전직 관료 다섯이 새로운 경제 시스템에 대한 마스터 플랜을 ‘경제정책 어젠다 2022’란 제목으로 출간했다. 저자 한 명, 한 명이 모두 경제 정책에서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실전가’들이다. 이들은 ‘부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이에 필요한 재원을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포함한 규제 완화와 재벌 정책을 중심으로 한 공정한 경쟁 환경 조성을 통해 조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재명 경기도 지사의 ‘기본소득제’가 화두

가 되다 보니 엉뚱하게 ‘부의 소득세’가 마치 이 책의 ‘주절’처럼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이는 ‘종속절’에 해당되고 이에 필요한 재원 확보를 위한 규제 완화와 공정 경쟁이 이 책의 ‘주절’에 해당된다. 돈을 쓰기는 쉽다. 버는 것이 힘든 거지. 이 책의 방점은 국가가 어떻게 돈을 벌어 유용하게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다. 기존의 교조적인 ‘훈수용’ 이념서와는 차별화되는 ‘실전용’ 행마법을 만날 수 있다. 필자를 포함해 훈수꾼만 난무하는 세상에 실전가들이 드디어 전면에 나섰다.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 조선일보 [朝鮮칼럼 The Colum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