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신앙인물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Joyfule 2021. 8. 7. 04:04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8) 수상이 된 카이퍼

1901년 8월, 64세의 카이퍼 수상이 이끄는 내각이 출범했다.
1888~91년, 반혁명당과 가톨릭당의 연립정부였던 막케이 내각 이후 다시 우파가 정권을 잡게 된 것이다.
물론 이번에도 반혁명당(24석)과 가톨릭당(25석)을 주축으로 한 연립정부였다.
카이퍼는 수상직에 전념하기 위해, 자유대학 교수, 헤라우트지 편집장, 하원의원 등의 직무를 그만 두었다.

1902년 빌헬미나 여왕의 중병으로 인하여, 그 해 9월 그녀가 회복될 때까지 화란은 비상사태나 다름없었다.
국회의 입법과정이라든가 여러가지 국정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하는 여왕이 왕위 계승자가 없는 상태에서 그 자리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은 커다란 문제였고, 카이퍼 내각은 집권 초기부터 이런 문제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런 중에도 카이퍼는 보어전쟁(영국-남아프리카 보어족간의 전쟁)을 중립적인 위치에서 효과적으로 중재하여, 1902년 5월 31일 페어에이닝힝 평화 조약을 이끌어내었다.

1903년 1월 9일 수로 운수회사 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약 3개월간 노동자들의 파업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 문제는 수로 운수회사 노동조합과 철도회사 노동조합이 서로 얽혀서 야기된 것으로, 결국 철도회사의 파업으로 이어졌고, 전국적으로 확산된 이 파업에는 국가적 내분의 양상까지 나타났다.
이 파업은 점차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에 의해 놀아나게 되었다.

이에 카이퍼는 2월 24일 반철도파업법을 국회에 제출함으로 대처하였고, 사회민주당, 자유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조직한 저항위원회가 이 법안의 제정을 강력히 반대하였지만 4월 11일 그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 법안으로 화란에는 철도파업이 재발되지 않았고, 이 법률은 아직도 화란 법전에 남아있다고 한다.)
사회주의자 장관이나 노동운동조차 이 법안을 반대하지 않았고, 카이퍼는 계속해서 노동자들의 법적지위와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입법화를 추진하였다.

1904년에는 러일전쟁이 발발했는데, 동인도지역을 식민통치하고 있던 화란은 중립정책을 견지했다.
이로 인해 또다시 카이퍼 내각은 업무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 기간에 카이퍼 내각은 아주 인상깊은 업적을 이루었는데, 그것은 바로 고등교육법의 입법이다.
카이퍼 수상은 1903년 3월 11일 '국가적 자격'이라고 불리는 법적 지위를 일정한 규정조건과 적절한 제도 아래서 비공립대학의 학위와 성적에 부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고등교육법안을 하원에 제출하였다.
이는 유일한 비공립대학이었던 자유대학의 폐지만을 바라던 자유당과 사회주의당의 즉각적인 반발을 촉발시켰다.

이 법안은 국회에서의 심한 논란 끝에 1904년 3월 24일 우파(56-1) 대 좌파(40+1)의 양상으로 하원에서 통과되었지만, 좌파가 우위를 점하고 있던 상원에서는 7월 14일 27 대 22로 부결되었다.
이에 카이퍼 내각은 상원 해산을 결심하였고, 여왕이 이에 동의하여 7월 19일 상원이 해산되었다.
8월 3일 열린 상원 선거에서 우파가 승리를 거두었다.
정부는 다시 법안을 제출하였고, 1905년 3월 9일 하원에서는 58 대 38로, 5월 20일 상원에서는 27 대 15로 이 법안을 채택하였다.
이제 자유대학을 비롯하여 이후에 설립될 어떤 비공립대학도 국립대학들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학교가 국가로부터 자유로와야 한다는 카이퍼의 지론에 의한 것이었고 이 고등교육법은 그의 가장 위대한 입법상의 업적으로 대표된다.

흥분되고 혼란스러운 4년간의 임기동안 카이퍼 내각은 충실하게 업무를 수행하였다.
반혁명당을 탈당했던 로만 역시 카이퍼를 적극적으로 도왔고, 이는 야당에게는 지극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애써서 카이퍼 내각의 업적을 과소평가하려고 하였다. 그리고는 1905년 선거전을 자유주의 대 카이퍼의 구도로 몰고갔다.
좌파 정당들은 반(反)카이퍼 연대를 형성하여 카이퍼를 혹평하였고, 그를 흠집내기에 열성을 다하였다.

1905년 카이퍼는 반혁명당 국가위원회 의장직을 임시적으로 사임하였다.
4월 13일 반혁명당 전국대회는 바빙크 박사를 의장으로 열렸다.
그리고 그 전국대회에서 선거제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던 슈탈만과 그 동료들이 공식적으로 탈당하였다.

6월 29일 선거에서 우파가 48석, 좌파가 52석을 차지하였다.
반혁명당을 탈당한 슈탈만은 기독교 역사주의당과 함께 독자노선을 택했고 5석을 차지하였다. 만일 그가 우파에 연대하였더라면, 선거 결과는 53 대 47로 우파가 승리했을 것이다.
비록 이 결과가 카이퍼와 그 내각의 실패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암튼 카이퍼에게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1905년 8월 16일 카이퍼와 그의 내각은 퇴임하였다.
이제 그는 한 평범한 노(老)시민이 되었다.
*----------------------
당시 유명한 풍자만화가였던 알버트 한(Albert Hahn)은 "Abraham de Geweeldige(두려운 아브라함)"이라는 제목의 만화를 그렸다고 한다. 그것은 무거운 뺨, 아랫쪽으로 쭉 내린 입술과 턱, 사납게 노려보는 눈과 깊이 패인 주름살의 거의 사각형에 가까운 카이퍼의 머리를 그린 것이었다. [그림보기]
한(Hahn)과 같이 카이퍼 박사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에게서 분노와 잔인한 인상을 느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