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신앙인물

어거스틴의 사상이 현대에 미친 영향

Joyfule 2017. 12. 7. 01:25

 

 

   어거스틴의 사상이 현대에 미친 영향 

 

  III. 어거스틴의 회심

 

1. 회심에 영향을 준 요인들
메타니아 ( )는 우선 그 성서 신학적 의미를 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인식의 변화", "지성의 변화", "전인격의 변화"라 볼 수 있는데 어거스틴은 그의 생애중에 경험한 온전한 변화를 통해 삶이 이레네우스가 주장했던 바대로 삶의 새로운 장( - : recapitulation)을 구성했다. 특별히 그의 변화를 세미한 데 이르기까지 수사 학자로서의 탤런트를 잃지 않고 고백록에서 정리하고 있을 정도로 그는 믿음 이전의 생애와 믿음 이후의 생애를 철저히 분리시키고 있는 것을 살필 수 있다.
그러면 그의 회심에 영향을 준 일련의 요인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자.
첫째로 그의 삶에 대한 진지한 추구성, 둘째로 삶을 통해 겪었던 만남의 사건들, 셋째는 지극히 작은 사도 바울의 겸손한 고백, 넷째는 무엇보다 중요한 어머니 모니카의 신앙적 배려, 다섯째는 개인적 삶의 쓰라린 비극의 경험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장에서는 이 만남의 사건들을 정리 해보고자 한다.

 

1) 삶의 진지한 추구로서의
어거스틴이 회심한 직후 그의 큰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친구 Alypius에게 달려가서 자기를 회심으로 이끈 말씀, 로마서 13장 13절을 기쁨으로 낭독할 때 Alypius는 그 뒤 로마서 14장 1절을 명상하며 어거스틴이 믿음의 성안으로 입성한 것을 환영하면서 그의 회심 후의 상황을 예측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여! 내 영혼은 당신의 품안에 안식할 때까지 평화를 누릴 수 없나이다.' 한 그의 고백을 보면 곧바로 회심을 통해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게 될 때까지 그의 삶과 신학함에 있어서 끝없는 추구를 감행한 삶이 진정한 대립을 향한 변증법적 삶의 진행이었다고 보여준다. 다시 말해 그의 회심의 가장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은 완전한 생명의 고지에 올라 흔들림 없는 자연 계시의 통달을 향한 열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어거스틴은 당시의 지성인으로서 시대의 엘리트들을 사로잡고 있던 희랍철학에 문외한이 아니었다. 그의 AD400년에 완성된 고백록이 오늘의 사람들에게까지 공감을 불러일으킴은 기독교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함도 있겠거니와 당시의 수사학 교사로서 잘 훈련된 언어를 구사했다는 점에 있다. 이처럼 그의 헬라 철학을 통한 예비 교육( )이 "가장 진실된 철학인 기독교의 품안"으로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몽학 선생의 역할을 잘 감당했다는 점입니다.

 
2) 삶 속에 나타난 만남의 사건들
한편 그의 회심에 영향을 준 요인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또 하나의 회심을 전후한 개인 생활에서 만남을 가진 인물들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생애중 특별히 회심을 유발시킨데 직간접으로 도움을 준 대상들을 살펴 보면 회심후 그의 삶이 윤리적으로 금욕적이며 또 고백적인 상태로 변화되고 한편으로 회심을 통해 결단적이고 급진적이기도 한 삶의 국면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그의 회심에 영향을 주고 있는 만남의 대상들 중에 이집트의 사막에서 영웅적인 금욕 생활로 당시의 많은 신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준 안토니 (BC3)와의 만남이다.

"만남의 신학자"마틴 부버가 "나"와 "너"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의식적으로 자각할 수 있건 없건 간에 하나님이 거기에 임재하신다"고 보았고 "너"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모든 만남에 인간은 '영원하신 분' 을 만나게 된다"라고 얘기했던 것처럼 평범한 사람이 감히 도달할 수 없을 정도의 철저한 금욕적 생활의 성취를 친히 안토니가 보여 주었을 때 진리 탐구에 끝없는 열정을 불태웠던 그에게는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참회록에 수도사 안토니와의 만남후 철저히 안토니와 같은 전적인 변화의 양상을 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입장을 보면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 나를 회심케 했고 그럼으로 나는 더 이상 여자를 (아내를)취하지 않을 것이요, 이 세상의 약속들을 더 이상 취하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기독교가 금욕주의냐 하면 어거스틴의 사상에 의하면 철저히 금욕주의가 되고 그러나 세계와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세상을 이탈하는 금욕주의가 아니라 세계 안에서 금욕주의다. 형태를 취하는 세상과의 역동적 관계를 이루는 위치에서 기독교의 위상을 정리할 수 있다. 그같은 분명한 위치 확립이 어거스틴이 안토니와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후대 수도원 운동의 여러 문헌 가운데 나타난 처녀성(virginity)에 관한 입장 속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처럼 안토니와의 만남은 그의 신앙관에 분명한 획을 긋는 세계 내적 금욕주의 입장을 체계화했고 만남의 중요성을 구체화했다.

 

3) 바울을 통한 감동

한편으로 어거스틴이 마니교에서부터 계속적으로 연구해 오던 paul의 사상은 어거스틴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모든 학자들의 일관된 입장이다.
특별히 R.A. 머로우는 바울에 관한 모든 주석이 어거스틴의 저술 속에서 발견될 정도로 바울의 입장과 일치한 신학자였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의 회심 직전의 클라이막스, 위기의 순간에 바울의 고백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라는 겸손한 고백을 감당치 못할 자로다(고전15:9) 전하면서 겸손함이 없는 자신의 재발견과 바울의 겸손한 덕에 놀라움을 표한다.

 

물론 마니교에 있을 때에는 계속 그들의 주장에 따라 바울에 관한 이해를 하고 있었으나 마니교에서의 바울 이해는 종합적이라기 보다는 단편적이었고 그들의 전이해 즉 신학적인 편견으로만 바울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훗날 바울에 관한 종합적이고 정당한 이해가 이르렀을 때는 마니교가 가지고 있는 모든 취약점을 극복한 순수 바울적인 신앙과 신학적 입장에 섰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의 겸손한 고백이 그의 세속적 욕망 추구에 매진하고 있었던 상황에 한 도전을 제시하였고 그의 생애에 하늘의 생수로 새로워져야 한다는 영적 각성에 한몫을 담당했다.

 

4) 어머니 모니카의 후원(support)

32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종으로 온전한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어거스틴의 배후에 산들바람처럼 동행했던 어머니의 사랑의 후원(support)은 어거스틴의 회심의 사건에 빼놓을 수 없는 만남의 요인이 된다. 이교도인 아버지보다도 더욱 어머니에 관한 짙은 영향을 술회하고 있는 어거스틴의 고백록의 내용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모성애는 마치도 바닷가의 부드러운 바위라 치면 부성애는 그 바위를 향해 돌진해 오는 파도에 불과한 것임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특별히 불신의 아버지에게 보여준 신앙의 인내와 덕은 어거스틴의 고백록에 잘 묘사되어 있고 그를 향한 모성은 위대한 모범이 되었다. 어거스틴이 나이 30세 초에 세상의 욕심을 따라 밀란을 향하여 어머니와 이별하려 할 때 보여준 이별의 아픔을「모니카의 고통」이란 항에서 정리하고 있는데 그는 카르타고를 떠날 때 어머니에게 여행하는 친구를 마중하기 위하여 부두에 나간다고 속이고서 당시의 최대의 문화 중심지인 밀란을 향해 몰래 떠났는데 그같은 망동을 어머니는 개의치 않으시고 아들을 위해 홀로 남아 눈물로 하나님의 면전을 축축이 적셨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가 밀라노에 도착하여 여장을 푼뒤, 얼마 지나자 그의 생애에 어머니의 중보의 기도로만 해결되는 심한 중병을 앓게 되는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것 같은 심한 열병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데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경건한 신앙에 감동을 받아 세례를 요청했던 시절을 상기하면서 그때와는 전혀 달리 하나님의 도움을 청해야 할 중요한 때에 냉담한 자기를 이상히 여기며 어머니의 간절한 중보의 기도가 역사 함으로 자기의 영적이며 육적인 이중적 죽음에서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힘입게 했노라고 고백한다.

"그와 같은 두려운 공격이 내 어머니의 자애의 가슴속에서 극복되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 질병은 치료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그 사랑을 나는 다 설명할 수 없다. 그녀의 해산의 고통, 육체를 이 세상에 출생했을 때 겪었던 그것보다도 성령을 통해 나를 출생케 했던 것이 더욱 심했다. . . 계속적으로 당신에게만 향해진 그같은 기도들이 어떻게 될 것입니까? 오! 자비의 하나님! 당신은 하루에 두번씩 빠지지 않고 계속 당신의 보좌에 희생을 드리는 한 과부의 순수하며, 절제와 함께 드리는 겸손하며 상한 심령을 결코 무시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술회하면서 아직 불신앙의 생활 속에 있었던 자기를 위해 기도한 어머니의 경건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생애에 어머니의 노력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회심 사건 이후 어머니와의 신학적 대화를 전개한 대목을 소개하고 있는데

①육체적 욕망은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의 달콤한 것과 비교할 때 관심 밖의 것이며 그것과 관련하여 전혀 언급의 가치가 될 수 없다는 점,

②육체적 영역의 것들을 넘어서서 태양, 달, 그리고 별들에 관하여 논하다가 하나님의 솜씨에 감탄하면서 이런 방법으로 영혼까지 이르러 이스라엘을 진리인 영원한 양식으로 먹인 소멸되지 않는 법,

③생명은 지혜요 지혜로부터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에 존재하고 미래에 존재할 모든 것이 창조되었으며 그 지혜는 영원한 지혜이다라는 점과

④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할 것도 아닌 단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영원에 관한 주제 등을 어머니와 함께 토의했다고 전하고 있다.

신학적 지성과 신앙의 경건성을 소유한 어머니 모니카의 죽음에 직면한 어거스틴은 객지에서 영면하면서 보여준 어머니의 결단성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기술하기를 (동생이 함께 동석하여 임종을 지켜봄) "너희들은 나의 몸이 어디에 묻히는 것에 개의치 말아라 유일무이하게 너희들에게 요청하는 것이 있는데 너희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주의 제단에 거할 나를 잊지말아라"라고 전하고 있다. 어거스틴이 신학사에서 거성이된 배후에는 이같은 어머니의 감동적인 밑거름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리라 본다.

 

5) 당대 지성들과의 만남

또 다른 한 요소 어거스틴의 회심에 영향을 준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당대 신플라톤주의자였으며 기독교인 된

①밀란의 감독 암브로시우스와

②암브로시우스의 영적 아버지라볼 수 있는 Symplicianos와

③당시의 최고 지성인 Victorianos 와의 접촉이다.

 

암브로시우스는 철저히 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하여 성서를 이해함에 있어서 철저히 숨겨진 의미인 '영'적인 해석을 주장하였으며, 육신적 생각은 인간의 영혼에 거슬리는 것이고,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향해 방향전환을 하는 것은, 곧 금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영혼에서 떨쳐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한 편지에서 보면 성도들이 어떤 교회에 가게 된다면 그 지역 교회의 습관에 따라야 할 것을 권면하면서 암브로시우스의 밀란에서의 충고를 어머니에게도 따를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암브로시우스의 권위를 긍정하고 있다. "나의 어머니께서 밀란에 오셨을 때 토요일에 교회가 금식하지 않은 것을 보고 매우 곤란을 느끼며 그리고 그는 어떻게 해야 될는지 당황했으나 나는 그런 일에 큰 관심은 없었으나 어머니 자신을 위해 암브로시우스의 충고를 따르도록(토요일 금식하지 않음)권면했다. 그리고 암브로시우스 입장은 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 더 나은 규칙이 있다면 자신의 규칙을 따라도 되지만 자기의 주장을 존중하여 지켜도 무방합니다"라고 얘기했으며 그의 입장은 어떤 별다른 이유 없이 단순히 권위에 복종하는 양 토요일 금식을 포기할 것을 의도했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분명히 어거스틴은 거기에서 일종의 거만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는 나에게 계속해서 말하길 "나는 (암브로시우스;역자주)로마에 갔을 때 또한 토요일에 금식을 했으며 여기에 있을 때는 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어느 교회에 가든지 지역 교회의 관습을 지키시기 바랍니다"라고 암브로시우스는 입장을 밝혔는데 "나로서는 (어거스틴)훗날 자주 이 주장에 관해 거듭 되생각해 보면서 그 입장을 하늘이 준 일종의 신탁으로 받아 드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회심 직전에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는 어거스틴에게 바울 신학의 총체적 이해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음을 우린 중요하게 봐야 된다. 철저한 이원론의 입장에서 마니교의 교리 중 영지 주의의 요소는 바울이 마니교의 예언자였으나 바울을 영지 주의적 입장에서 이원론으로 보고 있기에 9년동안 마니교에 몸담았던 어거스틴의 바울 이해는 철저히 마니교적인 면과 영지주의적인 면으로 채색되어 오해되고 부분적인 이해만 갖게 되었는데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의 방향은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바울을 더욱 깊이 이해하며 총체적인 이해를 접근할 수 있도록 도전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묵시 문학적인 작품으로만바울 서신을 이해하는 마니교의 입장에서 탈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386년 8월의 밀란의 정원에서 나타난 하나님과의 만남(encounter)을 통한 새로운 창조로서의 회심시까지 그의 선입주견은 여전히 다음과 같이 남아 있었다. "안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할지라도 내 지체 안에 다른 법은 무엇을 의미하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그를 자유롭게 할 것인가"란 의미는 무엇인가 위와 같은 그의 추구는 철학적 전승에서 이어받았던 질문, 이 감각의 세계 위에 초월한 어떤 치료자로서의 대상을 단지 자기 자신에게서 더이상 찾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의사'이신 하나님을 간구하는 그런 방향으로 그의 사유 세계는 진보되었다.

특별히 암브로시우스를 만난 후 그의 영혼에 거룩한 불이 붙어 가는 즈음에 암브로시우스에게 심플리키아노스란 장로님은 구약을 비롯 바울 신학에 나타난 중심 사상을 설교화 할 것을 권유하였고 어거스틴은 바울의 새로운 이해와 함께 마니교에서 생각했던 구약 무용론을 탈피하여 암브로시우스를 통해 해석된 족장들에 관한 새로운 이해 즉 지혜에 의하여 그들의 영혼이 순수해진 상태를 각자 표현하는 자들로 이해하는 방향으로 이르게 된다.


 

밀란에서 만난 어거스틴의 회심과 관련하여 잊을 수 없는 사람은 암브로시우스의 영적인 아버지라 볼 수 있는 심플리키아누스 장로인데 그는 당시의 밀란에서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의 결합을 시도한 가장 대담한 사람 중에서 걸출한 인물이었다.
당시의 사상적 배경에서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사상의 결합은 하나의 절대적이고 진실한 철학적 문화의 모습이었고 크리스챤 플라톤주의자에 관하여 언급한다면 플라톤 사상의 역사가 아주 자연스럽게 기독교로 집중된 듯했다. 사실 두 가지의 사상 조류는 같은 방향에서 아주 극단적으로 탈 세속적이었으며 그리스도께서 "나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함과 같이 플라톤도 같은 이데아의 영역을 논하였고 암브로시우스에 의하면 플라톤의 제자들은 "사상계의 엘리트"들이었다.


이러한 전반적 분위기에서 어거스틴에게 영향을 주어 마니교의 운명론적이며 폐쇄적인 이원론적 사유 체계에서 벗어나게 했던 신플라톤주의의 외부를 향한 확산(procession)과 내부를 향한 동시에 회귀(turning)하는 발전과 통합의 이론은 그가

 

기독교의 영원한 진리에 도달하게 했던 중요한 변증법적 사유의 진행 과정이었다.
다시 말해서 신플라톤주의의 지도자인 플로티노스의「Enneades」에 의하면 선과 악의 완전한 양극단의 분리의 체계에서 결코 악의 영역이 변화를 가져와서 구원의 길로 전환될 수 없는 마니교의 체계가 최고 선인 "EV↔ 인 다양한 변화의 첫 단계인 인식↔ (인식의 하부구조)↔최종적인 물질인 로 구성된 세상의 구조가 상호 하강하고 상승하는 역동성의 이론으로 어거스틴은 사상의 발전을 가지면서 악의 근본적인 문제가 치료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신플라톤주의에서 발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거스틴으로부터 존경과 신임을 받고 있었던 심플리키아노스 장로는 기독교의 우월성 안에서 신플라톤주의의 체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그에게 그 성안에서 일어났던 어거스틴과 같은 분야 즉 문학적인 방향에서 많은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Marius Victorinus에게 일어난 감동적인 변화에 관하여 상세히 설명하는 순간을 가졌다. 그의 회심 상황을 어거스틴의 심적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고백록에 나타난 에피소드를 여기 소개해 보기로 하자.

성경을 평소 연구하던 빅토리누스는 심플리키아노스 장로에게 고하길 "나도 크리스챤입니다"라고 고하자 심플리키아노스는 담대히 대답하길 "당신이 교회 안에서 발견되지 않으면 저는 결코 당신을 교인으로 불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얘기들을 들은 Marius Victorinuus는 반문하길 "교회의 벽이 교인이란 한계를 그어줍니까?"라고 냉소했다고 한다.

 

러나 그의 영적인 갈증은 성서를 깊이 연구하게 했고 급기야는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해야만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그도 주님으로부터 시인 받을 수 있다는 마태복음 10장32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에 감화를 받게 되고 심플리키아누스 장로를 통해 교회의 입교자로서 공중 앞에서 고백할 것을 청했다고 한다. 그때 교회 당국은 그의 사회적 신분을 감안하여 공개 신앙 고백을 피하고 사적인 고백으로 입교를 인정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그의 용단은 정반대로 공개 고백을 주장했고 그 결과는 당시의 사회에 파문을 일으킬 정도였다고 어거스틴은 설명하면서 그의 평가를 다음과 같이 고백록에서 전한다.

 

당신의 종, 심플리키아노스가 나에게 빅토리아노스의 일화를 들려주었을 때 나는 참으로 그와 같이되기를 열망하는 불타는 가슴이었습니다. 그가 율리안 황제의 칙령으로 크리스챤들에게 수사학과 문법을 가르치지 못하게 될 때도 과감히 그의 명문이었던 학교를 당신의 말씀을 제하고 폐교하면서 '어린아이 입술이 위대한 것을 접한 냥' 그의 전 생활을 당신에게 바치는 기회를 통해 더욱 행복해진 것 외에 그보다 더 큰 생애의 결심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같이 당시 지성들을 통해 지적 만족을 추구하다가 얻은 인생의 궁극적인 해답으로서 크리스챤 정신은 당시의 상황에 참으로 감동적이며 오늘 모든 지성인들의 지적 활동에도 중요한 방향감각을 제시하며 우리의 신학적 노력 마 져도 인격적인 최고의 지성으로서의 하나님을 잘 변증하는 그런 긍정적인 자리에 서야한다는 것도 암시를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