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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의 사상이 현대에 미친 영향

Joyfule 2017. 12. 9. 09:31

 

 

 

   어거스틴의 사상이 현대에 미친 영향

 

  III. 어거스틴의 회심

 

3. 어거스틴의 회심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

 

1) 의 見解

현대 희랍의 기독교 철학의 대표자로 꼽히는 학자 중 는 그의 [철학과 기독교 연구]에서 어거스틴에 관한 항을 페이지까지 할애하고 있는 데 그의 견해를 살펴보면,

첫째로, 어거스틴은 헬레니즘의 당시 모습인 신플라톤주의의 체계를 하나의 구조로 하고 그 속에 기독교란 내용을 담아 철학자요 신학자로 섰다고 보면서 다음과 같이 비유를 들어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란 포도주 부대에 새 술인 기독교를 담아 놓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주장은 어거스틴이 활동하던 5세기까지의 모든 문화유산들에게 문외한이 아니었다는 이해 속에 근거하고 있는데「The city of God」에 나타난 당시의 문화와 철학자들의 사상에 관한 그의 잘 정리된 그리고 기독교적인 관점에서의 정확한 비판은 참으로 놀랄 만하다.

 

둘째로, 의 어거스틴에게 일어난 말씀의 사건으로서의 회심의 역사를 그는 이해하길 하나의 진리가 아니 유일무이한 진리, ( )를 향하여 간절히 열망하는 갈급한 영혼의 에 기초하고 있다고 정리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피조물에 관하여 갈망했던 것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한 바로 그 창조자를 갈망했다." 그는 말하길 "나는 내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피조물에 관해 갈망하거나 목말라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변형의 그림자가 전혀 없으며 한 점의 변화도, 그림자도 없는 바로 진리이신 당신 자신을 향하여 서 있었다." 실로 어거스틴의 생애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의 악도, 선도 다 선용하셔서 그를 향해 우리가 참 인식에 거하도록 하시는 살아서 활동하시는 분임을 인식할 수 있다.

 

셋째로, 그는 어거스틴의 신학 체계는 헬레니즘과 기독교의 창조적 융화를 통해 이뤄진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생애는 바로 고전 헬레니즘을 뛰어넘는 본질을 갖고 있으면서 기독교는 영적인 삶이요 하나님에 관한 내적 이해이다 라고 정리한다. 회심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품안에 안겨서 한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은 "자기의 눈물을 씻을 풍성히 준비된 분이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로 어거스틴은 그의 회심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재창조하시며 인간을 위로하시는 분임을 발견했음이 틀림없다.

 

2)생애를 쓴 Peter Brown의 견해

Augustine의 생애를 단계적으로 잘 정리한 Peter Brown은 어거스틴의 회심을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인 Antony(250-356 A.D)의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구별하고 있다. 즉 안토니는 마태복음 19장21-22절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가니라"한 말씀에서 감동을 받고 고대 세계의 마지막이라 볼 수 있는 지중해 지역에 금욕적 경건한 삶을 통해 모범을 제시했다.

 

물론 Peter Brown은 당시의 elite층인 철학자들, 예를 들면 프로티누스 같은 이들은 플라톤의 「이상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그 도시 이름을 Platonopolis라 명명했다) 노력했으며 은퇴한 로마의 장관(prefect)인 다다너스 같은 이들은 알프스 산정에 있는 그의 마을을 철학자들의 크리스챤적인 변형으로서 'Theopolis' 혹은 'City of God'이란 명칭으로 변경시켰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에 관한 그의 입장을 보면 형태상으로는 그같이 급진적인 변화를 갖고 있으나 내용상으로는 전혀 차이를 갖고 있는 즉 결혼 생활 포기, 그의 공적 지위에서 후퇴, 재정상으로나 사회적인 특권에 대한 희망을 포기했으나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잊어버리지 않고 안토니의 영웅적 결단이 어거스틴의 지적인 프로그램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같은 질적인 회심 사건에 나타난 안토니와의 견해 차이를 Peter Brown은 시인 Zenobius란 사람에게 쓴 어거스틴의 편지를 통해 인용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괴로움을 더해 주는 상처를 취급함에 있어서 몇몇은 고독함 속에 그들을 무감각하게 만들지만(couterizing) 반면에 다른 이들은 자유 교양학의 수단으로 그들에게 유하게 하는 기름을 바른다." 즉 그의 입장에 의하면 어거스틴은 회심 후에도 카시키아쿰에서 친지들과 함께 도서관에 소장된 전통적인 서적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자유 교양학을 더욱 더 세련되게 취급하는 자로 남아 있었다고 관찰하고 있다.

 

이같은 입장에서 선 Augustine이해는 그를 변증론 자로 이해할 승산이 크다. 즉 시대적 상황 특히 문화적 상황에서 기독교의 논리적인 증명을 시도하려는 그의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결국은 Peter Brown에 의하면 어거스틴은 크리스챤 인문주의자로써 철학적 내용을 신학화 했으며 바울이 사도행전 17장 아덴에서의 설교를 통해 보여 주었듯이 당시의 문화적 전통인 B.C4세기천문학자 의 싯귀 "신의 소생"( - )이란 문귀로 자기에게 계시된 창조의 신, 사랑의 신인 하나님을 변증하면서 설교했던 동일한 맥락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4세기의 사람들은 흩어져 있는 은하수처럼 지중해 연안 곳곳에서 수도하고 있었던 수도사들의 무덤은 별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건에 관한 진정한 의미의 토론이 안토니의 시대로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그같은 이해들은 금욕적인 에 입각한 사회적 유대와의 단절을 그들의 수단으로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어거스틴의 회심 속에서 그같은 분리 현상과 함께 동시적으로 명쾌한 명료성을 갖고 가장 진실하게 숨어 계신 하나님을 증명해야만 할 것을 약속하면서 구름을 통해 빛이 확산되듯이 단계 단계적으로 하나님을 보여줄 이론적 계획을 가지고 문화적 엘리트의 유산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3) R. A. Markus의 견해

R. A. Markus는 Peter Brown의 제자로써 그 스승의 입장을 조심스럽게 따르면서 어거스틴의 회심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나가고 있는데 그 내용은 「초대 기독교의 마침」(the end of Ancient christianity)이란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우선 그는 " Non nomine sed opere "즉 "명목상이 아닌 행동으로서의 기독교"란 후렴귀를 내세우면서 도덕적인 열정과 타성과의 끝없는 투쟁을 주장하는 펠라기안의 입장과 어거스틴의 크리스챤 평범성(christian mediocrity)을 대치하면서 어거스틴의 회심론의 입장을 설명해 간다. 사실 펠라기우스는 크리스챤 삶에 있어서 성숙성을 주장하면서 심지어는 "악하게 행하는 것보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상태가 더 나을 것은 못된다"라고 주장하면서, 도덕적인 열정주의를 내세우면서 타성과의 끝없는 투쟁을 요청한다. 이같은 입장은 오늘의 성숙한 시대에 하나님 없이도 인간의 도덕적 노력으로 구원에 도달이 가능하다고 본 「기독교의 비종교화」입장과도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고 사려된다.

 

그러니까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은총에 근거하지 않고 인간 속에 내재한 의지의 힘만으로 하나님의 완전에 도달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며 제롬이 펠라기우스를 다음과 같이 풍자했듯이 "스코트랜드의 죽이 푹 퍼진 것처럼 펠라기안은 인간성에 내재하고 있는 취약점을 부풀게 하고 있다"고 한 것처럼 자유의지가 소유되어 있다는 그것은 그 존재가 자유롭다는 의미 그 자체는 아니다 라고 어거스틴은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 중심에 선 견해를 피력했다.

 

이와 같은 차이를 R. A. Markus는 정리하면서 그 둘의 이론적인 차이가 결혼과 처녀성에 관한 현실 문제로 구체화되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비록 회심 후에 그 자신은 독신으로 살았을지라도 결혼에 관한 그의 신학적인 입장은 니케아 회의에서 그의 신앙 때문에 고난을 충분히 당했던 Paphnutius의 주장, 즉 크리스챤의 결혼에서 발생하는 부부지간의 성행위는 순결과 같은 질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한 주장을 따르고 있다.

 

그러니까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인간의 결혼 제도는 그의 원죄의 유전설과 함께 인간 자신의 영광과 비참과 양대 지류가 된다는 입장이라고 사려된다. 동시에 애매하긴 하나 "결혼은 좋은 것이고 독신은 더욱 좋은 것이다"라는 주장도 발견되고 있다 즉 그의 회심이 몰고 온 사유의 변화는 그의 회심 전에는 플라톤의 Symposium에 등장하는 Diotima훈련처럼 펠라기우스의 금욕주의의 길에 서 있었으나회심을 통한 그의 위치는 도나티스트들과 같은 외적인 분리주의라도 아니었으며, 내적인 분리주의자였던 Pelagian도 아닌 하나님의 빛 아래서 본질적인 성화의 점진적인 과정을 주장했던 신학자요,철학자였다. 특히 이점에서 R. A. Markus는 어거스틴의 세례 받음의 의미를 과거와의 확실한 정화로 그를 치료하는 단번의 사건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일생 동안 계속되는 회복으로 보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convalescence)

 

이상과 같이 어거스틴의 A.D 386년, 나이 32세 때의 깊고도 진한 복음적 경험인 회심 사건을 살펴보았다. 특히 본 연구를 통해 기독교의 영향력이 세속 사회를 향해 희미해져 가는 오늘의 정황에서 어거스틴의 회심 사건은 ①신학함의 starting-point로써 ②인생의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참된 행복의 기초로써 모든 인간을 향한 경건한 메세지인 것을 부인할 수 없음을 살펴보았다.

 
그같은 중요성을 안고 어거스틴의 회심 사건은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여러 주변의 요인들이 하모니되어 그의 회심 사건을 향해 밀려오는 해변의 파도처럼 밀고 왔으며 거기에 여타 기독교의 감동적인 지도자들에게서처럼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변화시켰음을 보여주고 있음을 비교적 상세하게 살펴보았다.
 

고대와 중세의 획을 긋는 전환점에 서서 시대적으로 그의 인물됨과 그의 영향력은 컸지만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특별히 서양 문화사에 불굴의 패러다임이 되고 있는데 그의 영적인 투쟁과 고뇌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정신사에 우뚝 솟은 인물이 되게 했다. 특히 신학적 내용의 변증을 시도했던 성자는 역사의 흐름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선구자로서 인정되고 있는데 그만큼 그의 작업은 역사 위에 견고히 관련을 맺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 사실은 역시 뚜렷이 그의 삶의 여정에 일어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회심이 일어나는 순간의 객관성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즉 그의 회심이 역사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점에서 기회를 따라 다시 한번 그의 역사 철학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사려된다.

 

학자들의 흥미 있는 그의 회심에 관한 이해도 그의 회심 사건의 의미를 크게 강조하고 있는 만큼 오늘의 신학도들에게 회심과 신학도와의 긴밀한 관계성을 재삼 인식할 수 있었고 각인의 회심 사건에 의해 그의 사고와 크리스챤의 삶의 방향이 설정되고 있음도 파악할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