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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 사람을 즐기는 사람들

Joyfule 2024. 7. 27. 09:09



엄상익 변호사 - 사람을 즐기는 사람들

 

 

칠십대 중반인 작달막한 대머리의 그 노인은 누구를 보거나 항상 생글생글 웃었다. 형같이 생각하는 친한 노인이다. 같이 외국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여행길에서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도 방긋 웃으며 “핼로우”하고 먼저 다가갔다.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같이 있을 때는 먼저 나를 챙겨주었다. 말도 누구에게나 공손했다. 붙임성이 있는 분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연히 만난 분이다. 변호사와 의뢰인의 관계도 아니었다. 내 사무실 옆 빌딩의 건물주였다. 내가 나이 육십에 바둑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 자진해서 바둑선생이 되어 가르쳐 주었다. 가르치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어 보였다. 그는 소문나지 않은 알부자였다. 노른자위 땅인 청담동과 명동에도 여러 채의 빌딩이 있는 것 같았다. 그와 친하게 되자 한번은 “실례지만 재산이 얼마나 되십니까?”라고 물었다.

“글쎄요, 이천억쯤 될까? 정확히는 모르겠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간단히 부자가 된 경위를 들었다. 가난한 은행원으로 출발한 그는 학벌도 경력도 대단하지 않았다. 내 나름대로 그가 부자가 된 원인 두가지를 찾아냈다. 하나는 그의 대단한 붙임성이었다. 누구에게도 경계심을 주지 않는 외모와 인상이었다. 미소를 지으면서 적극적으로 다가가 관계를 맺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다른 장점도 있었다. 은행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여러 보직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그는 승진보다는 이십년동안 부동산을 담당하는 부서에만 있으면서 그 분야를 전문적으로 파고들었다. 사람들이 돈을 대출받아 땅을 사고 파는 걸 보는 게 재미있었다고 했다. 월급쟁이라 돈은 없었지만 높은 사람들의 고급정보도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좋은 땅과 나쁜 땅을 구별하는 감각도 생겼다고 했다. 그는 외환위기가 닥쳐왔을 때 노른자위 땅이나 빌딩들이 헐값에 내던져지는 걸 보고 그 땅을 사들여 부자가 됐다고 했다. 운이 좋으려니까 수백대 일인 입찰 경쟁에서도 당첨이 되더라는 것이었다. 많은 거래를 했지만 불법이나 탈법을 하지 않아도 돈이 들어오더라고 했다. 그는 부자가 된 자신에 대해 이런 결론을 지었다.

“기본적인 노력과 씨드머니는 만들어야 해요. 그런데 다음은 하나님이예요. 하나님이 물질적인 축복도 주시려고 하니까 넘치게 퍼부어 주시는 걸 나는 경험했습니다.”

부자가 된 또 다른 친구가 있다. 고등학교 동기다. 그도 항상 싱글싱글 웃으면서 남에게 다가갔다. 그는 공인회계사가 되어 대형로펌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미국의 밸브회사 대표가 한국에 와서 그 로펌을 들렸다. 국제관계 업무를 담당하는 변호사들이 모두 퇴근하거나 늦은 시간의 상담을 거절했다. 그가 돌아가려는 미국인에게 다가가 왜 왔느냐고 물으면서 친절하게 대하며 성의를 다해서 안내해 주었다. 물론 수고비도 받지 않았다. 다음해 여름 그가 뉴욕으로 갔다가 거리에서 우연히 그 미국인을 또 만났다. 미국인이 또 독점판매 대리권을 줄테니 자기 회사가 생산하는 밸브를 한국에서 판매해 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상담을 해줄 때 한번 들었던 얘기다. 사양했었다. 그냥 회계사팔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두번째 그 제의를 받으니까 마음이 달라졌다. 사업가로 인생의 궤도를 바꾸었다. 밸브는 단순한 게 아니었다. 스마트폰을 만드는데 필요한 부품이기도 하고 우주복에 부착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고교동기들 사이에 그가 벼락부자가 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이었다. 나의 사무실로 놀러온 그에게서 부자가 된 경위를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한마디로 돈벼락을 맞은 사람이지. 밸브를 팔아먹으려면 내가 로비를 해야 하는데 거꾸로 삼성의 임원들이 내게 와서 스마트폰의 부품을 공급해달라고 사정을 했어. 가격을 깍지도 않고 돈을 먼저 주기도 해. 그게 독점판매권의 특혜지. 재벌그룹에서 미국에 가서 구입선을 만들려고 해도 미국회사에서 ‘노’한 거야. 나한테 가서 사라고 말이지. 특히 외환위기 때는 창고에 있는 재고품들이 하루밤만 지나면 가격이 뛰어 올라. 게다가 외환이 오르니까 그게 다시 더블로 뛰는 거야. 은행이자율이 높으니까 받아놓았던 돈도 눈덩이같이 불어나. 난 부자가 됐어.”

나는  부자가 된 두 사람에게 어떤 장점이 있나를 살폈다. 그들은 자신과 남을 비교하지 않고 살면서 철저히 긍정적인 성격이었다. 그리고 붙임성이 둘 다 대단했다. 얼핏 보면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이 인간에게 엄청난 장점인 걸 깨달았다. 모든 기회나 행불행은 사람에게서 오는 걸 알았다. 사물에 대해 부정적이고 고립된 사람에게는 불행이라는 벌레가 기어갈 확률이 높다는 걸 알았다.

꼭 부자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밥은 관계 속에 굴러 다닌다. 좋은 관계를 맺어야 부자도 되고 높은 자리도 온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중에라도 나의 손자와 손녀들이 그리고 자손들이 이 글을 읽고 적극적으로 관계속으로 들어가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