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십대의 친척 아저씨가 카톡으로 글을 보내왔다. 우렁이새끼들은 제 어미의 살을 파먹으며 크는데 어미 우렁이는 한 점의 살도 남김없이 새끼들에게 다 주고 빈껍데기만 흐르는 물길 따라 둥둥 떠내려간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본 새끼 우렁이들이 “우리 엄마 두둥실 시집가네”라고 하며 슬퍼한다고 했다.
그와 반대로 가물치는 알을 낳은 후 바로 눈이 멀어 배고픔을 참아야 하는데 이때 알에서 나온 새끼들이 어미 가물치가 굶어 죽지 않도록 한 마리씩 자진하여 어미의 입으로 들어가 굶주린 배를 채워주며 그 생명을 연장시켜 준다고 한다. 그렇게 새끼들의 희생에 의존하다 어미 가물치가 눈을 다시 회복할 때쯤이면 남은 새끼는 열마리중 한마리 꼴도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가물치를 ‘효자 물고기’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인지 몰라도 재미있는 얘기다. 바로 내가 엄마의 속살을 다 파먹은 우렁이 새끼같은 존재다. 엄마는 시대의 비극 그 자체였다. 세상이 지옥 자체였던 엄마는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 세살때 온 가족이 몇달을 걸어서 용정으로 갔다. 동네에서 불쌍하다고 주는 감자 한 두알로 연명했다고 했다. 일곱살때 지주집으로 팔려 갔다고 했다. 갓난아기를 하루 종일 업고 있으니까 허리가 부러지는 것 같이 아팠다고 했다. 그런 속에서 아버지 엄마와 동생이 보고 싶어 밤마다 울었다고 했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공부가 하고 싶어 글이 적힌 종이쪽지를 저고리 섶에 숨겨놓고 외웠다고 했다.
일본 소설 ‘오싱 이야기’가 바로 어렸던 내 엄마의 환경인 걸 나중에야 알았다. 엄마는 북에서 결혼하고 혼자 내려오자 남북이 분단되어 가족이 또 생이별을 했다. 6.25 전쟁 때 다른 자식 다 잃고 나 혼자 뒤늦게 태어났다. 엄마는 배운 것 없고 기술도 없었다. 전쟁때 군대에 갔다가 제대한 아버지는 간신히 일자리를 얻었지만 그나마 쥐꼬리 만한 월급이 다 술 외상값으로 날아갔다. 아버지도 시대에 상처를 입고 절망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소주잔에 눈물을 타서 마시며 세상 바깥만 맴도는 것 같았다.
내가 젖을 뗄 무렵부터 엄마는 품을 파는 뜨개질을 시작했다. 엄마의 최대의 공포는 내 새끼 가르칠 돈이 없는 것이었다. 함경도 회령에서 내려온 엄마는 강했다. 나는 엄마가 사람들과 싸우는 악다구니 속에서 자랐다. 못나고 못 배우고 돈 없고 돌아갈 고향도 없는 혼자가 엄마의 처지였다. 엄마는 참 많이 무시당하는 것 같았다. 남들에게 자주 얻어맞기도 하고 “너 같은 년은 못생겨서 똥갈보도 못해” 하는 저주 같은 욕을 먹는 것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엄마가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 걸 본 적이 없다. 철에 맞는 옷을 입는 것도 못봤다. 수은주가 영하 십도 아래로 내려가도 난로 없는 다다미방에서 그냥 잤다.
엄마의 소원은 내가 많이 배우는 것이었다. 이상했다. 내가 유년 시절 엄마는 길을 지나다 변호사 사무실을 보면 멀리서 그 간판에 대고 합장을 했다. 못 배웠다고 무시하는 사람에게 엄마는 내 아들은 너보다 백배 천배 가르치겠다고 종주먹을 휘둘렀다.
나는 엄마의 그런 깊은 상처와 한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가 공부를 한 이유이기도 했다. 내가 입시나 고시를 칠 때 엄마는 산속의 얼음이 얼어붙은 물 속으로 들어가 기도했다. 고드름이 된 머리로 절을 하며 빌었다. 내가 경기중학교에 합격했을 때와 사법고시에 합격하던 날 두번 나는 엄마의 행복한 얼굴을 봤던 것 같다. 우렁이새끼처럼 나는 엄마의 속살을 다 파먹고 컸다. 그런데 나는 친척 아저씨가 보낸 글중의 효자 가물치같은 존재가 되지 못했다. 세상에 눈을 더 돌리고 엄마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정말 나쁜 아들이었다. 엄마는 영원히 나와 함께 있을 것 같았다. 세월이 가고 엄마의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엄마가 문갑 속에서 수표와 돈뭉치를 꺼내 주면서 말했다.
“아들, 죽기 전에 오억원을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조금 모자라. 다 채우지 못했지만 어쩔 수 없어. 받아.”
그 현찰 중에는 내가 어머니에게 매달 준 용돈들까지 그대로 다 들어있었다. 엄마가 덧붙였다.
“아들, 법을 하는 사람은 돈 때문에 양심을 팔아서는 안돼. 정직하게 살아. 아들이 돈 때문에 타락할까 봐 엄마가 모은 거야.”
우렁이는 엄마의 살을 파먹지만 나는 엄마의 피와 생명을 먹은 거 같았다. 우렁이는 껍데기만 남은 엄마가 물에 흘러갈 때 “우리 엄마 두둥실 시집가네”라고 했는데 나는 뭐라고 했더라. 고맙다고 했나 미안해라고 했나 내 엄마였어서 사랑해라고 했던가 이제는 기억이 아스라하다.
'━━ 감성을 위한 ━━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하던 일과 즐거운 일 (0) | 2023.08.19 |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좋은 사람 구분법 (0) | 2023.08.18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지팡이와 막대기 (0) | 2023.08.16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참회한 악마 (0) | 2023.08.15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대통령이 찾아간 국수집 (1) | 2023.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