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시인(詩人)의 꿈
어젯밤 우연히 유명한 시인이 쓴 수필 한 편을 읽었다. 시인이 대학 사학년 무렵이었다. 상당히 궁핍했던 것 같다. 그는 강가에 있는 낡은 창고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해 여름 장마가 오고 낡은 창고를 위협하듯 강물이 불어나고 있었다. 삶에 대한 불안과 함께 그는 섬뜩한 강물을 보며 순간 아득한 절망감에 빠졌다. 순간 어떤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갔다.
‘나는 시인이 아닌가!’
순간 그에게 닥치는 모든 상황이 시를 쓰고 문학을 하기 위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계시같이 여겨졌다. 그날 밤 그는 시인으로서의 삶을 거룩한 소명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는 시인으로서 이름을 날리고 인도의 전문가로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나는 변호사를 하다가 사건 관계로 우연히 한 시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소년 시절 자동차 수리공으로 일하면서 시를 썼다. 그는 문학의 천재였다. 두 개의 일간지의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그는 일을 하면서 시를 썼다. 완벽한 작품을 남기고 싶었다. 젊은 시절 인도를 여행하고 명상을 하면서 내공을 쌓은 후에 나이 육십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쓸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의 나이 육십고개에 올라서자 마자 하늘에서 그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암이었다. 내가 그의 임대아파트로 찾아갔을 때 그의 주변은 우울한 회색빛이었다. 그는 혼자서 외롭게 죽어가고 있었다. 복지사가 가끔 찾아와 목욕을 시켜주고 인근의 성당과 학교에서 말린 누룽지와 반찬을 가져다 준다고 했다. 그는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것도 힘겨워했다. 그런데도 시인의 영혼에는 삶의 아름다움과 황홀함이 가득차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아침에 작은 창문을 열고 이슬이 맺힌 호박꽃을 봤다고 했다. 누가 호박꽃을 밉다고 표현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시인이었다. 병원의 침대 매트리스 아래 공책과 연필을 놓고 계속 시를 썼다.
시인이란 지구별로 여행을 온 천사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가난하게 살던 천상병 시인은 이 세상에 잠시 소풍왔다가 돌아간다고 했다.
오십대 중반경 나는 갑자기 시(詩)를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배낭을 메고 매일 국립중앙도서관을 찾아가 서가에 꽂혀있는 시집들을 읽기 시작했다. 많은 시인들이 시전집이 되어 그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병화 시인이 일생 쓴 시들은 그 양이 엄청났다. 정독도서관 구석 시집이 놓인 서가에서 박노해 시인의 빨간 시집을 만났다. 남다른 예민한 감성을 가진 시인이 극한의 고통을 침묵의 체로 걸러 빚은 시들이었다. 왜 시인들을 예술가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언어라는 물감을 주물러 아름다움과 감정을 정교하게 형상화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강가에서 낚시를 하듯 아름다운 시어를 발견하면 그걸 노트북이라는 어망에 담아 오곤 했다. 시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름다움을 보는 마음의 눈이 있어야 하고 떨리는 가슴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그게 없는 것 같았다. 시를 읽다보니까 수십년 세월 저쪽의 어렸던 시절의 어느 날 내 모습이 앞에 다가왔다. 초등학교 사학년 무렵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집에 가지 말고 선생님이 교실에 남아 있으라고 했다. 아이들이 다 돌아간 텅 빈 교실은 고즈넉했다. 교실의 창문 틈으로 상큼한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나는 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선생님은 교실 앞 문 옆에 놓였던 국화가 들어있는 꽃병을 가져다 내 앞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이십분쯤 후에 돌아올테니 이 꽃만을 바라보고 있다가 선생님이 돌아오면 무엇을 느꼈는지 말해 보거라.”
나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꽃을 봤다. 꽃보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학교를 빠져나가 어둠침침한 만화방에서 ‘짱구박사’의 다음 편을 보고 싶었다. 그래도 선생님이 하라고 하니까 앞에 놓인 국화를 보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냥 교실을 드나들 때 무심히 지나쳤던 국화였다.
국화를 집중해서 바라보니까 갑자기 허공에 눈부신 노랑색이 퍼지는 것 같았다. 무채색의 공간에서 빛이 태어나고 있었다. 갑자기 싱그러운 국화꽃 향기가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잠시후 교실로 들어온 선생님은 교실 앞 창가에 붙은 선생님의 책상 옆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책상서랍을 열고 그 안에서 대학노트 한 권을 꺼내 내 앞에 펼쳐 보여주었다. 만년필로 쓴 작고 예쁜 글씨들이 나란히 줄을 서서 함빡 웃고 있었다. 선생님이 쓴 시(詩)들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시라는 것과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 선생님은 초등학교 교사로 평생을 풀꽃같은 시를 쓴 나태주시인 같은 분이라고 할까. 자기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사는 게 행복아닐까.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고 인생길을 가다가 자신이 꿈꾸던 나와 만나는 작은 성공이 진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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