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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밥 사

Joyfule 2024. 6. 29. 00:20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밥 사  

 

친구들의 모임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소년 시절부터 칠십고개를 넘은 지금까지 인생길을 동행하면서 우정을 나누는 사이다. 모두가 궁핍하지는 않고 노년에 친구 밥사줄 정도는 된다. 나름대로 자기 분야에서 존중을 받는 것 같다. 우리를 관계를 접착시켜 준 본드 같은 요소가 있다. 그것은 소년 시절 공통의 좌절이다. 우리는 원하는 대학을 갈 성적이 되지 않았다.

나는 인생길에 장애가 있을 때는 한발 물러나 돌아가겠다고 했었다. 일류가 안되면 이류나 삼류로 살자고. 반장이었던 친구가 내 의견에 동조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지 않겠다고 했다.

그때 몇몇 친구들이 뜻을 같이 했다. 서로 위로하는 과정에서 동지 의식이 생겼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장년의 계곡을 넘어 노년의 해안까지 오십년 세월 우리는 같이 흘러왔다. 만날 때 마다 돌아가면서 밥을 사는데 내 순서였다.친구들에게 밥을 사는 게 기쁜 일이고 돈을 잘 쓰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괜찮은 중국음식점에서 좋은 음식을 사고 싶었다. ​

해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우리는 중국음식점의 방에 모였다. 종업원이 나에게 메뉴판을 주려고 하는데 중간에서 한 친구가 가로채면서 말한다.​

“상익이가 주문하면 안 돼. 비싼 걸로 할 게 틀림없어. 그냥 싼 걸로 해서 조촐하게 먹자고.”​

그는 이미 내 마음을 눈치챈 것 같다. 그리고 다음번에 낼 다른 친구들의 주머니사정도 감안해서 적정선의 메뉴를 선택하는 것 같다. 건배를 할 술로 ‘제갈량’이라는 이름의 백주를 선택했다. 처음 보는 술이었다. 지난번 일본여행때는 ‘닷사이’라는 술로 약간의 호사를 했었다. ​

밥을 사니까 아침에 친구가 카톡으로 보내준 짧은 글의 내용이 떠오른다. 까칠한 세상에서 내가 먼저 밥 한끼를 사는 ‘밥사’는 박사보다 더 높은 인생의 학위라는 것이다.​

돈은 벌기보다 쓰기가 더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돈 버는 건 기술이고 돈 쓰는 건 예술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작은 잔에 술을 채워 건배를 하고 이십대 힘들던 시절의 추억을 추억을 떠올리며 한마디씩 한다. 그중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한번 밀렸다는 실패 의식으로 대학에 들어와 공부를 더 열심히 했잖아? 졸업 무렵 내가 행정고시를 볼 때였어. 분명 커트라인을 훨씬 넘는 합격점수를 받았는데 떨어진 거야. 알아보니까 경제학이 삼십구점이었지. 아무리 전체점수가 좋아도 사십점이 못되는 과목이 있으면 불합격이었지. 대학 입시때 그러더니 한 끝발 차이로 또 밀리는 거야. 다행히 다음해에 합격해서 사십년을 공무원을 해먹었어. 시험 한번 합격한 걸로 그렇게 오래 밥을 먹었으니 정말 감사지. 마지막에 장관까지 할 줄은 나도 몰랐어.” ​

그가 같은 고등학교 동기 중에 유일한 장관이었다. 인생의 마지막 고지는 끝까지 가 봐야 아는 것이다. ​

우리 모임중에 그런 또 한 명이 있다. 그는 대학졸업 후 중소기업에 다니다가 뒤늦게 외무고시에 합격했다. 명문대와 TK출신들이 승승장구하는 외교관의 세계에서 그는 외로운 것 같았다. 어느 날 상관이 그에게 조직에서 대사가 되거나 차관급이 되기는 힘들 것이라고 솔직히 말해 주더라는 것이다. 상관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그는 이차대학 출신에 지역차별인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친구인 그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해외근무를 할 때 그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는 대사관의 모든 일을 거의 혼자서 처리하고 있었다. 대사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하나님 모시듯 잘해주는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는 끼리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는 조직의 두꺼운 벽을 뚫고 핵심의 자리인 차관이 됐다. 그의 투지는 믿음에서 오는 것 같았다. 그는 모든 게 은혜라고 하면서 감사하고 있었다. 나는 밥을 샀는데 친구들은 삶에 감사하고 있었다. 감사가 밥사보다 한 단계 위인 것 같았다. ​

평생을 고정적으로 모이는 열 명의 친구들은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그냥 쉬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근엄한 재판장을 하던 친구는 퇴직후 오카리나를 배우고 다섯 명의 악단을 만들어 버스킹연주를 하면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젊은시절 판사를 하면서 너무 과분한 대접을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한다고 했다. 겸손하고 자신을 낮추는 친구였다. 법원장을 지낸 다른 친구는 산동네 장애노인들이 사는 쪽방에 도시락을 배달한다.​

나는 ‘밥사’고 장관을 지낸 친구는 ‘감사’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은 ‘봉사’다. 훈훈한 저녁분위기였다. 나는 기차를 타고 다시 동해로 내려가고 있다. 십이월이다. 따뜻했던 금년 한 해가 거의 다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