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젊은 시절 삽화 몇 장면
내가 있는 바닷가로 친구가 찾아왔다. 머리가 하얗게 바랜 우리들은 바둑을 복기하듯 두고 온 과거를 꺼내놓고 즐겁게 낄낄댔다. 회사생활을 오래 한 그의 말 중에 이런 게 있었다.
“내가 신입사원으로 지사에 발령이 났었어. 과장이 위에 올릴 사고 발생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했지. 내가 보고서 안에 ‘우발적사고’라고 표현했더니 과장이 ‘돌발적’이라고 고치라는 거야. 신참 직원이니까 시키는 대로 했지. 그걸 가지고 부장한테 결제받으러 갔더니 다시 그 표현을 ‘우발적’이라고 고치라는 거야. 그래서 그걸 고쳐가지고 다시 과장한테 갔지. 그랬더니 의심의 눈길로 나를 보는 거야. 내가 부장에게 얘기해서 자기를 묵살하지 않았나 생각하는 것 같았어.”
고인물 같이 정체된 조직의 모습이었다. 친구가 말을 계속했다.
“과장이 거래처에 나를 데리고 가는데 나를 어떻게나 무시하는지 옆에 있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 투명인간이었어. 나는 보이지 않는 그런 수모들을 견디지 못해 사표를 냈지. 회사생활에서 끔찍한 장면이 많았어. 내쫓기로 한 인물이 버티면 어느날 밤 책상 걸상을 빼서 그걸 화장실 앞에 배치하는 거야. 화장실 앞에 앉아 있으면 지나가는 동료나 후배들이 다 보잖아? 그 모멸감이 엄청나지. 더 처참한 건 지나가던 동료들이나 후배가 화장실 앞의 그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는 거야. 그런 걸 보고 소름이 돋았지. 신입사원때 서울 본사 임원이 나를 부르더니 사표를 철회하고 회사생활을 견뎌보라는 거야. 일년 동안 꾹 참았더니 서울의 본사로 발령을 내주더라구. 얼마 있지 않아 내가 과장이 됐어. 지사에서 나를 괴롭히던 과장이 서울 본사로 올라왔는데 그 때 보니까 정식과장도 아니고 과장 직무대리였어. 내가 말도 안 하는데 내 책상 옆에 서서 굽실거리며 비굴하게 눈치를 보더라구.”
인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필수요건인 것 같다. 그의 말을 들으니까 대기업에 다니던 먼 친척 동생이 떠올랐다. 그가 다니던 회사가 다른 회사에 인수합병되고 그 회사의 직원들과 한 팀을 이루게 되었다. 친척 동생은 새로 조직된 팀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편이었다. 어느 날 그 친척 동생이 이런 하소연을 했다.
“내가 새로 만들어진 팀에 적응을 하려고 노력을 해도 받아들여 주지를 않아요. 인수합병된 회사의 직원은 완전히 찬밥이었죠. 팀장이 일을 주지 않는 거예요. 일을 해야 점수를 받고 평가를 받는 데 한 일이 없으면 가장 낮은 등급의 평가를 받거든요. 그걸 두 번 받으면 퇴사하도록 규정이 되어 있어요. 나를 내쫓으려고 일을 주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날 저녁 나보다 나이가 어린 팀장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어요.”
참고 참아야 회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 같았다. 국가조직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정보수사기관에서 잠시 근무하면서 신입직원들의 인내심을 테스트 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신입직원이라고 하지만 나름대로 다 경력이 있는 엘리트들이었다. 사관학교를 나온 장교들도 있었다. 그 기관의 고참 직원이 그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정보부는 좌익혁명가들과 사회의 이면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전투조직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혁명이 성공하면 고통을 당할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잡은 좌익혁명가에게 고통을 가하는 입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고통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라도 맛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조직 지하실에서 먼저 제공하는 기본선물은 몽둥이 오십대입니다. 여러분은 다섯대씩 맞아 보는 체험을 하세요. 다만 이 매를 맞는 데 모멸감을 느끼거나 인내하지 못할 분들은 지금 바로 집으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우리 조직은 그런 분들은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입직원들 일부가 선정이 되어 앞에 나와 엎드렸다. 잠시 후 그들의 엉덩이 위로 쇠같이 단단한 목검이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강인한 훈련을 받은 장교 출신들도 한 대를 맞고 나가떨어져 눈이 허옇게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걸 보는 신입직원들의 눈에 공포가 가득했다. 특수조직은 일반회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강도높은 인내를 요구하고 있었다. 내가 살아왔던 시대는 어디를 막론하고 그런 조직문화 속에서 인내하며 살아야 했다. 바닷가를 찾아온 친구와 나는 강가의 조약돌같이 이제 세상에서 벗어나 웃으면서 과거를 얘기하고 있었다. 상처의 기억도 세월이 덮히면 추억으로 변하나 보다. 요즈음 젊은 세대의 인내는 어떤지 모르겠다. 과거는 일자리도 많고 좋았다고 하면서 지금을 헬조선이라고 하는데 우리세대가 정말 그런 천국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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