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다양한 품질의 인간
법정을 돌아다니다 보면 여러 질의 인간들을 보게 된다.
한 법원의 조정실이었다. 공인중개사가 억울한 표정으로 빌딩주에게 말했다.
“법정 수수료를 달라는데 왜 안주십니까?”
“못 줘요.”
그는 그렇게 간단히 말을 잘라버렸다. 그 말을 듣고 있던 판사가 물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우리한테는 그런 법 없어요. 건물주끼리 알아서 주는 금액이 있어요. 그게 우리 법이예요.”
판사나 공인중개사가 그를 보는 표정이 묘했다. 그는 욕심만 따라 사는 사람 같았다. 생각이 짧고 말도 경망스러웠다. 인간을 물건에 비유한다면 제일 하등품 중의 하등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비행기 일등석에 타고 명품을 가지고 있다고 일등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다른 하등품이 있었다. 어느 겨울 형사 법정이 개정되기 직전 광경이었다. 강추위로 노면이 얼어붙어 재판관계자들이 법원으로 오는 데 시간이 걸려 재판이 지체된다는 안내가 있었다. 교도관이 아니라 관내의 형사들이 유치장에 있는 사람들을 호송해 왔다. 기다리는 시간이 좀 흐르자 사복을 입은 오십대 쯤의 형사 한 사람이 고함을 쳤다.
“도대체 우리 경찰을 어떻게 아는 거야? 우리를 교도관취급하고 있어.”
구치소가 없는 지역은 경찰서 유치장이 그 역할을 했다. 나는 교도관보다 경찰이 한 급 위라고 생각하는 그 형사의 생각이 이상했다. 같은 일을 하는 공무원이었다. 그걸 보면서 기억 하나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부천 쪽의 경찰서 형사 한 사람이 내게 말한 내용이었다. 자기한테 그곳의 종합병원 원장이 절절매니까 자기가 더 높은 것 아니냐고 했다. 그렇게 자기가 찬 완장에 의존해 사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인간 하등품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나의 주관적인 사견이다. 돈과 끝발이 기준인 세상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어느해 겨울 여주 법원에서 재판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얼어붙은 벌판에 곡마단 천막이 쳐져 있었다. 어린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관람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공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허공의 줄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남자가 아래를 내려다 보며 이렇게 말했다.
“날은 춥지만 묘기 만큼은 최선을 다해 보여드리겠습니다. 민속놀이로 우리에게 전해진 이 줄타기 재주는 지금 저를 비롯한 몇 사람만이 전수 받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박수 좀 쳐 주세요.”
나는 그를 보면서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진정으로 박수를 쳐 주었다. 그게 어떤 것이든 자기의 기술에 프라이드를 가지고 현실에 만족하고 사는 사람은 상등품의 인간이 아닐까. 그런 사람을 또 본 적이 있다. 내가 평생 들고 다니던 낡은 서류가방의 손잡이가 끊어진 적이 있었다. 동경의 백화점에서 산 고급제품이었다. 망설이다가 동네 길 모퉁이 작은 박스안에서 구두와 가방을 고치는 장애인 아저씨에게 나의 가방을 맡겼다.
“내가 가방을 고치는 기술은 세계 최고니까 기다려 보세요.”
며칠 후 가방은 완벽하게 고쳐져 있었다. 물건으로 치면 그는 고품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 자기가 선 자리에서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그 사회와 국가를 지탱하고 품격을 갖추게 하는 것이 아닐까.
정치선동꾼들이 세상에 먼지를 날리고 장사꾼들의 광고가 요란하다. 인간이나 사회나 정치나 빵만으로 사는 건 아닌 것 같다. 그 시대를 정화시키는 철학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둠 속 작은 빛이 되어 그걸 담당하는 사람들을 나는 특품으로 여긴다. 예전에 한 노성직자에게 그의 삶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그는 신중히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나이 칠십을 먹은 지금까지 신학공부를 해 왔어요. 이제와서야 어렴풋이 공부가 뭔지 알 것 같아요. 굳이 표현하자면 그래도 약간의 지혜를 느꼈다고나 할까. 요새 와서는 이런 상태가 조금이라도 오래 갔으면 하고 소망해 봅니다. 알지 못하고 십년을 사는 것보다 느끼면서 하루를 사는 게 더 좋은 거라고 생각하니까. 젊어서는 미망과 유혹에 수시로 들끓던 마음이 이제 와서야 맑은 물처럼 잔잔해 지는 걸 느껴요. 정말 이런 상태가 계속 됐으면 좋겠어요. 그렇지만 언제라도 데려가시면 할 수 없는 거지. 밤 늦게까지 공부하다가 불러가시면 내일 아침에는 그곳에서 하나님한테 직접 배우고 공부하면 되는 거 아닐까?”
가을의 맑은 계곡물 같은 느낌을 받았다. 법정스님은 그의 수필집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깨어있는 사람만이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끝없는 탈출을 시도한다. 보람된 인생이란 무엇인가? 욕구를 충족시키는 생활이 아니라 의미를 채우는 삶이어야 한다. 의미를 채우지 않으면 삶은 빈 껍질이다.’
살아 있음에 크게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이 목전에 닥친다 해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으며 그것을 천명이라고 여기며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덕과 정을 지니고 지혜롭게 사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특품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인간의 품질도 참 다양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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