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 풀꽃시인은 장미가 부러울까
나이가 드니까 시간이 느슨해졌다. 유튜브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작달막한 체구의 노인인 나태주 시인이 몇 사람을 앞에 놓고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 이런 말이 귀에 들어왔다.
“나와 같은 나이인 소설가 최인호씨가 열아홉살 때 신춘문예로 등단했어요. 시골에 살던 나는 그가 너무 부러웠어요. 최인호씨는 인기작가로 대단했죠. 그분이 몇 년 전에 죽었어요. 나는 더 오래 살면서 아직도 시를 쓰고 있어요.”
그 짧은 말이 많은 걸 함축하고 있었다. 죽은 최인호씨가 여름날의 화려한 장미꽃이라면 나태주 시인은 그의 시처럼 풀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최인호씨는 변호사의 아들로 명문고에 명문대를 나와 최고의 유명세를 누린 문단의 스타였다. 나태주 시인은 소작농의 아들로 초등학교 선생으로 일하면서 시를 쓰다가 뒤늦게 시인으로 빛을 보게 된 것 같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나도 빨리 고시에 합격해서 출세하고 싶었다. 잘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고교동기 한 사람은 서울법대 재학중 고시에 합격하고 검사가 됐다. 그는 거대한 사다리를 타고 하늘에 오르듯 검사장이 되고 대법관이 되고 총리로까지 지명됐다. 국회의원에 당선됐더라면 지금쯤 대통령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를 보면서 같은 꿈을 가졌어도 인생은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격차가 크니까 부러움을 넘어섰다. 그가 대검 중수부장을 할 때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내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당구를 좋아하는데 신문이나 방송에 얼굴이 팔려서 함부로 다닐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하루는 마스크와 안경을 쓰고 변두리 당구장에 가서 공을 쳤어. 그런데 옆에서 한 사람이 나보고 대검 중수부장을 닮았다는 거야. 아니라고 잡아뗐지. 그래도 힐끗힐끗 계속 쳐다 보더라구.”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유명해질수록 자유와 즐거움을 빼앗기는 것 같았다.
그가 대법관일 때였다. 고교동기 네 명이 모여 밥을 먹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우연히 내가 끼었다. 대법관 생활을 하면서 그의 말투가 점잖아진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듣던 한 친구가 갑자기 버럭 소리쳤다.
“야 이 씨발놈아. 우리끼리 꼭 그런 투로 말해야겠냐? 너만 높냐? 나도 내 분야에서 너 정도 된다. 우리 그러지 말자. 어릴 적 친구끼리 밥 먹는 자리 아니냐?”
대법관인 그가 잠시 침묵하더니 이렇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건방지게 살다 보니까 여기서도 그 버릇이 나오는 것 같다.”
우리가 살던 세상은 자기 앞에 놓인 사다리를 얼마나 빨리 더 높이 올라가느냐의 극한 경쟁이었다.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지하 식당가에서도 작은 음식점까지도 하루 몇 그릇을 팔았느냐로 경쟁하면서 남의 장사를 방해하고 미워하는 걸 보기도 했다. 그런 세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나도 사다리 꼭대기로 올라가고 싶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의 온갖 계획과 시도를 깨뜨려 버렸다. 인생의 배역도 남들에게는 주인공을 주고 박수갈채를 받게 하면서 나는 단역조차도 주지 않은 것 같다. 남들의 박수는 커녕 적들만 떼로 보내는 것 같았다. 그분의 지팡이에 두들겨 맞고 나는 사다리에서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바닥에 누운 채 지나온 삶의 궤적을 더듬어 보았다. 높은 자리와 많은 돈을 얻을 수 있는 곳에 놓여진 사다리가 전부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얼마나 높이 올라가느냐가 아니라 어디다 사다리를 놓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사다리를 놓을 곳이 다양하다는 걸 발견했다. 인생은 어느 시기건 그에 알맞는 그때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충분히 느끼며 살았다면 그런대로 가치 있는 인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범한 무명의 길을 택했다. 그 길은 각자 자기의 귀에 들려오는 자기의 음악대로 자기의 박자대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세상을 보는 시각이 바뀌는 것이 구원이고 즐거운 인생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태주 시인은 시골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그는 시의 세계에 사다리를 놓고 한칸 한칸 끝까지 올라왔다. 작고 향기로운 풀꽃인 그가 한여름 향기를 뿜어내면서 화려하게 피었다 진 장미보다 더 오래 가을 들판을 지키고 있다. 그는 장미가 부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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