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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 재미있게 견디기

Joyfule 2024. 7. 17. 10:52



엄상익 변호사 - 재미있게 견디기

 


변호사를 하면서 십 년쯤 지났을 때였다. 일에 싫증이 났다.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징징거리는 의뢰인의 얘기를 참고 들어야 했다. 그게 아니면 어둠침침한 감옥구석의 작은 유리박스 안에서 범죄자들의 말을 들어야 했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토해내는 황당한 내용들도 많았다. 그런 말들을 계속 듣고 있으면 속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숨이 막혔다. 한밤중에도 전화공세를 받았다. 자기만 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같이 울부짖었다. 내가 그들과 동반자살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 때도 있었다. 법정도 지옥의 축소판이었다. 거짓과 허위가 공기 중에 꽉 차 있고 증오와 증오가 파란 불을 튕겨내며 맞부딪쳤다. 변론을 하다보면 배우가 연기하듯 감정이입이 되어 녹초가 되곤 했다. 연민 피로 때문에 죽을 것 같은 때도 많았다. ​

그 무렵 내가 아는 판사가 변호사 개업을 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인간으로 특품이었다. 마음은 따뜻했고 판단은 현명했다. 사건과 인간의 본질을 법이라는 스크린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그가 쓰는 판결문은 한편의 명수필이었다. 그는 변호사를 어떻게 할까 궁금했다. 그를 만나서 물어보았다.​

“판사를 할 때는 기록을 읽는 게 일이었는데 변호사는 사람을 읽으면서 사건과 관련된 상황과 의미를 추출해 다이나믹하게 글로 만드는 역할인 것 같아요. 생생하게 살아있는 장면을 변론서란 지면 안에 넣는거죠. 변호사는 작가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법에 대한 전문지식은 기본전제고 말이죠.”​

“그러면 법정에서 변론이라는 행위는 어떻게 합니까?”​

법정 드라마를 보면 변호사는 최고의 연기자였다. 그러나 현실법정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 전혀 달랐다. 침체되고 고여있는 것 같은 나른한 분위기라고 할까. 그가 말을 계속했다.​

“내가 재판장을 할 때 보면 변호사들이 두서없는 말을 변론이라고 끝도 없이 길게 늘어뜨리는 경우가 많았죠. 인내를 가지고 참았는데 힘들었죠. 어떤 변호사들은 아예 변론을 안 하거나 정상참작을 바란다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말을 앵무새같이 반복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변호사가 된 나는 법정의 구두변론을 위해 내가 쓴 긴 변론서와는 별도로 그 요지를 다시 압축해서 삼분스피치용으로 만들어요. 재판 전날 내 방에서 그 원고를 가지고 연습을 하고 갑니다.”​

능력있는 법관이었던 그는 유능한 변호사로 변신한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법정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됐다.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 셋트장은 각목과 베니어로 엉성하게 만든 가짜지만 법정은 나에게 주어진 진짜 무대였다. 배우들을 만난 적이 있다. 단 한마디 대사에 그들은 감사하고 있었다. 변호사인 나는 실제무대에서 주인공급이었다. 변호사의 관점을 소설의 전지적 시점으로 바꾸어 사건을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법정의 공중에서 재판광경을 관찰하는 또 다른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다.​

관찰자인 그 존재의 입장에서 방청석풍경까지 리얼하게 묘사하면 그건 하나의 실화 소설이 되는 게 아닐까. 나는 변호사의 심리묘사까지 할 수 있다. 내 마음을 그대로 그리면 되니까. 나는 작가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동시에 내가 신청한 증인들에 대해서는 연출자이기도 했다. 시각을 바꾸어 보니 변호사란 엄청나게 재미있게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객관적으로 보고 채찍질하는 기능도 있었다. 내가 한 행동이나 말들을 그대로 적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글을 쓸 때 ‘아차’하고 후회하는 순간도 많았다. 그 후 나는 한장면 한장면의 촬영에 목숨거는 감독이나 배우처럼 재판의 순간순간에 보다 집중하게 됐다. 지루한 일을 재미있게 견디는 데 성공한 셈이라고 할까. 덕분에 소설도 여러 권 만들어지고 나의 글이 방송드라마가 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으면 무료하고 세상이 무채색으로 느껴질 수 있다. 자기만 힘들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시각을 바꾸고 마음을 달리하니까 세상도 달라졌다. 우리는 각자 주어진 인생 무대의 배우가 아닐까.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재미있게 견딜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