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그러나...
김요한 선교사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1-24)
전에는 믿음을 가졌다 해도 죽는다는 것은 생각하기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
말로는 죽으면 영원한 천국에 간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죽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 바른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세상이 싫고 사람이 싫어져서 주님께 가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먼저 제 자신의 육체의 중력에서 벗어나고 싶고
그 다음엔 거짓되고 더러운 세상에서 아옹다옹하는 것이 싫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젠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제가 죽을 순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죽는데 무슨 차례가 필요하겠습니까만 그래도 어머니가 아직 생존하시고,
가족이나 여러 사람들의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이
죽음 운운할 때는 아닌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듭니다.
주님과 죽고 주님과 다시 살아 한 형제가 된 이 사람이
세상을 떠나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 제겐 정말 좋겠지요.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바울도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니
자신의 몸으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기본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빌 1:20)
바울은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와 한 묶음, 한 운명, 한 본향, 한 집 식구가 되었으니
그 까짓것 미련 없이 툭툭 털고 떠나는 것이 훨씬 좋을 것입니다.
굶어야 하고, 감옥살이에다 얻어 터져야 하고, 매일 이단시비와 같은 민족으로 부터
끊임없이 배신자라는 비난과 위협을 당해야 하는 것 보다는 얼마나 멋진 욕망이겠습니까?
그러나 바울 한 사람에게 투자한 하나님의 은사는 온 세계를 가득 채울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덩어리인 그가 죄수가 된 바울을 싣고 가는
로마의 수송선은 전 세계를 싣고 가는 배였습니다.
그는 아직 살아있을 이유가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받은 자들의
진보와 기쁨과 자랑을 충만하게 해야 할 두 번째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와 같습니다. 세상 살기가 힘드시지요? 고달프지요?
그렇지만 우린 아직 이 땅에 남아 있을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우리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구원의 여지가 남아 있고,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섬겨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안에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니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망해 봐야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고스란히 남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그 분을 열심히 드러냅시다.
그리고 뜨겁게 사랑하고 축복합시다.
언젠가는 주께서 '종아 수고했다. 내가 너의 눈물과 피 땀을 보았다.
이제 가자 영원히 나와 함께 쉬자' 하실 때가 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