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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휘(李聖徽) 공산당에 저항, 신학교 사수를 위해 순교

Joyfule 2009. 3. 17. 01:12

이성휘(李聖徽) 공산당에 저항, 신학교 사수를 위해 순교

1889-1950 순교자 평양장로회 신학교 교수
평북 철산 출생

1. 교육자로 신앙투쟁,해방후에도 교역자 양성 진력

이성휘 목사는 산 높고 물 깊으며 인심좋은 고장 평북 철산에서 이씨 가문의 귀한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겨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다시 숭실전문학교에서 고등교육을 이수하고 졸업을 하자 곧 미국으로 건너가서 샌프란스코 신학교를 거쳐 명문 프린스턴신학교를 수료하고 여기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에 헨노이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28년에 귀국하였다.

귀국한 이성휘묵사는 평양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받고 서문밖교회에 부임하며 목회 성역에 몸바쳐 봉직하면서 뜨거운 민족적 신앙을 교인들에게 강조하는 한편 이번에는 그의 모교였던 숭실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교수하다가 마침내 평양장로회 신학교 교수로 취임하기에 이른다.이리하여 교육자로서 교육에 많은 공을 끼친다. 이와같이 일제와 투쟁을 계속하면서 드디어 8.15 해방을 맞는다.

해방의 종소리가 울려퍼지던 날 1945년 8월 15일 삼천만 이 민족 모두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사하였다. 조국 광복의 기쁨을 한아름씩 안고 사람들은 교회로 교회로 구름떼처럼 몰려 들었다. 이에 따라 교회는 급속도로 우후죽순처럼 힘있게 뻗어 나가면서 성장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성장해나가는 교회에 필요한 수급책은 교역자 양성이었다.

그동안 평양에 있는 평양장로회신학교는 1938년 단말마적인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백절불굴의 신절을 지키겠다는 결의로 마침내 자신 폐교로 문을 닫은지 7,8년이었다. 이제는 일어나 먼저 서둘러 신학교의 문을 다시 열어야만했다. 해방되던 그 해 11월 14일부터 평북 선천에서 모였던 목사 수양회에서 조국의 해방을 감사하는 심령부흥회가 막을 내리자 북한 땅의 전 교회가 뭉쳐서 이북 5도연합노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때 이 연합노회가 몇 가지 중요 안건을 토의한 끝에 교역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육을 재개할 것을 결의하고 교장으로 김인준 목사를 선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 들어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현직에 임하였으나 올 것이 와도 너무 일찌기 왔다.

2. 공산당에 저항, 신학교 사수를 위해 노력

공산당 정권은 신학교를 저희 수중에 넣기 위하여 소위 북조 선인민위원회 교육성에 등록을 성화같이 독촉하였다. 그러나 교장은 "신학교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등록되어 있으니 지상 나라에 등록할 필요가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렇게 가만히 있을 공산당들도 아니었다. 공산정권 당국은 전직 목사 강양욱을 시켜 교계 일부 인사들을 포섭하여 교회 안에 내분을 일으켜 파괴공작을 펴기로 계획하였고 그래서 그 기관으로 기독교연맹이라는 것을 출현시켰다.

이에 공산당들은 신학교 교장을 비롯한 교수들과 교역자 또는 신학생들까지 더구나 평신도들도 가입을 강요하는 공작을 대대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교장은, 기독교연맹에 가입을 거부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었고, 교수는 물론 학생들까지도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김인준 교장은 1947년 1월 17일 소련군 사령부 특무대에 연행되어 간 후로 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신학교 건물도 압류되고 말았다. 이러한 때에 저들 못지 않게 교회들이나 이성휘 목사 같은 이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한국 선교의 원훈인 마포삼열 목사의 은공을 기리기 위하여 평양의 경창리에 한 건물이 있었는데 이것이 마포기념관이었다. 이곳으로 교사를 옮기고 이 못사는 교장이 직임을 수행하여 갔다. 그러나, 이 건물마저 사용할 수 없다고 하여 하는 수 없이 자신이 다시 부임하여 시무하던 서문밖교회로 교사를 옮겨 여기서 교육하였다.

이와 같이 교사를 압수한 공산당들은 그 소름끼치고 끔찍한 6.25를 계획한 전쟁준비기관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1950년 1월에 공산당은 북한 민주사상 중심체인 평양장로회신학교와 감리교의 성화신학교를 강제 폐합, 어용기관인 기독교도연맹 산하 신학교인 소위 '기독교 신하교'란 학교로 변조시켰다.

3. 공산군에게 반동분자로 몰려 끝내 순교.

이런 파국에 이서휘 목사는 경건회 시간만 되면 2층 본당 예배실에 올라가 울음을 터뜨리며 조국의 통일 위하여,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투옥된 종들의 자유을 위하여,학생들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매달려 울부짖었다. 이때에 이 목사는 늘 시편 24편의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라.영광의 임금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임금이 뉘시냐? 건장하고 용맹스러운 여호와시로다"를 힘차게 암송하곤 했다고 한다. 이는 환난과 핍박의 시기가 지나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영광의 날이 올 것을 의심없이 확신하면서 참고 기다린다는 신앙고백이기도 하였다.

찬송가는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가장 많이 불러서 보지 않아도 다 따라 외면서 눈물과 결심으로 부르곤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공산치하에서 목회자이면서 교수로서 평양장로회 신학교 교장의 중책을 맡아 목숨걸고 봉직하다가 저들 공산당에 반동분자로 몰려 정치 보위부에 연행되었고 유엔군에 의해 6.25동란에허 후퇴하던 저들의 평양 탈환 직전에 우익 인사들의 대학살사건 때 함께 순교당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것을 안 1957년 이 목사의 모교인 미국 샌프란스코신학대학원은 강당에 "이성휘 박사 순교 기념패"를 안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