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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덕(李種德) 교단발전을 위해 노력하다 6.25전쟁때 순교

Joyfule 2009. 3. 24. 00:38

이종덕(李種德) 교단발전을 위해 노력하다 6.25전쟁때 순교

[1884-1950 침례교 목사 동아기독교 2대 감독
6.25 사변중 공산군에게 피살, 충남 공주에서 출생]

1. 펜윅을 만남

이종덕목사는 1884년 6월 15일 충청남도 공주군 탄천면 신영리에서 이세영의 아들로 출생했다. 어린 시절은 7살부터 1904년 13년간을 한학을 공부하였다. 그의 나이 24살 때인 1907년 칠산교회의 장석천에서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1910년의 한창 젊은 나이였지만 이 나라의 현실은 일제의 침략으로 한일합방이 되던 해에 나라잃은 울분에 터지는 듯 아픈 가슴을 안고 담담하고 절망적인 현실의 탈출구를 찾아 방황하다가 우연히 함경도 원산에 가게 되었다. 여기서 이종덕은 선교사 펜윅을 만났다.

펜윅은 1889년 7월에 한국선교사를 자원하여 본국 캐나다를 떠나 9월에야 도착하여 서울을 중심으로 체류하며 10개월간 한국말을 배우고 황해도 소래에서 개인전도를 하다가 1893년 귀국했다. 다시 1896년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원산에 자리를 잡고 토지를 매임 과수원 농사를 하면서 성경공부반을만들어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사역자를 양성해 나갔다.

1901년에는 충남 공주에 있던 엘라딩 기념선교회를 인수하여 자신의 한국순회선교와 병합하고, 자기가 키운 문서순회전도자들을 각처에 파송하여 31개의 개척교회가 생겨나자 교단조직의 필요성에 직면하여 1906년 충남으로 그의 모든 사역자를 소집하고 대회를 열고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했다.일제의 교회간섭으로 교단명칭을 "동아기독교회"라고 변경하였다.

2. 제2대 감목이 됨

이종덕은 이 펜윅에게 6개월간을 직접 성경을 공부했고 전도를 시작했다. 1911년에 정식으로 '동아기독교회' 교사 직분을 받아 전국을 순회하면서 전도하여 교회를 개척설립했다. 1912년에 10월 경북 산점교회에서 개최된 대화회에서 목사로 안수를받았다.

이후 그의 뛰어난 신앙생활과 인품을 인정받고 1914년 12월에 원산에서 펜윅의 후임으로 그를 제2대 감목으로 지명하였다. 그는 한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혼란된 교회를 수습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특히 남 북만주 시베리아 선교에 전력하여 선교사들을 파송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자급자족 전도인으로서 남다른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만주선교에 파송을 받은 그는 남만주지역을 맡아서 선교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같은 어려운 형편속에서도 전도인의 피나는 노력으로 1941년 만주조선 기독교연맹으로 통합되기 전 만주지역의 동아기독교는 6개구역에 1백여 교회가 있었다. 이밖에도 시베리아 몽고지방까지도 선교사들을 파송하였고, 1921년도 간도에 성경학원을 설립하였다. 1924년에 감독직을 사임하고 전국 교회를 순회하며 전도강연회를 개최하였다.

3. 신사참배 결사반대

1937년 이르러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경겅기독교연합회에서는 조선총독부 앞으로 유감의 뜻을 밝히고 그 해 9월에는 일부 전문학교 학생들이 반대시위를 벌였고, 10월에는 선교사들이 기독교 정신에 위배되는 처사라고 주장하였다. 기독교학교에서는 일체거부함으로 숭실전문학교 와 숭의여교 교장은 본국 미국으로 양학교장을 축출당했으며 이러한 사태는 교회에로까지 확산되어 마침내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총회가 신사참배 가결을 하기까지 사태가 진전되었다.이런 여파는 전국 교단에도 같은 운명의 위기를 안겨다 주게 되었어도 총회의 결의마저 불복하고 끝까지 거부한 목사들 중의 한 사람이 이 목사였다. 게다가 월간 출판물 관꼐가 문제가 되어 4개월간의 옥고를 치루었고 출옥 후에는 일제의 감시의 눈을 피하여 1938년 2월에 만주 봉황성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이후 8년간을 남,북만주를 두루 순회하면서 교회를 돌보았다. 여기에서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8.15 해방을 맞았다. 서둘러 귀국하여 그동안 닫혔던 교회의 문을 열고 교회 재건에 앞장서서 진두지휘하였다.

4. 교단발전을 위해 노력하다 6.25를 맞아 순교

1946년에 충남 강경에서 소위 대화회가 소집되었다. 여기에서 그동안에 수차의 준비과정을 통하여 대화회를 총회로 바꾸고, 감목제도를 회중정치제도로 바꾸는 등 종래의 동아기독교의 체제를 대폭 수정하였다. 여기에서 이에 대한 교단적으로 공로가 인정되어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교단을 이끌어 갔다. 그리고 강경에다가 고등성경학원을 개설하기도 하였다.이와 함께 종래의 동아기독교시대에 행해졌던 종교의식이나 신앙교리가 침례회의 것과 유사한 것을 발견하고 미국의 침례회와 제휴하는 일을 활발히 추진하고 동시에 교단적으로 복음찬미가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49년에는 제39회 총회에서 종래의 동아기독교를 대한에서 기독교침례회로 교단명칭을 바꾸었으며,이로써 명실공히 침례교회의 체제로 탈바꿈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교단 총회가 강경에 있었음으로 강경을 중심으로 교단의 총회사무실을 지키면서 미국남침례회와 연결을 맺어 1950년에는 선교사 애버나티 등의 지도자들과 함께 애버나티를 맞아 교단발전에 대대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나갔다. 그러나 애버나티 선교사는 부임한지 불과 4개월만에 6.25사변을 당하게 되었다. 애버나티 선교사는 강경에 공산군이 도착하기 전에 가족을 데리고 필리핀으로 피난길에 오르고 다른 동역자 목사들도 서둘러 피난길에 오르자 이 목사의 마음도 흔들리지 않을수 없었다. 게다가 피신을 강권하는 사람들이 있고 보면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이목사는 '주여! 종이 이 수난에 맞서 산하 교회와 교단의 책임을 맞기셨아오니 죽음으로써 이를 지키며 직분을 감당할 용기도 믿음도 주소서!"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끝내 총회를 지켜 나갔다. 공산군은 밀려와도 온갖 고난은 시작되었다. 그러던 몇 날이 지나 9월 28일 서울 수복의 기쁨의 소식을 접하면서 공산군들에게 끌려가 금강 강변 백사장에 붉은 피를 쏟으면서 총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