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
논설위원
논설위원
도쿄 니혼바시(日本橋)의 도레이 본사. 1~20층은 빌딩 주인인 미쓰이(三井)부동산이 차지하고 있다. 도레이는 21층부터 본사 건물로 빌려 쓴다. 86년 역사의 알짜기업 도레이는 단 한 번도 본사에 돈을 들인 적이 없다. 사이토 노리히코(齊藤典彦) 전무는 “우리는 사람과 미래에 투자한다”며 “본사는 영원히 임대빌딩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 도레이의 유별난 전통은 결코 종업원을 자르지 않는다는 것. 2차대전 패전이나 오일쇼크 때도 함께 참고 견뎠다. 새로운 사업을 끊임없이 창출해 그룹 전체의 고용을 유지한 것이다.
유난히 계열사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도레이그룹은 직원 3만8700여 명에 계열사가 226개나 된다. 외국계 컨설팅회사는 “비(非)수익 계열사를 정리하라”고 했지만, 도레이는 “직원은 버리는 대상이 아니다”며 선을 그었다. 대신 여유인력은 알뜰하게 재활용한다. 예를 들어 아크릴섬유가 한물가면 그 직원을 새로 깐 첨단 필름수지 라인에 전환배치하는 식이다.
이렇게 깐깐한 옹고집의 도레이가 요즘 4800억원을 쏟아 경북 구미에 탄소섬유 공장을 짓고 있다. 탄소섬유는 도레이가 단 한 번도 해외에서 생산한 적이 없는 비밀병기다. 그럼에도 도레이는 “앞으로 구미를 전 세계 탄소섬유 근거지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전후방 효과까지 감안하면 새 일자리 3만 개와 10조원의 시장이 창출되는 대형 프로젝트다. 왜 도레이가 구미에 눈독을 들였을까. 사이토 전무는 “탄소섬유는 미사일과 전투기에도 들어가는 전략물자”라며 “사회주의 중국과 달리 한국은 ‘화이트 국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진짜 비밀은 따로 있다. 바로 전기다. 탄소섬유 전문가인 효성의 장재영 차장은 “탄소섬유를 생산하는 데는 엄청난 전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일본의 3분의 1, 중국과 엇비슷한 수준이다. 도레이가 일본 대지진 직후인 지난해 6월부터 구미에 집중 투자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일본 원전이 멈추면서 ‘전력 사용 제한령’이 떨어지고, 값비싼 LNG 발전으로 전기료 부담을 느낀 시점이다. 발전용 LNG 수입은 일본의 무역수지까지 적자로 돌려세웠을 정도다. 도레이는 한마디로 우리의 뛰어난 전력환경에 눈을 돌린 것이다.
최근 민주통합당이 한·미FTA 폐기에 이어, 이미 계획된 원전건설마저 중단하기로 공약할 모양이다. 솔직히 야당의 원전에 대한 생각을 종잡기 힘들다. 현재 추진되는 원전은 2006년 노무현 정부가 ‘3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 입안한 것이다. UAE 원전수주 때는 어땠는가. 민주당은 “노무현 정부 10년간의 결실”이라며 “이명박 정부는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라 물타기 하지 않았는가. 지난해 일본 원전 사고를 빌미로 민주당은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드디어 총선을 앞두고 원전 폐기를 압박하는 진보진영과 손잡으려 입장을 뒤집은 것은 아닌가.
앞으로 5년은 우리에게 천금(千金) 같은 기회다. 도레이뿐이 아니다. 대지진 이후 우리 남해안으로 공장을 옮기려는 일본 기업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KOTRA와 접촉한 경우만 100개 업체가 넘는다. 항만·도로 등 탄탄한 인프라에다, 무엇보다 안정적인 전력환경에 큰 관심을 보인다고 한다. 야당은 집권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자랑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택도 신중해야 한다. 계획된 원전을 차질 없이 추진해 일본의 첨단기술을 유치하고 수십만 명의 먹거리를 창출할지, 아니면 눈앞의 표 때문에 원전 공포감을 펌프질할지…. 표밭갈이에 아무리 바쁘더라도, 야당도 한번쯤 일본 도레이를 돌아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