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성을 위한 ━━/역사와인물

이승만(李 承 晩)

Joyfule 2012. 6. 26. 12:32

 

이승만(李 承 晩)

 

대통령이 되기 이전의 생애

초기 생애와 교육활동

출생과 가계 (1875 ~ 1877)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陵內洞)에서 조선의 왕족이며 몰락한 양반 가문인 이경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2] 초명은 승룡(承龍), 는 우남(雩南)이다.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년 ~ 1912년),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 1833년 ~ 1896년)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나,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고 사실상의 6대 독자가 되었다. 둘째 아들이 죽자 아버지 경선(敬善)은 격분한 나머지 역귀한테 올리는 터줏대감 상을 몽둥이로 부수고, 역귀가 머문다는 사당 앞에서 큰 칼을 휘둘렀다 한다. 그가 석달 동안 몸져 눕자 사람들은 그것이 그런 지각 없는 행동 때문이라 했다.

그는 양녕대군(조선 태종의 장남)의 다섯째 서자 장평도정(長平都正) 이흔(李訢)의 15대손으로, 왕족이었지만 계승권에서 밀려나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이승만은 조선왕조 자체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다 한다.[3] 그는 장평도정의 장남 부림령(富林令) 이순(李順)의 후손이었다.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장평도정의 손자이자 이승만의 13대조인 수주정(樹州正) 이윤인(李允仁)에서 끝이 났고, 이윤인의 손자이자 이승만의 11대조 이원약(李元約)이 병자호란 때에 무공을 세워 전풍군(全豊君)에 추증되었고, 그 후광을 입은 몇몇 자손들이 무관직에 등용되기도 했으나, 이승만의 6대조 할아버지 이징하(李徵夏)가 음직(陰職)으로 현령(縣令)을 지낸 것을 끝으로 벼슬길이 끊기고 어렵게 살아갔다. 그럼에도 그가 조선의 왕실과 같은 성씨라는 이유로 그가 왕정복고를 꿈꿨다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4]

[편집] 유·소년기 (1877 ~ 1894)

이승만의 증조부 이황(李璜)의 대에 한성부에서 황해도로 이주했다가 다시 아버지 이경선의 대에 다시 한성으로 이주하여 그 역시 부모를 따라 이동했다. 1877년 그의 가족은 황해도에서 한성으로 이사하여 숭례문 밖 염동, 낙동을 거쳐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으로 이사 다녔고, 우수현에서 성장하였다.[3] 그의 회고에 의하면 '아버지는 한때 부자였지만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 어머니 말로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집에 재산이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부모는 어렵게 얻은 아들에 대한 공부열이 대단하였다. 1879년 퇴직 대신(大臣)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하였고, 1885년부터 1894년 이전까지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으며 양녕대군의 봉사손 이근수가 운영하는 도동서당에 다니면서 수학하였다.[3] 도동서당은 한성부 용산에 있었다. 1887년 13세 때에 아명인 승룡에서 승만(承晩)으로 이름을 고쳤다.

유년시절의 이승만은 집중력이 뛰어났다. 그는 혼자서 몇 시간이고 연을 날리기도 하고, 나비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이나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으며[5]:244 서당 정원에 꽃 심기에 몰두하여 '꽃귀신이 씌였다'는 반갑지 않은 말을 듣기도 하였다고 한다.[5]:244

[편집] 청년기

[편집] 배재학당 재학 (1895 ~ 1897)

1895년 4월 2일에는 아펜젤러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3] 배재학당에 들어간 이승만은 초기에는 '기독교라는 사교집단의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 에 대해 거부감과 두려움을 가졌다. [5]:295 그러다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던 중, 곧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895년 11월 29일 명성황후가 살해당하자 이에 대한 원수를 갚는다는 계획(춘생문 사건)을 세웠다가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 황해도 평산의 누이 집에 3개월간 피신하였다.[3] 그뒤 배재학당에 다시 복귀하였다.

150px-Young_Philip_Jaisohn.jpg
magnify-clip.png
서재필
(이승만에게 사상적 영향을 주었고,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했다.)
140px-%EC%9D%B4%EC%83%81%EC%9E%AC.jpg
magnify-clip.png
이상재
(이상재는 이승만의 정치적, 재정적 후견인이 되었다.)

1896년 귀국한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서양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5]:295 그 후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민중운동시기 즉 1898년 만민공동회 당시 가장 치열하게 앞장선 운동가들 중의 으뜸가는 청년이었으며 활발한 연설가로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을 만나 자주 교류했는데, 그중 서재필은 그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하였다.

1896년 11월 30일 배재학당에서 양홍묵 등과 함께 청년단체인 협성회를 조직하고 미국식 토론회를 통해 개화-구국운동의 방향을 찾기도 하였다. 협성회에서 이후 이승만은 서기, 회장 등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3] 협성회는 나날이 발전했다. 동시에 이승만이 왕정을 타도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협성회의 창립회원이자 동지의 한사람인 이승구이완용의 아들이었다. 이승구의 아버지 이완용은, '자식이 이승만 패거리와 뭉쳐 다니는 것을 걱정'하여 미국 캘리포니아의 무관학교로 유학을 보내[6] 버렸다. 협성회는 계속 발전하였고, 학업과 협성회 활동을 병행면서도 이승만은 1897년 7월 배재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이 있었고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7] 영어 강독에서 신흥우영어 문장을 읽고 한글로 유창하게 번역하자 청중들이 크게 호응했다. 이어 이승만이 영어 연설이 시작되었는데, 발음도 유창하거니와 조선독립을 역설하는 패기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7]

언론·계몽운동 (1897 ~ 1904)

1898년 1월 양홍묵과 함께 한글판 주간신문이자 협성회의 기관지인 《협성회회보》를 간하고 주필을 맡았다.이때 이승만은 한국 최초의 현대시 '고목가(枯木歌)'를 신문에 싣기도 했다. 3월 10일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종로에서 제1차 만민공동회 집회를 개최하자 이승만은 연사로 참가, 가두연설을 통해 인기를 얻고, 대한제국 정부 외부대신에게 항의의사를 전달하는 총대(總代)위원으로 선발되었다.[3] 4월 한국 최초의 일간지인《매일신문》을 창간하고 사장 겸 저술인의 직책을 맡았다. 8월 10일에는 이종일과 함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 편집담당과 논설담당을 겸하였다.[3] 11월 5일 익명의 투서 사건이 발생,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했다는 혐의를 받고 독립협회의 이상재, 남궁억 등 간부급 17인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의 학생과 대중을 동원, 이들을 이끌고 경무청평리원(고등법원) 앞에서 철야 농성을 벌여 독립협회 간부들을 석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3] 11월 26일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를 달래기 위해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하고, 남궁억 등 50여명을 중추원 의관(議官, 종9품)으로 임명할 때 함께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다.[3]

그러나 12월 23일 고종이 만민공동회 해체로 방향을 바꾸자, 그는 미국인 의사 해리 셔먼의 집으로 피신하였다.[3] 이후 그는 협회의 전단지를 베포하다가 전단지 내용 중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쓰인 문구가 문제가 되어 요시찰 대상이 되던 중, 1899년 1월 9일 발생한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904년 8월 9일 석방될 때까지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1899년 1월 17일미국공사로 근무했던 알렌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1월 30일 독립협회의 동지였던 한글학자 주시경을 만나 그로부터 몰래 건네받은 육혈포를 쏘며 동지 2인과 함께 감옥을 탈출했으나, 서상대만 중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이승만은 중간에 붙잡혀 들어왔다.[3] 7월 11일 평리원 재판소에 회부, 당시 재판장으로 지냈던 홍종우에게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한성감옥서에 재수감되었다. 이때 탈옥 동지였던 최정식은 처형당하였다.[3] 본래 성격이 성급하기로 유명했던 이승만은 오랜 감옥생활로 성격이 더 굳어지는 계기가 되었다.[5]:247 그는 옥중 생활에서 성경책을 통해 영어공부를 틈틈이 했으며, 이때부터 이승만은 영어공부에 재미를 느끼면서 심심풀이로 혼자서 한영사전 등 정리하기도 했었다. 그는 한성감옥 생활하면서 동료 죄수들은 물론, 간수들한테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면서 많은 개화인사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옥중 생활 중 그는 민중계몽의식 가치관을 나타내는 저서 '독립정신'을 1904년 6월에 저술했다.[8] 한편 이승만은 옥중에서 어른 죄수와 어린이 죄수를 나뉘어서 글을 가르치고, 기독교 포교 활동을 했다.

독립정신은 총 52편으로 이뤄졌고, 크게 근대역사관과 정치관으로 이뤄진 앞부분과 당시 시대상황을 해석한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당시 독립정신은 대중과 지식인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출간이 되지는 않아 필사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돌려봤다고 한다. 이후 이승만이 도미한 1910년이 되어서야 LA에서 첫 출판본이 나올 수 있었다.

[편집] 옥중 계몽운동 과 석방
160px-MinYeongHwan.jpg
magnify-clip.png
민영환
(그는 이승만을 석방하여 미국에 밀사로 보냈다.)
300px-%EC%9D%B4%EC%8A%B9%EB%A7%8C_%ED%95%9C%EC%84%B1%EA%B0%90%EC%98%A5_%EC%8B%9C%EC%A0%88.jpg
magnify-clip.png
한성감옥에서의 이승만.(맨 왼쪽)[9]

옥중에서 영한사전을 집필했고, 1900년 8월, 한성감옥에서 청·일전쟁의 교훈을 다룬 중국 서적 《중동전기본말》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는 뒤에 다시 1917년미국 하와이에서 《청일전기》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기도 했다.[3]

1904년 7월 8일 이승만은 특별 사면령을 받고 석방되었다. 민영환, 한규설 등이 그의 사면을 위해 노력한 결과, 러일 전쟁이 발생하면서 그는 8월 9일 특사로 감옥을 나올수 있었다.[3] 민영환한규설을 만난 뒤 1904년 10월 15일 남대문의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장직에 취임했으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곧 사임하였다. 이때 그는 고종 황제를 만나보라는 민영환의 요청을 거절했고, 고종이 보낸 궁녀 역시 만나주지 않았다.

1904년 11월 4일에는 독립보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민영환의 의뢰로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일본 고베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 갔다. 그 해 12월 31일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편집] 외교 활동 (1904 ~ 1905)

200px-1905-Syngman_Rhee.jpg
magnify-clip.png
1905년 8월.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만나기 위해 예복을 갖춘 이승만 박사.

1904년 8월 민영환, 한규설 등의 건의로, 예정이 없던 특사조치로 출옥한 이승만은 민영환(閔泳煥)을 만나 그의 밀서를 소지하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1월 도미한다.[10]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고종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여 밀지(密紙)를 써서 궁녀를 비밀리에 그에게 보냈다.[5]:247 그러나 왜 고종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는가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밀지를 들고 온 궁녀를 돌려보냈다. 이승만은 '역대 군주들 가운데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 임금 중의 한 사람'이라며 나라를 망쳐버린 고종과는 아예 상종도 하지 않겠다며 거절하였다.[5]:247

1905년 1월 15일 미국 신문 "워싱턴 포스트" 지와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한국 침략을 폭로하는 인터뷰를 하였다.[3]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교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3] 2월 20일 이승만은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적이 있던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를 찾아가, 그의 주선으로 존 헤이 미국 국무장관과 30분간 면담하였다. 헤이 장관을 설득,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한국의 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헤이 장관의 죽음으로 허사가 되었다.[3] 4월 23일 워싱턴 D.C의 커베넌트 장로교회류이스 햄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3]

1905년 8월 윌리엄 태프트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와 미 의원 워즈워스를 대동하고 아시아 수행길에 하와이호놀룰루를 경유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호놀룰루의 한인 선교부를 책임지던 와드먼 박사를 통해 태프트와 접촉, 그의 추천장을 받아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만났다.[5]:297 어렵게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기는 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10] 9월 10일 대한제국 황실 시종무관장 민영환으로부터 격려 편지와 함께 300달러의 경비를 지원받았다. 그러나 두 달 후에 민영환을사조약에 대한 울분을 못 이겨 자결함으로써 순국한다.[3]

1905년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는 대한제국을 방문, 고종 황제를 예방하게 되는데 한국미국이 한국의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판단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으나 앨리스 루스벨트는 융숭한 대접만 받고 되돌아갔다.[11] 테오도어 루즈벨트는 끝내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미 태프트를 보내 일본총리 가쓰라와 밀약, 뒤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을 알게 된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게 팔아넘겼다고 확신하였고 그 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5]:297 밀사활동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 지성을 위한 ━━ > 역사와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승만(李 承 晩)  (0) 2012.06.28
이승만(李 承 晩)  (0) 2012.06.27
대한민국 1.2.3대 대통령 이승만  (0) 2012.06.25
임진왜란 7년전쟁 (4)   (0) 2012.06.23
임진왜란 7년전쟁 (3)   (0) 2012.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