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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7년전쟁 (4)

Joyfule 2012. 6. 23. 13:18

 

 임진왜란 7년전쟁 (4) 

 

 
전쟁 결과가 3국에 미친 영향

 조선에 끼친 영향

민간인을 포함한 조선 측 사망자는 180,000여 명에서 1백만명으로 추정된다.[22][23] 또한, 66%의 경작지가 파괴되었다.[24]

문화재의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을 위시한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었는데, 역대실록 등 귀중한 사서(史書)를 보관했던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경복궁이 파괴되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광해군이 즉위한 이후에도 한동안 월산대군이 개인 저택으로 사용하던 집을 궁궐로 대신 사용했다.[25]

이외에도 많은 수의 민가, 포도청, 서원 등이 파괴되어 훗날 발발한 한국전쟁과 비견될 정도의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한편 병제(兵制)의 재편과 무기의 개량에 착수하여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를 얻어서 절강무예를 본받아 병술을 개혁하고 훈련도감을 설치, 삼수병(三手兵)을 두어 무예를 조련시켰다. 무기로서는 원래의 무기인 궁시창검·총통·완구·화전 외에 비격진천뢰화차가 발명되었고 조총불랑기를 이용하였다.

또 국민들의 사상 면에서도 많은 변화를 일으켜 애국심과 자아반성 등 여러 방면에서의 개선과 명나라에 대한 사대사상이 더욱 굳어졌으며, 일본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 또 전란 중 명군이 관우(關羽) 숭배사상을 전래하여 민간신앙에 영향을 주었다.

더불어 일본은 전란 중에 조선에 고추와 담배를 전래했다. 이 때부터 한민족은 오늘날의 고춧가루를 이용한 김치를 담가 먹게 되었으며 그 전에는 동치미를 주로 김치로 담갔다.

임진왜란 당시에 왜군의 포로가 된 홍호연의 일본인 후손과 한국인 후손이 400년 만에 경상남도 진주국립박물관에 만났다.[26]

 일본에 끼친 영향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이후에 혼란한 정치상황으로 내분이 발생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반대 세력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았다.

이시다 미쓰나리를 비롯하여 도요토미 정권의 유지를 위해 모인 세력과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으나 역시 도요토미 정권을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 아래로 모인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때문에 이시다 미쓰나리와 그 일파를 서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 일파를 동군이라고 하지만, 일본 국토의 전체로 보아서는 반드시 위치에 따라서 편을 갈랐던 것은 아니다. 두 세력은 세키가하라 전투(1600 년)를 치렀으며, 세키가하라에서 일어난 전투는 단시간에 종결되었으나, 일본 각지에서는 당일 이후에도 계속해서 전투는 존재했다. 서군이 패배했기 때문에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안코쿠지 에케이 등은 도망쳤으나 붙잡혀 참수당했고, 우에스기 가게카쓰, 모리 데루모토 등은 상당수의 영지를 감봉당했다. 시마즈 같이 기존의 영지를 그대로 인정받은 경우도 드물게 존재한다.

일본은 임진왜란으로 조선에서의 문화적 기술ㆍ문물을 약탈하여 문화 발달에 기여했다. 대표적인 것이 도자기 기술로, 일본군은 조선의 도공(도자기 기술자)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도자기 제작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끌려간 조선 도공들은 일본 도자기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에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활자(活字) 기술의 유입으로 일본 활자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도 보였다. 《퇴계집》 등 유학도 전파되어 일본 주자학의 발달에 영향을 끼쳤다.

 명나라에 끼친 영향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을 소모시켰으므로 국가 재정이 문란하게 되었다. 당시 명나라는 만력제가 재위 중이였다. 그는 초반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정을 게을리하고 낭비를 일삼았다. 특히 조선 출병까지 포함된 '만력3정'으로 대표되는 과도한 원정으로 재정은 고갈되어갔으며 자신의 무덤을 건설하기 위해서 만력3정에 소요된 경비보다도 많은 은자 800만냥을 지출하여 세금은 늘어나는데도 명의 재정은 더욱 궁핍해졌다.

그러나 명나라의 쇠망 혹은 멸망이 임진왜란이라는 단일한 사건만이 중대하게 작용하여 일어났다는 해석은 임진왜란의 여파가 일본에는 상대적으로 작게, 타국에는 상대적으로 과장하여 크게 일어났다고 보는 일본중심사관이 뿌리뽑히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패퇴 직후 도요토미 정권이 붕괴했지만, 명나라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50여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대중문화 속에서 그려지는 임진왜란

대한민국의 경우는 여러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임진왜란을 상세히 묘사하는 반면, 일본의 경우 비교적 간단하게 다루었다.

  • MBC 대하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의 임진왜란 편에서는 일본군이 조선에 침략하여 약탈과 학살을 벌이는 장면, 대규모 해전 등 조선군과 일본군의 전면전이 묘사되었다. 《조선왕조오백년》〈임진왜란〉 편은 1991년 10월부터 일본 NHK를 통해 방영되었다.[27]
  •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임진왜란은 일본의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전쟁과 외교가 병행된 전쟁으로 묘사되었다.
  • 영화 《천군》에서는 이순신의 활약 보다는 인간적 내면을 더 비중있게 다루었다.

일본에서는 자신들의 영토에서 일어났으며 비록 가마쿠라 막부의 약화를 가져왔지만 일단 승리한 전쟁인 원의 일본 원정에 비해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며 비교적 간단하게 다루어진다.

  • NHK의 47부작 드라마 《공명의 갈림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출병을 명령하는 단 한컷만으로 임진왜란을 묘사하였다. 이것은 원작 소설의 영향이다.
  • 일본 대하 역사 소설 32권짜리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단 한페이지만 임진왜란을 묘사하며 그것도 명나라 군대만 언급한다.

 당시 사용된 무기

 조선

화차

 일본

일본에서 생산된 조총

 양국 전함 비교

 조선

서울 전쟁기념관에 있는 거북선 모형

조선의 전함은 바닥 부분이 평평한 전함이며 일본의 전함보다 내구력이 뛰어났다.

판옥선 위에 판자를 덮어 방어체계를 갖춘것 외에는 판옥선과 동일하다. 한때 위인전기 등에서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 하였지만, 철갑선이었다는 기록은 없고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일부에서는 철갑선이 아니였다는 기록도 없다는 의견도 있음.) 거북선은 배의 층수가 분명치 않은데, 현재 2층설, 2층 반(半)설, 3층설이 있다. 적에게 정신적인 위협을 주는 효과가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운용되었다. 거북선은 다른 전함에 비해 고도의 기동성이 요구되었다.

조선의 주력 전함으로, 함선 위에 판자로 만든 집(누각)이 있다고 하여 판옥선이라 불렸다.

정찰과 연락용도로 사용한던 함선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각 수군 항구에서는 판옥선과 협선을 1:1비율로 보유하는 것이 규정사항이었다. 다른 함선에 비해 알려진 바가 적다.

 일본

일본의 전함은 바닥 부분이 뾰쪽하며 배 위에 집 모양의 누각을 세웠다. 대체로 조선의 전함에 비해 크기가 작고 내구력이 약했다.

 주요 인물

굵은 글씨는 전쟁 당시 각국의 군주이며 칼표가 붙은 인물은 전쟁 중 사망한 인물.

조선 (한국)

일본

 명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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