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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 承 晩)

Joyfule 2012. 6. 28. 10:31

 독립 운동과 임시 정부 활동

대한민국 임시 정부 활동

독립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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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16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던 '한인자유대회'.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정한경, 여섯 번째가 서재필, 일곱 번째가 이승만

1919년 2월 1일 발표된 무오 독립선언 선언문에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2월 중순 일본인이 보낸 밀정의 저격을 받았으나 미수에 그쳤다. 국내에는 그가 일본인에게 저격당한 사실이 바로 알려졌다.[20]

3월 1일 미국 현지에서 3·1 만세 운동의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3.1 운동으로 조선인의 독립의지가 세계에 홍보될 것으로 예상했다. 3·1만세 운동 이후, 3월 21일 러시아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대한국민의회(노령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출되었고 이승만은 그 사실을 4월 5일미국 워싱턴에서 통보받았다. 1919년 4월 1일 기호지방에서 설립되려다가 해산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국무총리에 추대되었다. 4월 7일 이승만은 노령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 자격으로 UP통신과 기자회견을 하였다.[3] 1919년 4월에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국무총리(혹은 집정관 총재)로 뽑혔다.

4월 14일 3·1 만세 운동의 열기가 미국에 번져 한인자유대회가 미국 독립기념관이 있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이승만은 이 대회에서 한국이 독립하면 기독교 국가 건설과 미국식 민주제를 시행하겠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미국 최초의 의회 장소로 발길을 옮겨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 앉았던 의자에 앉았고 사진이 남아 있다.[17] 3·1 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만세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였다. 이승만은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다. 3일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그는 연사로 참여하였다.

[편집]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도자 (1919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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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상하이에 도착한 이승만대통령 환영식
(가운데가 대통령 이승만, 오른쪽은 안창호, 왼쪽은 이동휘)

1919년 4월 15일 길림성에서 선포된 고려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추대되었고, 4월 17일 평안북도에서 설립된 신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국방총리로 추대되었다. 4월 19일 인천에서 수립된 조선민국임시정부 로부터는 집정관총재 겸 국무총리에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23일에는 경성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추대했다. 그러자, 이 즈음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워싱턴 D.C.에 집정관 총재 사무실을 열어 재빠르게 대외적으로 대통령 행세를 했다는 의견이 있다.[21] 각지의 임시정부의 총리, 수반으로 추대되자 1919년 4월 이승만의 목에 일본 제국 정부의 명의로 3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

6월 14일부터 6월 27일 그는 '대한공화국' 대통령 이름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국가원수들 과 파리 평화회의 의장 조르쥬 클레망소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을 발송했다. 7월 4일 국ㆍ내외 동포에게 독립을 위한 헌신을 촉구하는 '대통령 선언서'를 발표했다. 7월 17일 워싱턴 디시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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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1월 1일 신년하례회. 두번째 줄 오른쪽에서 일곱 번째가 이승만

8월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사무소를 한국 위원회로 개칭했다. 8월 15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대한독립혈젼기(大韓獨立血戰記)를 발간했고, 8월 16일 대한인국민회가 연 이승만의 집정관 총재 추대 축하식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그의 '프레지던트'(President) 칭호 사용이 상하이에 알려지면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논란이 발생하였고, 논쟁이 격화되자 8월 25일 임시정부내무부 총장 안창호(安昌浩)는 그에게 전보를 발송한다.

임시정부국무총리 제도이고 한성정부집정관 총재 제도이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가 대통령이 아닙니다...(이하 생략)...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세를 하시면 이는 헌법 위반이며, 정부를 통일하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마시오.

- 1919년 8월 25일 안창호의 서신 -

이승만은 안창호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낸다.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 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언급하지 마시오.

- 1919년 8월 26일 이승만의 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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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3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3·1절 1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임정 구미위원부 간부들
(앞줄 가운데가 이승만 박사, 그 오른쪽이 김규식 박사)

1919년 9월 1일에는 김규식과 함께 '독립공채표' 혹은 '대한민국 공채표'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공채표로 거둔 의연금은 상하이에 소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되었다.(원래 이 애국공채는 한국의 건국시에 공채 형식으로 상환하기로 되어있었는데,이승만은 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단체라고 하면서 상환을 거부했다고 한다.) 1919년 9월 11일에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인 국민회, 서울의 한성정부 등이 합쳐저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로 하는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대통령에 선출된 이후 상하이임시정부는 이승만에게 상하이로 와줄 것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명의로 워싱턴에 발송하였다.

8월 이승만은 한국위원회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이 임시정부 공식대표로 운영하고 있던 한국통신부와 주 파리 위원부를 흡수하여 구미위원부로 개편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실망을 느끼고 미국으로 건너온 김규식을 맞이하여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삼았다. 이승만은 김규식에게 하와이멕시코 등지의 한국인 교포들로부터 공채금과 의연금을 징수하는 역할을 부여하였다.[22] 이후 김규식은 1920년 10월 미국을 떠나 상하이로 향했다.[23] 또한, 이승만은 1919년 10월부터 1920년 6월 이승만은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대한공화국'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는 강연, 홍보활동을 하고 다녔다. 한편 이승만은 일본 천황 히로히토조선총독부 앞으로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이는 묵살당하였고 다른 독립운동가들로부터도 조롱당하였다.

1922년 임시정부 제3기 정부 구성에서 이승만은 대통령에 유임되었다.[24] 1924년 11월 23일 대한인동지회에서 종신총재로 추대하였다.[25]

임시 정부 각료들과의 갈등

대통령에 뽑혔지만 이승만은 여전히 미국 하와이워싱턴 등지에서만 거주하고 있어, 상하이에 있는 임정에서는 이승만의 정부 내도를 촉구하는 서한을 여러 차례 보냈다. 1920년 12월에 처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구로 배를 타고 임병직, 이원순 등을 대동하고 미국에서 상하이로 건너왔다. 배삯이 부족하여 중국인 시신 운반선에 밀항하여 고국으로 운반되는 중국인의 시신들 틈에 숨었다가 상하이로 건너오게 되었다.[출처 필요] 상하이로 건너온 그는 자신의 목에 걸린 현상금 30만 달러라는 수배전단지를 발견, 한자를 잘 구사하는 점을 이용, 중국인 복장을 구한 뒤 중국인으로 행세하며 임시정부에 나타났다. 1921년 5월 미국하와이로 건너갔다.

그가 임시정부대통령이 되었던 데는 당시 미국윌슨 대통령이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총장이었다는 점이 작용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외교 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고, 외교활동의 주된 목표는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한 미국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임시정부대통령에 임명되기 전에 당시 임시정부 직제에 없었던 대통령 명함을 사용함으로써 안창호와 대립하였으나, 9월 임시정부 체제를 대통령제로 개정하면서 겨우 봉합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뒤에도 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사회주의를 주장하던 이동휘·여운형·한형권 등과 대립하였다. 1921년 이후에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체류하지 않았다.

임시 정부 대통령 탄핵(1925)

1921년 이승만은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건을 계기로, 임정 내 일부 독립운동가들과 내부 대립,갈등하게 되었다. 신채호는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다"고 말했고 임시 국무총리 이동휘는 "대통령이 위임통치를 건의하는 바람에 정부 대표로 가 있는 김규식 특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위임통치를 요청하려면 뭐 하러 파리까지 왔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니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 위임통치 청원을 철회한다는 성명서를 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위임통치 건은 지나간 일이니 철회할 의사가 없다.'고 답했다.[26]

1925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탄핵 의결로 대통령직에서 면직되었다..[25] 다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탄핵서 전문이다.

주문

  •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시킴. 이승만 탄핵안에 의해 그 위법사실을 조사한 증거를 열거하면 민국 6년 12월 22일부로 전 재무총장 이시영에게 보낸 공문, 동 6년 12월 22일부로 국무원 각위 회람으로서 송부된 임시대통령 공문, 동 6년 7월 3일에 발한 구미위원부 통신부 특별통신, 동 7년 1월 28일에 낸 구미위원부 통신 특별호, 동 7년 2월 13일부로 박은식에게 송부한 서신 등과 같다.
  • 이승만은 외교를 빙자하고 직무지를 떠나 5년 동안 원양일우에 편재해서 난국수습과 대업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허무한 사실을 제조 간포해서 정부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민심을 분산시킨 것은 물론,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수입을 방해하고 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고 공결을 부인하고, 심함에 이르러서는 정부의 행정과 재부를 방해하고, 임시헌법에 의해 의정원의 선거에 의해 취임한 임시대통령으로서 자기의 지위에 불리한 결의라고 해서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고, '한성조직 계통 운운'과 같은 것은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다.
  •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진행을 기하기 어렵다. 국법의 신성을 보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순국 제현이 명복할 수 없는 바이고, 또 살아있는 충용들이 소망하는 바 아니므로 주문과 같이 심판한다.

대한민국 7년 3월 11일 임시대통령 이승만 심판위원회


위원장 나창헌
위원 곽헌, 채원개, 김현구, 최석순

[27]


한편, 임시정부의 외교부장직을 맡았던 조소앙1925년 3월 임시의정원의 이승만 대통령 탄핵,면직 조치에 극력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이듬해 1926년 말까지 하와이에 거주했던 이승만에게 임정 내부의 사정을 내보(內報)하며 이승만의 복권을 시도했었다.[28]

구미외교위원부 활동(1925~1930)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한 이후, 이승만은 구미외교위원부에 활동하며 미국, 유럽, 국제연맹 등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성명서를 보내는 등 각종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 1919년 8월 김규식, 여운홍, 장택상 등의 도래와 임정 파리위원부를 구미위원부로 흡수하여 구미위원부 산하 주불대표부로 활용하였고, 미국과 유럽을 상대로 임정 홍보와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에 지지를 보내줄 것을 호소하였다. 주불대표부를 통해서 이승만은 유럽의 정치정세 변동과 정보를 수시로 입수하였다.

 

구미외교위원부1919년 5월 이승만이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자격으로 설치한 집정관 총재 사무소와 서재필이 운영하고 있던 한국통신부와 주 파리 위원부를 흡수하여 개편하여 만든 것이다. 구미 위원부는 한국의 입장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기여를 했으나 태평양 회의(1921-22) 에 한국 문제를 상정하지 못했고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도 이루지 못하는 등 구체적인 외교상의 성과는 없었다.

 게다가 출범 초부터 이승만의 개인기관으로 활용되어 대한인국민회가 임시정부에 보내는 애국금을 전용하는 문제를 일으켰다. 마침내 임시정부는 1925년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임정의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묵살하였으며 계속 구미위원부를 가동하였다. 일설에는 1928년 재정난으로 해체될 때까지 유지되었다[29]는 설이 있었으나 이승만은 1926년 이승만은 김현구라는 최측근을 기용하여 구미위원부의 살림살이를 맡기기도 했다.[30]

 

김현구는 1926년 이후 1929년까지 임정 구미위원부의 대소사를 총괄했는데, '1926년부터 1929년까지 3년간 워싱턴 구미위원부 위원으로서 위원부의 살림을 꾸려갔던 김현구는 1927년 1월부터 1928년 7월까지 1년 반 기간에 걸쳐 무려 131통의 간찰(편지)을 이승만에게 발송했고, 이승만으로부터 4통의 답변을 접수받았다.[30] 임정의 구미위원부 폐지령에 반발한 이승만은 임정으로 보내는 송금줄을 차단하고, 미국 교포들에게도 임정으로 송금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1929년 이후 이승만은 임정과는 별개로, 독단적으로 임정 구미위원부를 가동하며 외교, 구국활동을 하였다. 그의 구미외교위원부에는 한국인 유학생인 조병옥·허정·장택상 등이 나타나 업무를 보좌하였다. 1928년 4월 10일 이승만은 구미위원부에서 《재만동포옹호》팜플렛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다.[25] 1929년부터 1930년 1월 8일 시사이 이승만은 미국 본토 전역을 방문하고 호놀룰루로 돌아 온 후 "태평양잡지"를 "태평양주보"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발간하기 시작했다.[25]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 대표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안창호, 박용만 등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미국 내의 재미 교포 조직들은 안창호 지지 세력과 이승만 지지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의 분열은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뒷날, 1943년 카이로 회담이 열리자 이승만은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으로 하여끔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병문화시킨 것의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31]

 

1928년 박용만텐진에서 의열단 단원 박인식, 이해명 등에게 암살당하자 이승만은 서재필과 함께 미국내의 언론과 방송 담화를 통해 의열단을 비난하였다. 의열단의 경쟁세력인 임시정부의 김구가 나서서 이승만에게 박용만은 총독부에 매수된 밀정이라는 답신을 보냈으나 이승만은 그럴리 없다면서 비난 철회를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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