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承晩박사는 反民衆的이었나?
양동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정치학)
이 연재물은 건국대통령 李承晩박사를 비판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서 출발한 글이 아니다. 그 논거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면서 李박사의 사상과 정신을 올바르게 인식하는데 그 주된 목적이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일부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한 '李承晩觀'에 대한, '소신있는 의견'을 내놓는다. 더불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를 바로 세우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민중의 뜻에 따라 나라를 일으키자" 李承晩 박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李박사가 "반민중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李박사가 민중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민중의 뜻을 존중하지도 않았으며, 민중의 고통을 무시했다고 주장한다. 李박사에 대한 이러한 비한은 李박사의 사상과 정치적 행로에 비추어 볼 때, 실상과 정반대 되는 것이다.
李박사는 대한제국 말기 개화운동을 전개하던 청년시절부터 민중의 뜻을 존중하고 민중을 사랑하는 노선을 취해왔다. 대한제국 말기 그가 전개한 독립협회 활동 및 만민공동회 운동은 민중의 뜻에 따라 나라를 부흥시키자는 사상에 따른 운동이었다.
李박사는 그러한 정치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었으며, 옥중에서 『독립정신』이라는 저서를 저술했다. 李박사는 그 저서를 오로지 한글로만 썼다. 李박사는 그 책의 서문에서 순 한글로 집필하게 된 이유에 대해 "‥‥전혀 국문으로 기록함은 전국에 수효 많은 인민이 보기 쉽게 만듬이오, 특별히 백성 편을 향하야 많이 의론함은 대한의 장래가 전혀 아래 인민에게 달림이다. 대저 우리 나라에 소위 중등 이상 사람이나 여간한 문자나 안다는 사람은 거의 다 썩고 물이 들어 다시 바랄 것이 없다"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설명은 李박사가 청년시절부터 민중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매우 철저했음을 잘 말해준다.
민중의 뜻을 존중하고, 민중을 사랑하는 李박사의 사상과 행동은 1945년 해방직후 건국운동을 전개하면서, 그리고 건국된 조국의 대통령으로 일하면서도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농민들이 피해 보는 일 없도록 하라" 李박사는 해방직후 독립국가 건설과 관련하여 처음부터 민중의 의사에 따를 것을 주장했다. 그의 반대파들은 정치지도자들이나 정당 및 사회단체들의 협상에 의해 정부를 구성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李박사는 그러한 방식은 민중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이 되지 못하므로 민중의 뜻과 선택에 따라, 곧 민중의 뜻을 존중하기 위해 선거에 의한 정부구성을 주장했던 것인데, 좌익세력을 비롯한 그의 반대세력들은 그것은 남북한의 분단을 추구하는 단독선거를 하자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대한민국 건국 후 대통령이 된 李박사가 국가원수로서 가장 먼저 심혈을 기울인 것은 민생의 안전이었으며, 경작할 농지를 갖지 못한 가난한 농민들에게 농지를 제공하기 위한 농지개력이었다. 李박사는 식량확보와 쌀값 안정을 위해 농림부장관을 제쳐두고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를 하며 노력했으며, 지주출신이 많은 국회가 농지개혁 입법을 지연시키자 국회에 나가 농지개혁법을 조속히 통과시켜줄 것을 호소하고 농지개역법의 통과 지체로 가난한 농민들이 피해보는 일이 없도록 경과조치를 취해줄 것 등을 국회에 요구하며 농지개혁을 매우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농지개혁에 관한 李박사의 적극적인 의지와 노력이 없었더라면 농지개혁은 내용이 크게 약화되고 그 실천도 지지부진했을 것이다.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야지" 李박사는 6.25전쟁으로 피난민들이 많이 생기고 그들이 굶주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를 매우 가슴아프게 생각하여, 그 문제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미리 올바른 대책을 위하지 못한 자신을 부끄럽고 두렵게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피난민으로서 굶주린 사람을 발견하면 대통령비서실로 직접 연락하라고 당부하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李박사가 민중의 고통을 매우 가슴 아파했다는 것은 그가 언젠가 생활고로 일가족이 자살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이거…이승만이가 죽인거야, 정치를 잘못해서…, 내가 죽인거나 다름없지."라고 한탄했다는 에피소드에서도 잘 확인된다.
李박사는 국가를 통치함에 있어서 언제나 특권층보다는 힘없고 가난한 민중의 이익을 우선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한 사실은 그가 1955년에 발표한 담화에서 "우리 민국 정부가 가장 중요히 보는 것은 농민과 노무자들이다. 그 이유는 이 사람들이 제일 수가 많고 이 사람들이 없이는 나라의 토대가 없고, 그 결과로는 이전 군주시대 모양으로 위에 벼슬하는 자와 부자가 나라를 차지하고 대중은 그 사람들의 심부름으로 얻어먹고 살게 될 것이다."라고 말 한데서 잘 확인된다. 바로 그러한 철학에서 李박사는 집권당을 만들면서 그 당을 노동자와 농민의 대표로 조직하고 그 당명도 노농당으로 하려 했었다. 李박사의 그러한 뜻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대로 실천되지 못핶고 집권당의 당명은 자유당으로 되었지만, 李박사의 당초의 뜻이 그러했던 사실만은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한다.
李박사는 민중의 뜻을 존중하고 민중을 사랑하는 사상을 확고하게 가졌지만 말년에 있어서 그의 통치는 그러한 그의 사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노령으로 인해 활동이 약해지면서 인의 장막에 감싸여서 국정의 상황과 민심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장기집권을 국민이 진실로 원하는 줄로 착각하였으며, 국민의 생활상태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李박사는 4월혁명 당시 일단 국민이 자신의 하야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야지"라고 말하면서 대통령직을 떠났다. 이 역시 李박사가 민중의 뜻을 존중하고 민중을 사랑하는 사상을 가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李承晩박사는 비록 말년에도 많은 얘기가 오고가고 있지만, 결코 반민중적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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