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의 역사적 의의 | ||
車相哲 충남대교수 |
2005년은 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한 소위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 100주년과 8·15 해방 60주년, 그리고 정전협정과 한미동맹 성립 52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미수호통상조약(1882)은 1세기 전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야욕을 저지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은 `태프트-카츠라 밀약`(1905)을 통해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했다. 한국 국민은 미국이 한국을 `배신`했다고 비난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대통령을 포함한 고위 관리들과의 회담과 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미국의 `배신행위`를 되풀이해서 상기시켰다.) 그러나 미국은 자신의 국가이익을 위해 한국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신생 독립국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33년이라는 기나긴 망명생활을 통해 약소국의 비애와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승만은 한국이 `反蘇·反共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건국 초기부터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절실히 원했다. 이승만은 분단된 한반도에 이념이 다른 두 개의 적대적인 정권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과 같은 약소국이 확실하게 국가의 생존과 안보를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초강대국인 미국과 법적·도덕적 의무를 지는 `군사동맹`을 맺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승만의 `간절한` 희망을 외면했다. 1951년 5월 트루먼(Harry S. Truman) 행정부는 한국전쟁을 군사적 방법이 아닌 `정치적 해결`로 종식시킨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정치적 해결`은 곧 `휴전`을 의미하는 것이며, `휴전`은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를 의미했다. 치열한 이념 대결의 전장(戰場)인 냉전의 시대에서, 대통령 이승만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의 생존보장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가치`였다. 철저한 `지미`(知美)·`용미`(用美)주의자인 이승만은 심화되어 가는 냉전구도 아래서 한국 국민의 `생존과 운명`은 한국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오로지 미국의 확고한 의지와 정책에 달려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인정했다. 1953년 10월 1일. 이승만은 끈질긴 집념과 반공 포로 석방이라는 `벼랑 끝`전략까지 동원하는 탁월한 대미(對美) 협상 능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에 성공했다. 이승만에게 있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국의 생존과 운명이 걸린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생명줄`과도 같은 것이었다. 방위조약을 매개로 미국은 한국에 대한 북한과 공산주의 세력의 침략위협을 봉쇄함과 동시에 이승만의 북진무력통일 의지도 단념시키는 이중 봉쇄의 효과를 기대했다. 반면에 이승만은 공산주의 위협과 공격을 사전에 봉쇄하는 동시에 그가 줄곧 심각하게 우려해 온 일본의 팽창주의적 야욕도 저지시키는 이중 봉쇄의 효과를 지닌 법적 장치를 확보함으로서 대한민국의 안보가 확실하게 보장되기를 기대했다. 이승만의 기대는 현실로 나타났다. 실제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반도에 전쟁의 재발을 억제하고, 휴전 이후 반세기 동안 `긴장 속의 평화`가 그나마 유지될 수 있게 만든 근본적인 요인으로 작동했다. 그리하여 한국의 생존과 안보를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후일 한국이 빠른 성장을 통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길로 진입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군사적 안보가 정치적 민주주의나 경제적 발전보다 우선되어야만 한다고 굳게 믿었던 정치지도자였다. 외교는 국가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공식·비공식적 행위이며, 외교정책은 그것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이다. 외교정책은 기본적으로 주워진 현실 환경을 철저하고 냉철하게 고려 내지 이용하는 바탕 위에서 실리를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동맹은 협력과 갈등의 상호작용인 국제정치에서 외부의 위협에 대한 공동의 인식에서 성립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상징되는 한미동맹은 세계의 어떤 동맹보다도 성공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부모가 나무를 심으면 자식들이 그늘 덕을 본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 이승만은 한국의 장래를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마침내 그것을 심는데 성공했다. 대한민국 국민은 그 `나무`의 그늘 덕을 아직까지 보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계승한다고 자처한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2003년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러나 한미동맹 반세기를 맞이하는 뜻 깊은 해인 2003년은 한미동맹의 최대의 위기감 속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한미동맹의 공조에 심각한 균열현상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요인은 부시(George W. Bush) 행정부의 대북 강경 정책과 노무현 정부의 대북 유화정책, 그리고 주한미군의 주둔에 따른 한국사회 내부의 반미감정의 확산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매년 3·1절과 광복절은 기념하는 대중 집회가 이념에 따라 두 쪽으로 갈라져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제각기 따로 거행되었다. 보수진열은 `좌익척결`과 `친북·반미 세력`을 규탄하고, 주한미군 철수 반대를 외쳤고, 반면에 진보진영은 `반전(反戰)·반미` 그리고 `민족자주`의 구호아래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다. 해방 직후 한반도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남한에서 벌어졌던 좌·우익의 치열한 이념대결인 `남남(南南) 갈등`이 반세기만에 또다시 등장한 것이다. 급기야 최근에는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를 둘러싸고 양대 진영 사이의 물리적 충돌로까지 번지고 말았다. 이제는 한미동맹은 단순히 동맹구조의 불평등한 요소들을 교정하여, 수평적인 동맹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양국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차원을 넘어, 한국사회 내부의 `남북공조론`내지 `민족공조론`을 주창하는 세력과 치열하게 경쟁해야만 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 놓여있다. 탈냉전시대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한미동맹의 성격과 역할을 재조정할 필요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미동맹 `맹신론`(盲信論)도 문제지만, 더군다나 한미동맹 `무용론`(無用論)은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무지의 소치이다. 한미동맹은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서라도 계속 필요할 뿐만 아니라 더욱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살벌하기 짝이 없는 냉혹한 국제정치에서 주어진 상황과 여건에 따른 `동맹`의 결성과 강화는 국가적 생존과 번영을 확보하기 위한 구속력 있는 법적 장치인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도구이다. 한미동맹의 균열이 심화되면 한국의 안보·외교·국방·정치·경제 등 모든 기반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한미동맹의 `위기`는 곧 대한민국의 `위기` 초래를 의미한다는 냉철한 현실인식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점이다. 아직도 냉전이 계속되고 있는 한반도의 주변국들의 이해관계가 난마(亂麻)처럼 얽혀 있는 오늘의 시대적 상황에서, 한국은 동북아의 `안정자`(stabilizer)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미국을 동맹국으로 계속 선택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최선의 길이다. 한미동맹이 해체를 통한 청산의 길로 나가지 않고, 신뢰회복을 통한 복원의 길로 조속히 들어서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한미동맹의 복원과 강화를 통한 지속적인 `한미공조`는 지금의 시대가 대한민국 국민에게 요구하는, 그리고 강요하는 회피할 수 없는 주문인 것이다. 車相哲(충남대교수, 미국외교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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