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承晩박사는 미국의 앞잡이었나?
양동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정치학)
이 연재물은 건국대통령 李承晩박사를 비판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서 출발한 글이 아니다. 그 논거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면서 李박사의 사상과 정신을 올바르게 인식하는데 그 주된 목적이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일부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한 '李承晩觀'에 대한, '소신있는 의견'을 내놓는다. 더불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를 바로 세우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자 마련됐다.
1) 실제로 정반대 되는 논거 李承晩박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李박사를 "미국의 앞잡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일반 대중에게도 크게 확산되어 '李承晩은 미국의 앞잡이'라는 관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李박사를 미국의 앞잡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밑받침 하는 논거로 ①李박사가 미국에서 독립운동 할 때부터 미국정부의 지원을 받았고 ②고국이 해방된 후 귀국할 때 미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미군용기를 타고 귀국했으며 ③귀국 후 남한지역에 친미 반공정권을 수립하려는 미국의 정책에 따라 정치활동을 전개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李박사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李박사를 "미국의 앞잡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제시하는 이러한 논거들은 모두 실제와는 정반대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그 논거의 타당성 여부를 한 항목씩 검토해보자.
2)독립운동기간 중의 李박사와 미국정부간의 관계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이르러 李박사와 미국정부, 특히 미국의 한반도정책 주관부처인 국무성간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 이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인사정책과 관계가 있다. 루즈벨트는 대통령선거에서 좌익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좌익의 지지에 대한 보답으로 대통령 취임 후 선거에서 자기를 지지한 좌익분자들의 공무원 채용에 관대했으며, 특히 2차 세계대전 후반기에 소련과 연합한 이후 좌익분자들이 연방정부 공무원 및 정부외곽단체 직원으로 채용되는 것에 대해 더욱 관대한 입장을 취했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알저 히스(Alger Hiss) 특별정치국장, 존 카터 빈센트(John Carter Vindent) 극동국장, 핼도어 핸슨(Haldor Hanson), 존 스튜어트 서비스(John Stewart Service), 올리버 에드먼드 클럽(Oliver Edmond Club) 등과 같은 친소.친중공 인사 내지 공산주의자들이 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국무성에 침투해 있었다.주)1 이 사람들이 민족자주의식이 강하고 확고한 반공.반소입장을 취하고 있는 李박사에세 비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을 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일이다.
설상가상으로 미국무성의 한국문제 담당관인 조지 맥큔(George MaCune)은 사상적인 것과는 다른 이유로 李박사에 대해 비우호적이었다. 李박사에 비우호적인 이런 관리들의 작용으로 미국무성은 중국에서 활동중인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얻어내려는 李박사의 청원활동을 묵살했고, 재미동포사회에서 李박사에 도전적인 좌경인사 한길수를 가까이 하고 李박사를 멀리했으며,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국제연합 창립총회에 李박사가 이끄는 우리 민족대표단의 참석을 봉쇄했다. 일본의 항복이 임박했을 때도 미국정부는 그러한 사실을 李박사에게 전혀 통보해 주지 않았다.
3)李박사의 귀국을 은근히 방해한 미국무성 관리들 미국무성은 李박사의 귀국에 대해서마저도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했다. 李박사는 고국이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들은 직후 귀국을 서두르면서 미국무성에 여권발급을 요청했다. 미국무성은 李박사가 귀국할 한반도가 미군의 작전지역이므로 미군당국으로부터 작전지역 여행허가를 받아오라고 李박사에게 요구했다.
미국방성은 李박사의 직업을 '미국주재 한국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 from Korea to the United States)'으로 표기한 작전지역 여행허가서를 준비했다. 미국방성이 李박사의 직업을 그와 같이 표기한 것은 그가 임시정부의 구미위원부 의장이라는 점을 준거로 한 것이었다.
미국무성은 李박사의 그 직함을 트집잡았다. 국무성은 李박사를 '미국주재 한국고등판무관'으로 호칭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하며 李박사가 그러한 직함을 가지게 될 경우 李박사에게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李박사는 국무성에 대해 자기는 아무런 직함도 원하지 않으며 한국에 도착할 때 환영식이 개최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국방성에 대해 고등판무관이라는 직함을 뺀 새로운 작전지역 여행허가서를 발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李박사가 국방성으로부터 발급받은 직함을 삭제한 새로운 작전지역 여행허가서를 가지고 국무성에 여권발급을 요청하자, 국무성은 李박사가 타고 갈 비행기 문제로 시비를 걸었다. 미국무성은 李박사의 귀국여행에 관해 비행기편 마련 등 일체의 지원을 해주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하면서, 李박사가 일본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가려면 남한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태평양지역 연합군사령관 맥아더장군으로부터 일본착륙 허가와 李박사를 군용기 편으로 한국에 데려다 주겠다는 보장각서를 받아 오라고 요구했다.
李박사가 국방성에 그러한 맥아더의 보장각서를 발급받아 달라고 요청하자 국방성은 미국무성으로부터 그에 관한 구체적인 권한위임이 통보되지 않는 한 李박사의 요청을 받아줄 수 없다고 말했다. 李박사가 다시 국무성에 국방성이 요구하는 권한위임을 통보해 달라고 요청하자 국무성은 李박사의 귀국을 위한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회답했다. 말하자면, 李박사의 여행허가 및 항공기 이용문제를 놓고 국무성과 국방성이 핑퐁을 친 것이다.주)2
李박사는 이러한 미국무성의 '장난'으로 인해 고국이 해방된지 40일이 지나서야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李박사는 이러한 미국정부의 냉대를 받으며 8일간의 긴 여행 끝에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서는 다행히 맥아더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으며, 맥아덕 내준 미군용기를 타고 김포비행장에 내릴 때 단 한 명의 수행원도 거느리지 않았었고, 단 한 명의 출영객도 나오지 않았다. 미군정이 李박사의 귀국사실을 비밀에 부쳤기 때문이다.
李박사의 귀국에 대한 미국정부의 이러한 냉대는 김일성의 귀국에 특별 선박과 특별 열차를 동원한 소련의 배려나, 김구선생의 귀국에 대한 중국정부의 온정어린 환송과 극히 대조적이다.
4)李박사를 남한정계에서 퇴출시키려 한 미국 李박사가 귀국하여 남한 정계의 최고 지도자로서 건국운동을 주도하자 미국정부는 李박사를 거세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이러한 미국정부의 노력은 미국정부가 미군정 사령관 하지에게 보낸 전문들에 잘 나타나 있다.
미국무성은 46년 2월 말 李박사를 멀리할 것을 주한미군정 사령관 하지에세 지시하는 전문을 보냈다. 그 전문에는 "그들의 망명경력과 그들이 국민당정부에 의해 지원받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수년간에 걸친 李承晩과 국무성간의 불만족스런 거래의 경험 때문에 우리는 김구와 李承晩의 집단들에 대해 어떤 호의도 보여서는 안될 것이다. 만약 진보적 지도자들의 집단을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면 김구집단이 그러한 강령을 채택하여 실천하도록 강요하기 위한 강력한 노력을 전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주)3 이 전문은 미국정부가 李박사를 김구선생보다 더 경원했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미국무성의 힐드링(John Hilldring) 차관보는 46년 6월 李박사를 정계에서 퇴출시킬 것을 지시하는 각서를 하지에게 보냈다. 그 각서는 "만일 조선의 최근 정치논쟁에서 폭풍의 중심이 되어왔던 어떤 인물들이 정치무대로부터 일시적으로 물러난다면 미소당국간의 합의뿐만 아니라 남한의 여러 정파간의 합의도 크게 용이해질 것이다.‥‥그들은‥‥한국에서의 미국의 정책목적의 달성에 필수적인 존재들이 아니다.‥‥정치무대에서의 그들의 존재는 소련과의 합의에 도달하는데 어려움을 크게 증대시킬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한국에 있어서 미국의 정책목적 달성은 조선정치에 대한 그들의 참여에 의해 도움받기 보다는 전반적으로 방해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라고 전했다.주)4
남한의 정치무대에서 李박사와 김구선생을 퇴출하라는 이런 각서에 따라 미군정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중도파 세력을 미군정의 협조자로 삼고 李박사와 김구선생을 적대시했다. 심지어는 남한정계의 지도자들로 위촉하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관선의원 위촉대상에서 당시 남한의 가장 영향력 있는 두 명의 정치 지도자들인 李박사와 김구선생을 배제했다.
5)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둘러싼 李박사와 미국간의 갈등 대한민국 정부수립 문제와 관련해서도 李박사와 미국은 대립했다. 미국은 모스크바협정에 입각하여 소련과 합의해서 한반도 임시통일정부를 구성하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에 반해 李박사는 소련이 일방적으로 북한에 단독 공산정권을 구성하고 토지개혁 등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조치들을 단행하고 있으며, 공산당이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는 임시통일정부가 아니면 임시통일정부 구성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술책을 취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미국의 정책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李박사는 미국이 흥정을 통해 세계의 다른 지역에 대한 미국의 이익을 관철하는 대가로 한반도에서 소련의 주장에 양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한 판단에 따라 李박사는 남한지역의 국민만이라도 공산당의 지배를 면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남한의 정부를 강화시켜 민족통일에 대비하기 위해 남한지역에서 민족의 자주의지에 의해 민주공화제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李박사가 46년 6월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에 독자적으로 정부를 수립할 것을 천명하자, 미군정은 李박사를 강력히 비판했다. 미군정장관 러취는 "만일 李박사가 남조선에 따로 정부를 세워야 된다고 하였다면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 한 말이고 군정청을 위해서 한 말은 아니다.‥‥나는 군정장관으로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대해서는 전연 반대한다"<서울신문, 1946. 6. 11>는 성명을 발표하여 李박사의 정부수립 구상이 미군정의 정책과 배치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했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주한미군정의 정치고문을 지냈던 굿펠로우 대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李박사의 남한정부 수립 주장을 강력히 비판했다. 그 서한에서 하지는 "그 늙은이가 잘못된 성명들을 많이 내놓았다.‥‥그는 당장 분리된 정부를 수립하여 러시아를 몰아내기를 원한다.‥‥나는 그 늙은 악당을 들보에 묶어놓기 위해 그와 두 차례의 격렬한 회담을 가졌다. 그것은 나에게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천사들과 밤새도록 하는 씨름을 생각나게 했다"고 전했다.주)5
미군정은 李박사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미국 내의 지지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방미 외교활동을 떠날 때는 李박사의 출국을 방해했고, 李박사가 방미 외교활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는 李박사의 정부수립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한 때 李박사를 가택연금하여 李박사와 지지자들의 접촉을 봉쇄하고, 李박사의 모든 우편물을 검열했으며, 李박사에 제공되는 정치자금 루트를 차단하기도 했다.
미국정부는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남한의 독자정부 수립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런 정부수립을 준비하던 시점이 47년 10월에도 李박사의 정부수립 운동을 억제하기 위해 주한미군정 사령관 하지를 보다 단호한 다른 인물로 교체하여 李박사를 제압하려고 시도하기까지 했었다. 미군정은 또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가 성공적으로 끝난 뒤에도 대한민국 건국운동을 지도해온 李박사를 제치고 김규식이나 서재필을 대통령으로 내세우려는 공작을 전개하기도 했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둘러싼 李박사와 미국정부간의 이러한 갈등.대립은 북한에서 공산정권을 수립함에 있어서 소련이 시종이로간 자기의 앞잡이인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우면서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것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6)박해 받으면서 맹종치 않았던 對美태도 지금까지 기술한 내용에 비추어 볼 때, 李박사는 ①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미국정부의 지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무성과 갈등관계에 있었으며, ②고국이 해방된 후 귀국할 때 미국정부의 지원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방해를 받았고, 미국 군용기를 타고 귀국한 것은 미국정부의 지원때문이 아니라 남한이 미국의 작전지역이었기 때문이었으며(김구선생을 비롯한 임정요인들도 미국 군용기 편으로 귀국했다), ③귀국 후 남한지역에 친미반공정권을 수립하려는 미국의 정책에 따라 정치활동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비현실적인 한반도정책에 대항하면서 건국운동을 전개했던 것이 확실하다.
이로써 李박사를 "미국의 앞잡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세 가지 논거가 모두 사실과 반대되는 잘못된 것이라는 점이 확인되었다. 李박사는 미국의 앞잡이가 아니라 오히려 미국정부의 박해를 받아가면서 남한지역만이라도 공산당 지배를 면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한 민족자주의식이 강한 지도자였다. 李承晩박사는 친미적이기는 하지만 미국을 사대주의적으로 받들어 모시는 일은 하지 않았고, 미국의 정책에 맹종하지도 않았다.
그가 친미입장을 취한 것은 세계 최강국이며 자유민주국가인 미국의 지원이 있어야 우리 민족과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생존의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일 뿐, 미국의 앞잡이가 되어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李박사는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나 대한민국 건국 후에나 친미노선을 취하여 미국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미국정부에 굽실거리지 않았으며, 미국의 정책이 우리 민족에 불리한 것일 경우에는 미국과 단호하게 맞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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