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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 - 최자영 (에세이)

Joyfule 2005. 5. 10. 00:49
 
 고향집 - 최자영  
20년만에 고향을 찾았다. 
부모 형제가 모두 떠나 살기 때문에 가까운 거리에 두고도 
좀체 찾지 못했던 고향을 아버님이 돌아가시어 선산에 모시기 위해 찾았으니 
무심한 것은 사람 마음이련가. 
외가 마을인 공주시 이인면 초봉리에 친정 집의 선산이 있고 
그 산에 친정 아버지를 모시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 형제들은 
옛날에 살던 집을 둘러보기로 했다. <공주군 공주읍 중학동 79번지>, 
지금은 공주시가 되었지만 20여년전 고향집 주소다. 
수신인의 이름을 쓰지 않아도, 
주소가 틀려도 곧잘 편지가 들어 올 만치 오래되고 낯익은 집 주소. 
기억을 더듬어 찾아 들어간 고향 동네 쪽지골,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던 초가집, 함석집의 탱자 울도 간 곳 없고 
마당 한 귀퉁이 비집고 앉아 이웃과 잔정을 나누어 먹던 우물만 
두레박도 없는 채 폐수가 되어 아직 묻히지 않고 있어 눈물을 돌게 했다. 
여형제 다섯이 양철 삽작을 밀어내고 들어앉은 철대문을 기웃거리자 
낯선 집주인이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주인에게 옛집이 그리워 지나는 길에 왔노라고 양해를 구하고 
탱자울타리 이었던 뒷담을 돌아가 보았다. 
이웃집에 제사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 탱자 울 너머로 제삿밥이 넘어왔고 
잠이 없던 나는 제삿밥을 먹고 자기 위해 등잔불 밑에서 인두질을 하며 
바느질을 하시는 엄마 머리맡에서 눈을 반짝이며 앉아 있곤 했었지. 
가을이면 노란 탱자가 꽃처럼 열렸고 그 탱자를 따서 먹던 
시큼한 맛을 잊을 길이 없는데 탱자 울은 흔적도 없고 
그 자리엔 불록담이 높이 솟아 훤히 보이던 
앞집 제국이네 안방도 옆집 은주네 건넌방도 넘겨다 볼 틈이 없다. 
새우젓 장수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던 제국이네는 
많은 식구를 감당할 길이 없어 성당의 주선으로 
맏딸은 수녀로, 아들은 신부로 만들어 놓고 술만 취하면 
퍼대고 앉아 울던 제국이 아버지 어머니는 어디로 이사를 하셨을까. 
차가운 시멘트 불록담을 멍청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는데 
"큰언니 이것좀 보세요. 여기 옛날의 우리 집 장독이 있어"하면서 
30대 중반에 들어선 애엄마 답지 않게 호들갑을 떠는 
넷째 동생의 소리침에 놀라 달려간 나는 그만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무 경이롭고 감격스런 일이었다. 
20년전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가면서 
너무 커서 가지고 가지 못한 장독 서너 개가 새 주인의 장독대 한쪽 구석에 
얌전히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거무튀튀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구석에 쳐 박혀 있는 장독을 쓰다듬고 있으려니 
오래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간절해진다. 
얼굴이 하얗고 서구적인 용모에 유난히 정갈하셨던 할머니는 
매일 크고 작은 장독들을 닦으시며 "여자는 손끝이 매워야 쓰느니라"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하셨지. 
명절이나 할아버지 제삿날이면 큰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돌 위에 얹어 놓으시곤 찹쌀 부끼미를 부치시던 할머니의 얼굴에, 
뉘엿뉘엿 지던 저녁 해가 고염나무 가지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 때면 
70노구의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부엌문 박에 있던 커다란 고염나무는 베어진 지 10년이 넘는 듯 
그루터기만 시커멓게 남아있고 안채의 초가 지붕과 바깥채의 함석 지붕이 
모두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할머니는 이른봄이면 넓은 앞마당에 마늘, 상추, 완두콩 고추 등을 심고 
가꾸시는 정성이 또한 여간 아니셨다. 
울타리 밑 화단에는 갖가지 꽃들과 호박 넝쿨이 어울려 달이 밝은 여름밤이면 
마당 한가운데 들 마루를 펴놓고 앉아 별을 노래하고 달을 바라보며 
예쁜 꽃들을 어줍잖은 나의 시편들 사이사이 그려 넣어 문집을 만들던 
문학소녀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아마 뒤늦게나마 시를 쓰게 된 것도 그때의 추억에 연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모깃불 타는 풀 냄새와 어울려 울어주던 벌레 소리, 
현란한 별빛과 차가운 달빛,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 
할머니 천주경 외우시던 낭랑한 목소리, 
탱자 울 사이로 기웃대던 사나사나한 바람소리, 이 모두가 어우러져 있던 
넓은 앞마당엔 한 채의 집이 더 들어서 아주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겉모양은 알아볼 수 없을 만치 변했을지언정 
내 가슴속에 새겨진 고향집은 
언제나 어린 날의 정감 어린 모습으로 환한 문양을 그려놓고 있다. 
앞집 뒷집을 다 둘러보아도 아는 얼굴 하나 남아있지 않지만 
내가 나서 자라고 공부를 마칠 때까지 20여년을 살았던 고향집, 
좀 더 거슬러 올라가 할아버지 대부터 치면 60년이나 되는 고향집은 
너무도 많이 변해 있었지만 고향을 떠나던 때의 모습이 늘 가슴을 촉촉이 적신다 
그러기에 내가 쓰는 글 속엔 고향 이야기가 자주 나오고 
유년 시절의 부모님 그리고 가난까지도 아름답게 표현된다. 
그만큼 고향은 유년의 자산이고 신비의 성이기 때문이다 
인정이 메마른 시대에 살면서 다친 마음으로, 
상처받은 마음으로 찾아갈 수 있는 고향, 
생각하면 못 견디게 옛날이 그립고 
부모 형제가 다시 어우러져 살고 싶은 소망에 절절히 아파 오는 가슴이다 
    고향집 탱자 울 사립 위에 제삿밥 얹혀 오던 인정의 바람소리 어디로 갔나 한을 접어 넣어 생애를 꿰매던 할머니의 허기는 사라졌지만 시대의 아픈 생채기 어루만질 가슴에 촘촘히 단추를 달고 달팽이처럼 웅크리기 시작했지 하늘로 치솟는 자만 물구나무로 서서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세상 한쪽을 흘겨보면서 단단한 인연의 줄을 끊어버린 높은 담장 독한 향기로 몸푸는 장미가 지키고 있다. 텅 빈 가슴을 찌르고 있다. 손톱 밑 가시의 아픔만을 확인하며 바깥 세상엔 곧잘 눈을 감는 이기심이여. 가슴에 매단 자물쇠가 무거움을 알아야 하리 못 견딜 그리움으로 보채다가 못 견딜 미움도 없애버리는 매웁고도 힘찬 피의 진함을. 기억을 잊기 전에 다시 화해하고 물이듯 어우러질 섭섭잖은 우리들의 결별이. 가만히 사랑에 눈떠 진한 아픔으로 차 오르는 사랑이여. 기쁨이여. 졸시 <이웃> 전문
어머니와 같은 고향, 내 감성에 마르지 않는 물줄기를 공급해 주는 수원지이며 어느 때나 가고 싶을 때면 돌아가 유년을 꺼내볼 수 있는 정서의 낙원 내 고향집 탱자 울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