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고, 찾고, 두드려 성령을 받고 싶을 때(고넬료의 예)
성경에는 성령님을 선물로 받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1장 9-13절)
이 말씀은 무릎 꿇고 기도 자체 행위로만 '주시옵소서' 라며 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오해해서 이렇게 기도만 하면 구하는 것인 줄 알고 기도 행위에만 힘쓰는 분들이 매우 많으십니다.
주님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육체적 행동을 보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중심을 살피시기에 마음의 중심으로 간절하게 성령님을 부어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기도행위 자체를 그만두라는 소리는 더더욱 아닙니다.
주님을 구하는 기도를 하더라도 온 마음과 정성과 열정을 다하여 목마르고 갈급한 심정으로 하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을 구하는 것은 기도행위 자체뿐만 아니라,
평소 삶에서도 주님을 구하는 모습이 늘 나타나야 주님을 구하는 그 기도의 진정성이 있습니다.
주님을 구하고자 골방에 들어가 열심히 기도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저 역시 그랬고 제게 상담을 해오면 또 그렇게 하시라고 권면 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그 말에 덧붙이는 말이 항상 있습니다.
기도는 기도대로 간절히 하시면서 삶도 기도와 함께 따라가라고 말씀드립니다.
기도 따로, 삶 따로 엇갈림이 있다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바로 외면하십니다.
그건 마치 바리새인과 같이 입술로만 기도하고 삶은 가증스런 외식적인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고넬료의 경우입니다.
고넬료의 기도가 어떻게 왜 주님께 상달 되었는지 그 이유가 아래 성경 구절에 있습니다.
가이샤라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사도행전 10장 1-2절)
바로 이것입니다. 고넬료와 같이 주님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을 받지 않았어도 주님을 사랑하여 따르고자 하는 마음은 교인들 중에서도 어느 정도 있습니다.
교인들 중 성령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약간씩은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게 성령 받은 증거는 아닙니다.
제가 성령님을 받으면 어떤 삶과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여러 글을 통하여 많이 기록했으니
이 글에서는 구체적인 것은 생략하겠습니다.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사도행전 10장 1-2절)
고넬료는 비록 성령은 받지 않았으나 주님을 사모했고 경건하여 모든 식솔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늘 회개의 기도를 하며 가난하고 헐벗은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며 주님을 구했다고 나옵니다.
그의 기도는 그의 삶과 자세에서 그대로 증명되고 있으며 그 시대 위선적인 모습으로 인해
독사의 새끼라고까지 정죄받은 바리새인과 같지 아니하여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은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유대인도 아니오, 로마 귀족 출신의 백부장입니다.
그런 그가 위의 표현처럼 기도와 의로운 삶을 겸하여 주님을 구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를 향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사도행전 10장 34-35절)
고넬료는 진정으로 하나님과 백성을 사랑했기에 이런 모습이 나온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모습이 주님을 구하는 자라고 인정하여 베드로를 시켜 그에게 가서 하나님에 대하여
대충 알던 그에게 더 정확한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을 설교하고 확신시킨 후 성령을 받게 한 것입니다.
만약, 고넬료가 바리새인처럼 자기 의를 위해 그처럼 했다면 하나님은 바로 외면하셨을 겁니다.
이 시대에도 마귀들은 고넬료와 같은 자세로 주님을 구하는 사람의 이런 모습에
부정적인 시각을 주기 위해 주님을 모르는 자들도 선한 행위를 한다 하고, 천주교도 그렇다 하고,
불교도 선행을 한다 하며, 심지어는 무당들도 선행하는 자가 많다고 물타기 하여
모두 쓸데없는 행위로 몰아 부정적인 시각을 심어주려고 합니다.
이에 설득당해 미혹되면 영원히 성령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본질은 꼭 일거수일투족 고넬료와 똑같이 해야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고넬료처럼 경건함으로 주님을 간절히 사랑하는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가여운 이웃을 외면할 리 없었기에 이웃을 위해 구제하기를 힘쓴 것입니다.
이 시대... 주님을 모르는 이방인이나, 주님을 안다 하며 사랑과 긍휼도 없이
인위적으로 하는 선행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기본적으로 없습니다.
그들의 중심에는 십자가 피 흘림의 애통함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 의로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정말로 경계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함이 먼저고 주님을 사랑했으니 이웃에 대한 선행도 고넬료처럼 그와 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도 한때는... 사도행전의 고넬료 전을 읽으면서 한참을 이해 못 했습니다.
성령 받기 전의 고넬료 모습이 성령 받은 자와 너무 비슷해서 고개가 갸우뚱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나온 흔적을 돌이켜보니 바로 이해되었습니다.
제 자랑이 아닙니다.
이 글에 대하여 이해를 돕고자 제 이야길 하는 겁니다.
저 역시, 주님을 사랑했기에 성령을 한참 구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간절히 성령님을 구하면서
성령을 구하는 자가 어찌 전에 행하던 삶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면서 주님을 구할 수 있겠는가...
이런 마음이 들어섰고 저도 힘든 삶을 살지만 저보다 더 힘든 분들을 향해 불쌍한 마음을 가졌고
또 그게 삶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났음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골방에 들어가 간절히 기도하다가 작심하여 기도원에 들어가 발버둥 치며
성령님을 구했을 때 제가 전에 했던 간증에서 보듯 성령께서 뜨거운 불로 제게 오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기도와 삶이 같지 아니하고 어긋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성령을 달라고 소리쳐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성령을 줬다가는 오히려 마귀에게 이용당함을 아시기에 애초에 그런 사람은 보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구원문제와 성령 주심에 대하여는 칼날과 같이 빈틈이 없기에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매우 냉정하고 가장 융통성이 없는 분이십니다.
즉, 공의에 대해서 철저하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엄청난 문제를 인간처럼 융통성을 발휘했다가는 큰일 납니다.
주님은 너무나도 정확하고 완벽하시기 때문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이란 말씀은 두렵고 떨림이 없으면 이해하지 못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고넬료와 같은 간절한 기도와 거룩한 삶이 일치하여 주님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구하는 것은... 기도만이 아닌 삶으로도 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미 그 삶 속에 주님을 구하는 영성이 나타나기에 주님은 기뻐하시며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집 나간 둘째 아들은 탕자가 되어 자기 의로 되는대로 삶을 살았으나,
모든 것을 잃고, 결국 의지할 이는 아버지(하나님) 외에는 없음을 크게 깨닫고
완전히 깨져 겸손한 자가 되어 결국 주님께로 와서 저를 받아(성령을 달라며)달라며
아버지(하나님)를 감동하게 했고, 아버지는 그를 기쁘게 받아주셔서
주님과 먹고 마시는 거룩한 자로 거듭난 것입니다.
성령이 좋은 건 알지만 깨지고 부서지는 삶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세상 속성대로 살면서 입술로만 성령을 구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하오니 돌아온 탕자처럼 자신을 쳐서 깨지고, 부서지고, 애통하고, 갈급한 심령이 되어 주님을 구하십시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편42:1)
주님은 탕자가 깨져서 돌아왔을 때 기뻐하셨듯 여러분께도 그리하실 것입니다.
하오니 희망을 품으시고 고넬료와, 돌아온 탕자를 모델 삼아서 주님을 구하십시오.
이렇게 구하는 자에게 주님은 외면하실 리 없고,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주님은 더욱 기뻐하시며 성령을 선물로 주심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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