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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TV에 나온 '김현희'의 증언

Joyfule 2012. 6. 20. 22:50

 

 

 

858KAL여객기 폭파범김현희北傀공작원!

 드디어 국내 TV에 나온 김현희!

  "진실을 증언하라고 살려준 것 같다."

 ㅡ 조선TV
           

 
858KAL여객기 폭파범 김현희 北傀 공작원!
 


858KAL여객기 폭파범 김현희 北傀 공작원!
 


858KAL여객기 폭파범 김현희 北傀 공작원!
     

   
  858KAL여객기 폭파범 김현희 北傀 공작원!   

 

 

18일 시사토크 판에서는 1987년 김정일의 지령을 받고 대한항공 858기를 공중폭파한 김현희씨가 출연했다.

그동안 정부의 보호 아래 몇 차례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있지만, TV토크쇼에 출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KAL기 폭파25주년을 맞아 유가족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밝힌 김현희씨는

자신이 북한공작원으로 뽑혀 8년 동안 공작원 교육을 받았던 당시 상황과 교육 내용에 대해 상세히 밝혔다.

(이하 방송 인터뷰 내용)

 

Q. 얼마만의 TV 출연이십니까?
A. 결혼 후 일체 활동 안하다가 15년 만에 국내방송에 처음 출연하게 됐습니다.

 

Q. 97년 안기부 수사관과 결혼하셨죠? 그 후로 어떻게 생활하셨습니까?

A. 결혼하고 사회 정치 모든 걸 떠나서 그냥  조용히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본격적으로 저를 두고 ‘가짜몰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조사가 끝난 사건을 두고 국정원은 저에게 계속 질문을 해오고 MBC 에 출연하라고까지 했습니다.

 

Q. 국정원의 푸쉬(압력)가 있었던 건가요?
A. 거부하는데도 출연을 강요했습니다.

국정원 지휘부가 총 지원해서 MBC 출연을 지원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계속 거부하니 MBC를 시켜서 집을 습격했습니다.

한밤중에 습격해서 집이 노출되었고, 한 밤 중에 한 살, 두 살 된 젖먹이아이들을 업은 채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Q. 당당히 나가서 진실을 말씀하시지 그랬나요?
A. 정부가 ‘가짜몰이’를 작심하고 하는 상황이고 100명이 한 명을 놓고 가짜 만드는데 거기 나가는 것 자체가 저를  바보로 만드는 겁니다. 목적이 그겁니다.


Q. ‘가짜몰이’ 상황에 관련된 이야기는  2부에서 집중적으로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청자들이 김현희씨에 대해 아는 건 ‘아버지가  외교관 출신’인 것과 ‘18세에 북한 공작원으로 길러졌다’는 겁니다. 어떻게 성장하셨나요?


A. 62년에 태어났고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서 어린 시절은 쿠바에서 지냈습니다.

북한에 돌아와서 인민학교 과정을 거친 후 중상층 모범생으로 자랐습니다.

 

Q. 어떻게 공작원이 되셨나요?

A. 중앙당 배지를 단 사람들이 (학교에 와서) 공작원선발을 했습니다.

현지인을 투하해서 공작원으로 키우라는 김정일의 교시가 내렸다고 했습니다.

각 학급에서 한 명씩 학과실로 불러서 면접을 했습니다.
기억력 테스트, 관찰력 테스트, 신체검사 등을 심사했습니다.

‘탄광에 가서 일하라면 하겠냐’는 질문을 했고,

북한에서 배운 것은 충성심이기에 ‘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80년 3월, 대학 2학년 시절 벤츠 승용차를 탄 중앙당 직원이 와서 짐을 싸게 했고

바로 집으로 가서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떠나게됐습니다.


Q. 당시 부모님 반응은 어땠나요?
A. 놀라셨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으니 어디를 가는 건지 묻지도 못하셨습니다.

중앙당이라는 건 북한의 최고 권력기관이기 때문에 부모님은 당연히 어디 가는지 묻지도 못하셨고

선발 되어 뽑혀서 간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어머니는 딸을 언제 만날 수 있을까 눈물을 흘리셨고,

아버지는 착잡하신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당에서 시키는 대로 잘 해라’ 말씀하셨습니다.

 

Q. 내가 공작원이 된다는 걸 언제 느끼셨습니까? 

A. 저를 태우고 산속 초대소에 가서 내렸습니다.
 거기에 새겨져 있는 구호판이 모두 대남사업과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사명을 다해야 겠다는 교시들이 있는 것을  보고

내가 대남공작소에 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Q. 8년 동안의 공작원 교육, 과정이 어떻게 됩니까?

A. 들어가자마자 ‘김옥화’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평양시 근교에 있는 넓은 산 속에서 밀봉교육을 시켰습니다.

두세 명씩 밀봉교육을 시키는데 서로에 대해  물으면 안 되고, 알려고도 하면 안됐습니다.

그게 생활의 원칙이었습니다.

사상적으로 대남 혁명을 배웠고, 남조선 혁명가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사상 교육과 투철한 임무수행을 위한 자결정신을 배웠습니다.

육체적으로는 모래 배낭을 매고 행군을 하고 격술, 수영 등을 배웠고

그 외에도 무전, 통신, 암호를 듣고 푸는 기술적인 면도 배웠습니다
 

Q. KAL기 폭파 임무를 부여받게 된 건 언제입니까?

A. 일본인화 교육 후 중국인화 교육을 시작했는데,

84년에 임무가 생겼다고 김승일(폭파 공범)과 만나게 됐습니다.

김승일은 오래된 공작원이었고 남한에 김승일이 조직한 지하조직이 있을 정도로 노련한 공작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으니 세대교체도 할 겸 김승일과 저를 부녀지간으로 보이게 위장시켰습니다.

내내 훈련만 하다가 임무를 부여받았고 부장(최재성)이 직접 나와서

‘88올림픽을 방해하고, 남조선에 타격을 주기 위해 비행기를 재끼라’는 임무를 주었습니다.


Q. ‘비행기를 재끼라’고 했을 때 기뻤나요?

A. 기쁘다기보다 내가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됐습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인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감정, 인간성이 마비된 상태인거죠.

북한 전체가 다 그렇지만 공작원은 더합니다.

오로지 인간폭탄이 되어 내 몸을 바쳐 수행해야하는 게 공작원입니다.


Q. 친필비준을 받았다는 건?
A. 북 상황은 김정일의 싸인에 의해 움직입니다 대남공작은 김정일 비준에 의해서 합니다.

비준은 싸인이고요. 그 후, 노선과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비엔나에 가서 바그다드와 아부다비를 거쳐 남한에 오는 경로였는데 김승일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담당과장은 ‘이미 비준이 난 거라 어쩔 수 없다’고 했고

아랍 지역은 전쟁 국가라 경비가 삼엄하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됐습니다.


Q. 라디오와 술병으로 위장된 폭탄, 공항 검색대에서 걸렸죠?
A. 바그다드에 검열이 심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도 배터리를 회수한 적이 있고요.

그런데, 그걸 뽑아서 버리더라고요. 아찔했습니다.
그런데, 김승일이 다시 주워서 라디오를  틀어 보이며 항의하자 통과시켜주었습니다.


Q. 왜 중동근로자가 탄 비행기를 골랐습니까?

A. 제가 직접 한 게 아니고 담당 조직원들이 결정 한 겁니다.

그때 남조선 비행기에 외국인이 타지 않은 비행기를 고르려고 했습니다

외국인이 타면 국제적 문제로 번질 수 있기 때문에 그 노선이 적합했습니다
 

Q. 폭탄을 비행기에 두고 내렸을 때의 기분은 어떠셨나요?

A. 남한 사람을 직접 본 것은 KAL기에서가 처음이었습니다.
 많이 떨렸죠. 폭탄을 선반 위에 놓고 내릴 때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Q. 비행기 실종 소식은 어디서 들었나요?
A. 예상 외로 바레인으로 가게 됐습니다.

원래는 로마로 갔다가 비엔나로 가기로 했는데 내리는 순간 공항 분위기가 예상한 것과 달랐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공작을 하려면 사전 루트 연습을 해야 하는데 탁상 연구만 했고 아랍에 대한 정보도 없었습니다.

바레인에 도착해서 호텔도 겨우 찾아갔고 호텔에 묵으며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KAL기 관련 뉴스가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바레인 주재 한국 대사관이 직원이 찾아와서 폭파 임무가 완수됐다는 걸 알았습니다.

 

Q. 대사관 직원이 찾아왔을 때의 느낌은 어땠습니까?
A. 많이 긴장됐고, 의심 받고 추격당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결정적 물증이 없으니 비행기만 타고 떠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Q. 체포 당시의 상황은 어땠나요? 

A. 공항 여권 심사대를 지나는데 일본 대사관 직원이 저희 여권을 보더니 회수했습니다.

마유미 여권이 위조 되어서 이 상태로는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때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김승일 할아버지는 ‘일본에 끌려가서 살아있어도 고통만 받다 죽게된다’며 자결하는 게 맞다고

엠플을 깨물자고 제안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엠플을 깨물자 경찰들이 와서 제지했고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원이었습니다.

그때, 김승일은 조용히 엠플을 깨물어 사망한 뒤였습니다.

저는. 엠플은 담배 속에 들어있었고, 엠플이 깨지면 기체가 되어 자연히 흡입못했습니다

 

Q. 서울로 압송 후 상황은 어땠습니까?
A. 바레인 경찰에서도 수사를 받았습니다.

엠플을 깨무는 방식은 북한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다 한국행 비행기를 탔고, 남산 지하 수사실에 도착해서도 8일 동안 한국 사람이 아니라고

일본어와 중국어를 했습니다. 그런데, 명동을 돌아보게 된 날이 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북한에서 해외 실습을 해서 자본주의 실상을 알았지만 같은 동족이 너무도 자유로운  모습을 보며

‘여기가 사람 사는 곳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북한과 차이가 나나. 통일을 위해 했다고 자부했는데 통일에 기여되는 게 뭔가...’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Q. 심경의 변화가 얼마 만에 온 건가요?

A. 8일 만입니다.

 

Q. 그 후, 가족들은 어떻게 됐나요?

A. 얼마 전, 탈북자 분에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생존해계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Q. ‘살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 하게 됐나요?

A. 오로지 죽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형 판결을 받는 순간 당연히 죽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어머니가 떠오르더군요.

어머니가 이런 나를 보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인간이니 맥이 풀렸다고 할까요.


Q. 사면 후 주어진 역할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A. 대한민국이 저를 살려놓은 건 KAL 사건에 대해  북한이 아직도 인정을 하지 않고  뒤집어 씌우려고 하니

 이 진실을 증인으로서 증언하라고하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KAL기 사건의 진실을 지키는 게 제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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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박의 시사토크 판' 김현희 편은 내일 밤 2부에 서 더 이어진다.

 

2부에서는 김현희를 꾸준히 인터뷰 해 온 ‘조갑제닷컴’의 조갑제 대표가

함께 해 김현희 ‘가짜몰이’에 대한 진실을 상세히 털어놓는다.

전 정부에게 받았던 이민 압박, 경찰 협박, 방송 출연 강요 등에 맞서 홀로 싸워야 했던 심경도 밝힌다.

 

-출연자 : 1987년 KAL기 폭파범 김현희
-방송일시 : 2012년 6월 18일 (월) 밤 10시
-진행자 : 최희준 취재에디터, 박은주  조선일보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