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1950. 장로교 목사. 혜산. 진. 북청,함흥에서 목회.
6.25공산군에게 납치 순교. 함남 흥원 출생
1.온유하고 착한성품으로 자라.
김경종은 구한말 갑신정변이 일어나나 1894년에 함경남도 홍원군 홍원읍에서 출생했다. 이곳 북경에는 함경산맥의 지맥인 차일봉산맥이 뻗어 있으며 홍원 남대천 북대천 유역의 홍함지가 있어서 경지가 넓고 해안이 잘 발달하였고 홍원만은 경포항, 전진항의 2개의 항구가 있다. 또한 연안일대는 세계적어장으로 명태,대구,청어,연어,고등어 등의 어획이 많기로 유명하며 전진,경포,운포,삼호등의 어항이 잘 발달된곳에 명승고적이 많은 고장이다. 특히 송도의 해수욕장이며 광업도, 형석, 흑연,석고, 석회암,카바이트,석회질, 소공업 원료는 거의 홍원군에 의존한다하여도 과언이 아닐만큼 풍부한 고장이다. 그는 이러한 홍원군을 배경으로 출생하여 어린시절을 선천적으로 온유한 성품에 어질고 착한 그의 기품을 곱게 키우면서 자랐다.
그가 목회에 꿈을 갖고 그의 나이 서른이 지나 1929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고 졸업하게 된다. 졸업을 한 후 첫 목회지는 함남 혜산군 혜산읍 혜산리장로교회로 1932년까지 봉직하였다. 이 혜산교회는 1916년에 설립, 당시 갑산군의 김택서의 전도로 이인규의 사가에서 첫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때로부터 수년간 신마리아가 시무하였다.
신마리아는 기독교의 여성교육자요, 평신도 지도자인 신의경의 모친이요, 한국 최초의 의학박사로 의사요, 전도자요, 사회사업가인 몸으로 지금의 정신여고의 전신인 연동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직에 종사하며 여성교육의 일환으로 여자성경반 주일학교, 사경회연합전도회 등 운영에도 전력을 다하며 연동장로교회의 한국 최초의 여집사이기도 한 이 신마리아는 전도인으로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김목사는 이 혜산교회에서 1933년에 다시 함경남도 함흥에 운홍리교회로 옮겨 시무하였다. 여기서 일본에 건너가서 신학을 더 공부하고 1934년 토오쿄오에 있는 아오야마학원 신학부를 졸업하고 다시 귀국하여 고향인 함경도로 돌아와 운홍리교회를 다시 맡아 목회에 전념하였다. 1940년에는 함남노회장에 피선되어 활약하기도 하였다.
2. 신사참배 적극반대
그는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감옥에서 혹심한 고문을 받으면서 형을 살기도 하였고, 늘 일본 경찰 감시를 받아오기도 했다. 이와같은 민족 수난에 동참하여 나라의 독입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었음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되겠다.
김 목사는 이후에도 1943년 9월 '일본 천황은 신이 아니다 다만 피조물인 사람일 뿐이고 그런 고로 경배의 대상이 결코 될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이와 같은 일 때문에 그는 5개월간이나 형무소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39년 세계 제2차 대전과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인에 대한 탄압은 극심하였고 신사불참운동으로 인하여 교회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외국 선교사들은 강제 추방되고 투옥된 신자 수만도 무려 2,000명이나 되고 폐지되었던 교회는 200여처, 감옥에서 순교한 자만도 무려 50명이나 된다고 한다.
일제는 신사참배만으로 끝내지 않았다. 궁성요배 또는 동방 요배라 하여 일본 왕이 거주하고 있는 궁성을 향해 왕의 은덕으로 살게 함을 감사하는 예의의 표시로 강요하였다.이 궁성되지 전 먼저 궁성요배를 실시한 후에 예배가 진행될 수 있도록 강요되었다. 또한 각 가정과 교회 안에 가미다나를 설치하게 하여 가정 제단의 신도를 강요하였다.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이 우리 역사성에 실재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거룩한 분노와 울분을 참을 수가 없지 않는가?
바로 이 때문에 김 목사는 외쳤고 항거하여 5개월간의 옥고를 치루었던 것이다.
3. 교회와 양무리를 지키다 순교.
그러나, 사필귀정으로 일제는 패망하고 나라와 민족은 해방이 되었다. 이 날과 날을 소망하면서 그 갖가지 조국은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3.8선은 그어지고 민족은 남북으로 분단되고 동족상잔의 더 무서운 6.25의 비극을 불러온 것은 무엇때문이었던가 북한에는 무신론 공산주의가 교회와 교인들을 탄압하는 것은 일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여기 더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정든 고향을 뒤로 하고 후일을 기약하면서 눈물로 월남의 뜻을 굳혔으니 이때가 6.25 발발 2년전인 1948년 자유의 땅 이남으로 월남하게 되었다.
월남한 후로 서울 후암교회를 맡아 2년간을 시무하다가 드디어 1950년 6.25를 서울에 맞았다. 수도 서울은 어이없게도 함락되고 또 한바탕의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가족은 다 피난을 시켰으나 자신은 미처 피하지 못한 채 공산군들에게 납치되고 말았다. 그의 선천적 성자 타입에 온유하고 겸손하며 인자한 예수님같은 인품, 게다가 지혜 또한 출중하여 온 교인들의 존경을 아낌없이 받던 김목사는 교회와 양무리를 지키고 돌보다가 마침내 순교의 영관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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