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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학 독립운동으로 공산당에 체포,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순교

Joyfule 2018. 9. 21. 12:14

 


김영학 독립운동으로 공산당에 체포,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순교

김영학1877-1932 권서인, 감리교 목사, 시베리아선교 순교자
황해도 금천군 조포리 출생

1. 방탕한 젊은 시절과 전도대와의 시비

김영학 목사는 황해도 금천군 금천읍 조포리 양반가문을 배경으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향리 한문사숙에서 글공부를 시작하여 천자문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모두 읽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 양반 가문에서 익힌 양반수업이 그가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바깥 물정에 눈을 뜨면 체면도 헌신짝처럼 벗어버리고 숨어서 나쁜 친구들과 배운 술담배로부터 정도 이상의 주색잡기로 난봉꾼으로 그 고을에서는 이름이 나 있을 정도였다. 그의 방탕한 생활을 억제시킬 만한 힘이나 방법이 없었다.

그가 30살이 되던 어느날 토산장이 서는 날이었다. 영학은 아직 낮인데 그는 술에 만취되어 거리를 휩쓸었다. 아는 이들은 미리 비켜가고 상대를 하려 들지를 않았다. 그러나. 이 날만은 달랐다. 어떤 일단 무리들이 종이 조각을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무엇인가 부탁하고 권면하는 듯이 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교회의 전도대원이었고, "예수를 믿으세요, 믿고 구원 얻읍시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 믿으시요"하면서 전도지를 건네주며 전도를 하고 있었다. 영학이가 나타나면 으례껏 비켜서든가 우루루 달아나서 흩어지든자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않았다.

취기어린 눈을 부비고 그는 딱버텨셨다. 그리고 그는 벽력 같은 소리로 고함을 한껏 질렀다 '이 멍청이 새끼들아! 저리 꺼져, 이 병신들아! 썩 거지지 못해 ' 그래도, 이 사람들은 여전히 겁을 내는 기색이 없었다. "형님! 예수 믿으시오.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술김에도 잔뜩 자존심이 상하였다. 이쯤 되고 보면 알아서 피해갈 일인데, 시장터에는 공동 우물이 하나 있었다. 거기 있는 대로 물을 퍼서 뒤집어 씌웠다. 그러나 그들이 오히려 웃으면서 자애로운 어머니가 어린 애기를 다루듯 하는 것 같아서 더욱 기분이 나빴다. 오늘은 운좋게도 그냥 지나갈 줄 알았는데 본색을 들어 냈다. 전도지를 마구 뺏아 찢고, 발길로 걷어찼다. 그러나 대꾸없는 이들에게 이런 짓은 망난이 같은 자신에게 흥미거리도 못 되었고, 더 이상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2. 전도집회에서 회개하고 권서인이 됨.

언제쯤이나 되었을까? 그 이튿날에야 정신을 차리고 어제의 일을 생각해 본다. 차츰 후회하는 쪽으로 생각은 기울었고 그는 쪽지에 적힌 글을 읽고 그곳으로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에 벌떡 일어나 단숨에 달려가 본즉 그곳은 전도집회 장소였다. 이 청년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고 또 지금까지 이런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점점 그 분위기에 빨려 들었고 목사님의 설교는 그의 젊은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고 또 그 감동으로 달아 올랐다. 그는 한없이 울었다.

그 집회를 끝까지 참예하였고 이날부터 믿기로 결심하였다. 어떤 이에게서 성경을 권해 받았다. "이 성경을 보고 예수를 믿으시오. 예수님은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고 하였거니와 한 사람을 목사로 애국자로 목숨을 바치게 하고도 남는 힘이 있었다. 그 길로 그는 한해를 수일을 보내듯 이 신앙에 깊이 들어가 온갖 열심을 쏟아 바쳤다. 그는 난봉꾼으로 부랑하기 그지없었던 것 만큼이나 새 사람이 되어서 신앙의 열심 또한 그랬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정신이상자 취급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쯤은 그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처음에 이상하게 보던 사람들이 그의 엄청난 변화에 감동을 받아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로 나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그리고 믿게 된 다음해에 권서인이 되어서 성서공회에서 공급하는 성경, 찬송가, 쪽복음을 등에 지고 전도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3. 독립운동으로 체포 옥고를 치름.

1911년 해에 정식으로 전도사의 직분을 맡아서 충성을 다하기 시작했다. 1914년에서 감리교 연회에서 집사 목사로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고 그 이듬해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에 장로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1919년까지 그 동안에 평산,금천,장연,철원,서울종교,수표교,양양교회를 담임 목회하였다.

양양에서 1919년 3.1운동을 맞았다. 이 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강렬한 열망, 가혹한 총독정치가 채택하고 있는 헌병군사통치의 비인도적 횡포, 그리고 일제의 조선민족성 박멸기도,조선인 차별대우와 기회불균등, 언론이나 신앙,그리고 결사의 자유박탈, 기독교에 대한 근절정책, 농전토의 수탉,그리고 살벌한 만주 벌판에의 강제 이거 이민 정책 이런 것들은 이대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민족적 분노를 자아내게 했고, 김 목사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성경을 통해 바른 민족정신을 신앙으로 설교하던 중에 만세운동이 서울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자 대열의 선봉에 섰고 교인을 비롯한 국민들을 지도하였다. 이로 인해서 일본 관헌들은 그를 체포했고 그는 4년간이나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것만 보아도 그의 애국 운동의 정도를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일제의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극비문서에 그에 대하여 '민족절대독립주의,배일사상 포지자"로 규정하고 있듯이 그는 민족독립운동가였다.

4. 시베리아선교 활동, 공산당에 체포,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순교

1922년 5월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하여 가평읍교회를 시무하면서 당시 남감리회가 펼친 선교백년기념사업에 가담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교제확장과 선교사명과 전력을 경주하였다. 1921년 감리교연회는 양주삼 목사를 중심으로 만주 및 시베리아 선교를 시작하였다. 시베리아의 한 도시 블라디보스톡은 우리나라 두만강 바로 건너, 동해에 면한 항구로서 러시아의 동양 진출을 위한 중요 요지이다. 한일 합방으로 나라 잃은 동포들은 만주와 이곳 시베리아로 망명하였다. 우국지사들이 모여 들었고 혁명투사들이 반일항거의 근건지로 삼고 후임을 위하여 이곳에서 도모하였다. 여기서 한인촌이 이루어지고 한국인을 위한 해조신문(海朝新聞) 등이 발간되기도 했다. 이런 곳에 동포를 위한 선교사업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지사요 또한 시기적으로 적절하였다. 시베리아는 당시 러시아 공산혁명이 일어난 지 6년 밖에 안된 때였다. 과격파들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 하여 교회를 핍박하고 괴롭히던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따라서 시베리아 선교를 지원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시피하던 때였다. 그러나 김목사는 혹심한 옥고를 치렀던 뒤라서 아직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순교를 각오하고 자원하여 그는 이곳에 왔고 나라 없이 외롭게 사는 교포들을 위로하는 한편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교포들 중 많은 이들이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때문에 교회는 곤경중에서도 견고히 발전하였다. 9년간을 목회에 전념했으나 ,1930년 공산당들은 소위 반동분자라는 죄명으로 김목사를 구금하였고 근 1년간을 공갈, 협박 또는 회유책을 써가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단연코 거절하자 1931년 3월에 가장 악질적인 반동이라는 죄목으로 10년 중노동형을 받고 임지에서 약 100리 떨어진 곳에서 복역을 하였다.

이곳은 보통 영하 40-50도 오르내리는 추운 지대였다. 어느날 눈과 얼음이 쌓인 곳에서 이날도 중노등에 시달리던 중에 있었는데 갈라진 얼음 사이에 수십명이 떼죽음을 하던 중에 김영학 목사 그도 여기 함께 희생당하니 공산당의 배교의 강요를 배격하고 신절을 지켜 영광스러운 순교 대열의 참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