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꽃 - 마종기
헤어져 살던 깨알들이 땅에 묻혀 자면서
향긋한 깻잎을 만들어내고,
많은 깻잎 속에 언제
작고 예쁜 흰 깨꽃을 안개같이 뽀얗게 피워놓고,
그 깨꽃 다 보기도 전에
녹녹한 깨알을 한 웅큼씩 만들어 달아주는 땅이여.
깨씨가 무슨 흥정을 했기에 당신은
이렇게 농밀하고 풍성한 몸을 주는가.
그런가 하면, 흐려지는 내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꽃씨가,
어떻게 이 뒤뜰에 눈빛 환해지는
붉은 꽃, 보라색의 연하고 가는 피부를 만드는가.
땅의 염료 공장은 어디쯤에 있고
봉제 공장은 어디쯤에 있고
향료 공장은 또 어디쯤에 있기에,
흰 바탕에 분홍 띠 엷게 두른
이 작은 꽃이 피어 여기서 웃고 있는가.
나이 들수록 남들이 다 당연하다며 지나치는 일들이
내게는 점점 당연하지 않게 보이는 것은
내 분별력이 흐려져가기 때문인가. 아무려나,
흐려져가는 분별력 위에 선 신비한 땅이여,
우리가 언제 당신 옆에 가면 그때부터는
당신의 알뜰한 솜씨를 다 알아볼 수 있겠는가.
흙이 꽃이 되고 흙이 깨가 되는
그 흥겨운 요술을 매일 보며 즐길 수 있겠는가.
늘어만 가던 궁금증이 하나씩 해결되는 깨알 같은 눈뜸이여,
나는 오늘도 깨꽃 앞에 앉아 아른거리는 그 말을 기다리느니,
어느 날 내 몸도 깨꽃이 되면 당신은
내 말과 글이 드디어 향기를 가지게 된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부르고 싶었던 노래를 찾아 헤매던 날들은 지나고
드디어 신선한 목숨이 된 나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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