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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집 - 유영자

Joyfule 2015. 7. 7. 08:32

 

 [다세대(빌라/연립)경매 낙찰비법] 2014타경 4010φ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378-6 석수동다세대주택 3층 경매 수익성분석

 

낡은 집 - 유영자

 

 

 집수리를 시작했다. 햇수로 삼십 년을 넘긴 낡은 연립주택이다. 이 집에서 아들을 낳았으니 아들 나이보다 한 살이 더 많은 집이다. 사는 동안 부동산 붐이 일어 집에 비해 비싼 값을 주겠다고 팔라는 권유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등으로 들었다. 무엇이든 손에 쥐면 바들거리고 그게 전부인 양 놓지 않았다. 내 삶도 그랬다. 이만한 집에서 요만큼 사는 것도 내 분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동안 이 다세대주택 네 가구에 주인들이 여러 번 바뀌었다. 우리가 처음 입주한 채로 남아 있는 유일한 본토박이이다. 그러나 우리도 해운대로 이사를 가서 10년을 살다가 다시 이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전에는 아래층 102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내가 아파서 누워있을 때에 할머니는 옆집 아줌마와 함께 우리 집 김장을 해주셨다. 할머니의 남편도 이 집에서 돌아가셨다. 우리 동에 네 가구의 먹을 물을 먼 산골에서 길러다 주시던 분이다.

 

 아래층 101호 아줌마는 이 집에서 청춘을 다 보냈다. 젊어서 반탱이 장사로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며 자식을 키웠다. 그래서 골병이 들었는지 이젠 퉁퉁 부어서 소원하던 집에 붙박이가 되었다. 칠십 중반에 접어든 아저씨는 아직도 경비 일을 하신다. 우리 옆집인 201호 아저씨는 벽돌공이다. 아저씨의 그 솜씨처럼 반듯하게 빈틈없이 삶을 쌓아도 살림 꼴은 늘 그 모양이다. 처음 들어와 살 때에 아들딸이 중고학생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마흔 고개를 바라보는 중년이 다되어간다. 아줌마는 이제 칠십 고개를 넘기고 보니 오래된 집처럼 이곳저곳 낡아서 고장이 잦다. 본래 단단한 집이 아니었다. 부실공사로 입주한 날부터 다락에 물이 샜다. 그것은 분명 집을 지은 사람의 잘못으로 보수를 해야 할 일이었으나 집 장수는 팔고나서는 그만이었다.

 

 우리 아래층에는 안주인과 그녀의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가 살고 있는데, 집이 ‘다슬기’라면 똑 떼어서 옮기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호랑이 할머니는 비 온 뒷날은 어김없이 우리 집에 올라와서 고함을 질러댔다. 빨리 집수리를 하라는 것이다. 나는 그 일로 신경성병이 생겼다. 비만 오면 불안해서 잠을 못 잔다. 어느 날 나는 돌이 채 안 된 아들을 들쳐 업고 아래층에 내려갔다. 그러고는 소나기처럼 퍼부어댔다. 아마도 내 눈에서는 번갯불이 번쩍했을 것이다. 집에 비새는 게 어디 내 잘못이냐며 나도 피해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뒤로 호랑이 할머니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미선이 엄마가 보기엔 얌전해 보여도 여간 드센 게 아니더라고 겁을 먹었다는 ?이야기다. 결국 그 집은 집을 떼어 옮길 재주가 없었던지 주인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이 집에서 우리는 부자가 될 꿈을 꾸었다. 남편은 처음에 유명상표의 교복지 총판을 했다. 부산의 서른 평 아파트 서른 채 값이 들어간 큰 사업이었다. 성공했다면 우리는 아마 빌딩의 맨 꼭대기 층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망했다. 교육부에서 교복자율화를 시켰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술만 마시면 정부를 씹었다. 다음에는 집 한 채 값으로 생선도매상을 했다. 생전 알지도 못하는 일을 남의 말만 듣고 했다가 즉시 망했다. 그 다음에는 보세공장을 했다. 가끔은 예쁘장한 아가씨가 남편을 찾아오기도 했다. 그나마 문을 닫고 나니 밥을 끓여먹을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다. 남편은 경남 거창에 88올림픽 도로를 만드는 데 품을 팔러갔다.

 

 남편이 돌아올 동안 나는 이 집을 밑천으로 하숙을 치기로 했다. 그때 내 나이 서른셋이었다. 하숙생은 인근의 대학에 남학생으로 세 명이었다. 전화도 거실에 내주고 텔레비전도 내 주었다. 반찬이든 밥이든 양껏 먹게 했다. 장사가 남는지 밑지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아이들과 나는 그 덕에 먹고 살았다. 그러나 몇 달 가지 못했다. 힘들어서 병이 났던 것이다. 하숙생들은 저희들이 밥을 해먹겠다며 나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그러나 내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하숙생 중에 군대를 갔다 와서 복학한, 나이든 학생이 있었다. 집이 울산이라고 했는데, 부모님이 결혼하라는 말만 하면 내 얼굴이 떠오른다고 했다. 처음 우리 집에 하숙방을 보러왔을 때 주인아줌마는 어디 계시느냐고 묻던 학생이었다. 내가 주인이라고 하니 “에이, 농담마시고요.” 하던 학생은 내가 주인집 딸인 줄 알았다고 했다. 나보다 여섯살 아래였다. 기타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치면서 장래 자기 꿈은 돈을 많이 벌어 시골에 가서 농장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친구는 하숙을 나가서도 술에 취하면 가끔 우리 집 대문 앞에 와 서곤 했다. 이집에서의 젊은 날의 추억이다.

 

 이 낡은 집에서의 내 삶은 집을 닮아서였을까, 늘 비가 샜다. 낡은 집 같은 나를 귀하게 여긴, 분에 넘치는 사람도 있었다. 늘그막에 찾아온 엉뚱한 행운이요 사랑이었다. 그러나 옮겨가지 못했다. 이제는 별 수 없다. 오래되어 낡은 것은 허물이 없어 좋다. 미운 정 고운 정 끈끈하게 눌어붙어 있어서 편하기로는 더 할 나위 없다. 가난하지만 정겨운 이웃들이 열심히 삶을 꾸려가고 있다. 모두가 가난한 곳에서는 아무도 가난하지 않다. 가난한 동네에서 눈치 보지 않고 마음의 부자로 살고 싶다. 다독다독 새는 곳을 메우고, 빛바랜 곳을 칠해 가면서 더덕더덕 세월이 묻은 집을 사랑하고 싶다. 낡은 집을 닮은 내 삶을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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