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나 - 조재은
빛 아래 서면 누구나 그림자가 생긴다. 등 뒤에 있는 그림자를 볼 수 없듯이 내면의 그림자 또한 드러나지 않고 깊은 곳에 있다. 어릴 때 겪은 결핍은 어딘가 숨어있다 느닷없이 가시를 내민다.
철학교실 회원 한 명이 유럽을 다녀와서 각 나라에서 특이한 볼펜을 사왔다. 색깔과 모양이 멋스럽다. 책상 위에 인원수대로 꺼내놓고 골라 가지라고 했다. 학용품에 관심이 많은 나는 다른 사람이 가져가기 전 옆 사람을 팔꿈치로 밀치다시피 하며 재빨리 투명한 파란색을 골랐다. 다른 색은 보이지도 않았다. 볼펜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는데 옆에 앉은 반 대표는 조용히 앉아있엇다.
“왜 안 가져가세요?”
“다들 고르고 남으면 가져가지요.”
책상에는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볼펜 하나만 남았다. 반 대표는 조용히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볼펜을 집었다. 손의 움직임에 품위가 있다. 2,30대 학생이 많은 교실에서 그녀는 나이가 많은 편에 속했고 나는 그녀보다 십 년이 위였다. 몇 분 전 마음에 드는 새 볼펜 하나로 기분이 좋았던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빨개져 책만 넘겼다.
“저어…이거 가지세요.”
“아니에요. 집에 다른 볼펜 있어요.”
나의 어른답지 못한 태도를 스스로 느끼자 옆자리에 앉은 반 대표에게 계속 신경이 쓰였다. 꼼짝 않고 앞만 보고 있으려니 어깨가 결렸다. 부끄러운 파란 볼펜은 눈에 안 띄게 필통에 넣었는데도 자꾸 그쪽에 눈이 갔다.
집에 돌아와 책상 위 연필통을 보니 연필과 볼펜으로 꽉 차 있다. 제일 싫은 탐욕스런 중년 여자. 나는 오늘 그 여자가 되었다. 파란색 물건에 집착하는 내가 낯설다.
또 실수를 했다. 파란색에 걸려 넘어졌다. 물건을 고를 때 여러 색 중에서 파란색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빨리 파란색을 가져야한다는 강박 증세가 생긴다. 왜 그럴까.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그림자가 파란색에 대한 어떤 아픔을 갖고 있나. ‘일상생활 속에서 무언가를 강렬하게 원할 때 그곳에 어떤 마음 장치가 작동하는지 살펴보라.’는 심리학자의 글을 떠올렸다. 찬찬히 푸른 빛에 대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떠오르는 한 정경이 있다. 아파트가 없던 시절, 놀이는 거의 집 밖에서 이루어진다. 내가 살던 동네 친구는 나보다 서너 살 위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고 집에서도 막내다. 공놀이나 고무줄놀이에서 나는 깍두기 역할을 맡는다. 깍두기는 어리거나 놀이 실력이 없어 어차피 자기편에 도움이 안 될 때 지목을 한다.
아이들 중에 중학교 1학년이 있다. 키도 나이도 큰 차이가 나서 우리와 친구라고 하기에는 미안하다. 우리는 매일 중학생을 기다린다. 놀이의 리더여서 그 아이가 오면 재미도 있지만, 그 아이가 가진 파란 유리조각을 보기 위해서다. 그 당시 우리가 가진 귀한 물건은 바둑알이나 조약돌이 전부다. 어디서도 볼 수 없던 파란 유리는 어떤 보석보다 아이들에게는 귀한 물건이다. 그 아이는 자기편이 이기면 그 파란 유리를 통해 하늘을 보여준다. 보는 아이마다 와~와~하며 파란색을 통해 보는 세상을 신기해한다.
놀이 때마다 나는 거의 깍두기이기 때문에 파란 유리를 가까이 볼 수 없다. 울고 싶게 파란 세상을 보고 싶었지만, 우리 동네 아이들 놀이 법칙에 따라야 한다. 아이들의 짧은 시청이 끝나면 파란 유리는 주인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 언젠가는 파란 유리를 통해 하늘을 보고 싶다는 희망은 그 아이가 이사를 가자 무너졌다.
한동안 파란 유리 꿈을 꾸곤 했다. 길을 가다가도 유리창에 파란색이 보이면 멈춰 서고, 목이 마를 때도 단순히 목마르다,가 아니고 파란 유리가 보고 싶다는 느낌 같은 게 먼저 느껴진다. 거꾸로 파란 유리 생각이 불현 듯 나면 목이 말라지기도 했다. 어리고 약해서 게임에 정식참여를 못 한다는 것이 파란 유리에 투영 됐나 보다.
어릴 때 파란 유리가 선글라스의 빠진 알이란 것을 안 것은 서른이 넘어서다. 파란색에 대한 결핍. 내게 있는 작은 부분의 결핍을 찾았을 뿐이다. 어찌 파란 색뿐일까. 12가지 크레용 색보다 몇 배 더 많은 가시가 숨어 있을 것이다. 그 가시는 때때로 나를 당황하게 만들 것이다. 가시를 그늘에서 양지로 옮기면 잎이 되는 변이가 일어날까. 결핍의 가시가 아니 포용의 잎이 되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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