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속의 가시 - 박완서 (하)
내가 미국 처음 갔을 때만도 60년대니까 한국이 지지라도 못 살 때였다.
사업에 실패한 남편 형님이 미군하고 국제결혼한 처제 연줄로 먼저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이민간지 몇년만에 살 만해졌다고 했고, 시어머니 생신 때는 100불씩 부쳐오곤 했다.
그때는 100불이 어찌나 큰 돈이었는지 그걸로 잔치를 떡 벌어지게 치를 수가 있었다.
시어머니는 마치 아들이 미국가서 갑부나 된 것처럼 날로 도도해지셨고, 남편도 여기서 월급쟁이 노릇 하는 걸 불만스러워 했다.
그건 불만이 아니라 열패감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사회에서의 경쟁은 이미 결판이 나버린 나이였으니까, 출세할 사람은 이미 다 했고, 못한 사람은 영영 가망이 없어진 사십대 중반이었다.
출세한 친구가 유난히 많은 명문대학 출신이라는 것도 남편이 시시한 직장을 성에 안 차 하는 까닭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까짓 직장 당장 때려치울까보다는 소리를 누가 붙드는 것도 아닌데 줄창 입에 달고 다녔다.
여기서 사는 걸 뜨내기처럼 말하는 데는 미국서 자리잡은 형님한테서 들은 풍월의 영향도 컸다.
남편은 자기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주류에서 밀려나 변두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형이 떠벌리는 원리원칙이 지켜지는 사회, 노력한 만큼 잘살 수 있는 나라야말로 자기같은 사람이 놀 물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가 특별히 귀가 여린 사람은 아니었다.
그때는 다들 그랬다.
사회 도처에 불평불만이 팽배해 있을때라 미국 이민은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 볼만한 돌파구였다.
공항을 통해 이 나라를 뜬다는 것만으로도 당장 신분이 수직으로 상승한 것처럼 보일 때였다.
남편의 꾸준한 노력 끝에 우리는 드디어 이민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 무렵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낯선 나라에서 과연 적응이 잘 될까 하는 부담감을 한결 가볍게 해주었다.
단출한 우리 식구만도 여섯이나 되었다. 대식구였다.
LA에서 잘 산다는 형네는 이혼한 처제와 함께 식당을 하고 있었다.
순전히 한국인 상대의 식당은 한국의 변두리 식당보다 김치 젓갈따위 고리타분한 냄새가 더 짙게 배어 있었다.
그 냄새가 그리워 찾는 손님이 많다고 하는데 이국적인걸 동경한 우리는 오만정이 떨어졌다.
남편은 더했다. 형은 처제가 독립하고 싶어하니 아우를 그 자리에 앉히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민수속과 함께 영어회화 공부를 제법 착실하게 해가지고 온 남편은 온종일 영어 한마디 할 필요가 없는 일터는 천만금을 준대도 싫다는 거였다.
남편은 어떻게든 백인들 사회에 끼여들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가져온 돈을 조금씩 까먹었다.
형과 사이가 나빠지자 나도 그 식당에서 일을 거들 수 없게 됐고, 앞으로 아이들 공부시킬 일이 난감했다.
형네는 아이들이 좋은 학교 다닌다는 게 큰 자랑거리였고 희망이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고 자부했다.
남편은 그 잘난 학벌 때문에 오히려 애들을 개처럼 기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편이 잘 벌어도 부부가 같이 벌지 않으면 먹고살기 힘든 사회라는게 우리 형편을 딱해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충고였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주선으로 시간제 식모같은 일자리도 더러 얻어걸렸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나는 남편과는 달리 식민지시대에 여고에서 배운 영어가 단데, 그나마 부끄러움을 많이타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이 안통하는 가정에 들어가 종노롯을 하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그러잖아도 유색인종에게 백인은 알아서 기어야 할 상전처럼 어렵기만 한데, 그게 일대일의 관계가 되면, 나처럼 소심한 사람은 그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정식으로 출퇴근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얻은게 냉동회사였다.
내가 맡은 일은 냉동한 새우를 크기에 따라 몇단계로 분류해서 포장하는 일이었다.
보수는 작업량에 따라 주급으로 지급되는데, 내가 받은 주급은 동료들 중에서 늘 꼴찌였다. 내가 가장 일이 더디니까 당연했다.
나는 내 직장에 만족했다.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 같은 일을 하는 동료들이 있다는 건 또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몰랐다.
동료들은 대부분 뚱뚱한 멕시코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친절하고 유쾌했고 무엇보다도 그들 앞에선 한결 주눅이 덜 들 수 있어서 좋았다.
백인들이 하는 영어는 하나도 못 알아 듣겠는데 멕시칸의 영어는 곧잘 귀에 들어오는 것도 신기했다.
어느날, 별안간 나에게 사무직이 주어졌다.
들어오고 나가는 물량만 기록하면 되는 간단한 사무직이었지만 보수도 오르고 손이 온통 짓무르는 막노동을 안해도 되니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그러나 신참인데다가 직업능률도 가장 떨어지는 나에게 그런 출세길이 어떻게 열렸는지를 알고 나자 괜히 동료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경위는 이러했다.
그 회사에서 슈퍼마켓으로 넘긴 새우가 대량으로 반품이 들어왔는데, 표시된 규격과 다르게 크고 작은 게 함부로 섞여 있었다는 것이다.
반품을 받아보니 사실이었으므로, 누가 그렇게 불성실하게 일했나를 알아보기 위해 포장하는 봉지에다가 누가 잔업한 건지를 알아볼 수 있는 특별한 표시를 했는데 정직하게 일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는 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진급할 만해서 한거였는데도 제일 신참이 먼저 진급한게 미안해서 나는 늘 아이 앰 쏘리를 입에 달고 다녔다.
사장한테도, 감독한테도, 동료들한테도 만나기만 하면 아이 앰 쏘리였다.
행여나 누가 날 시기할까봐 미리 겸손을 떨었고, 마음으로부터 미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차차 그런 과장된 내 겸손은 비웃음거리가 되는가 싶더니, 누가 뭘 어떻게 고해바쳤는지 나는 생선을 뼈째 가는 무시무시한 기계가 있는 곳으로 쫓겨났다.
그 기계를 청소하는 일은 아주 힘든 막노동이었다.
엄청 큰 기계였는데, 청소를 하다가 잘못 조작을 해 팔뚝이 잘린 일이 있는 기계라고 했다.
겁이 많은 나는 그 직장을 그만두었다. 함부로 굽실대며 미안해 할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는 착실하게 배운 성 싶었다.
또 하나, 같이 일하던 멕시칸들로부터 일본 사람이 운영하는 믿을 만한 직업소개소가 어디 있다는 걸 알아놓은 것도 냉동회사에서 얻은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일본말엔 자신이 있었고, 통하는 말로 통사정을 할 수 있으면 반드시 살 길이 열릴 것 같았다.
그런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소장은 나이 지긋한 여자였다.
일본말 특유의 상냥한 말투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겠는데, 고맙게도 그 여자는 어떡하든 내 소질이 뭔가를 알아내려고 내게 말을 많이 시켰다.
나는 말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에 곧 제동을 걸 수 없도록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웃으면서 적당히 반문도 하고 맞장구도 쳤는데, 상대가 어떤 일에 적합한지 알아내려는 의미있는 질문이어서, 나는 저절로 기술 한 두가지 정도는 익혀가지고 오는 건데, 하고 깨우칠 정도였다.
그 여자와 이야기하는 동안 비록 익혀 온 기술은 없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를 내 안에서 진지하게 찾아보기 시작했고, 그건 덮어놓고 아무 일이나 하게 해달라고 덤빌 때하고는 딴판의 행복감이었다.
나는 대학도 안 나오고, 이민 오기 전에 취직해본 적도 없고, 출신학교도 현모양처를 양성하기로만 소문난 여고라는 걸 그 여자에게 몹시 미안해하며 털어놓았다.
여학교 때 얘기를 하다가 좋아하는 과목얘기도 나오고, 양재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었다는 걸 아련한 그리움으로 생각해냈다.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여자들은 거의 여고가 최종학력이 되었으므로, 상급반에서는 실생활에 필요한 요리나 바느질, 예의범절을 철저하게 교육시켰다.
양재도 그 중의 하나였는데, 선생님이 그 시절엔 희귀한 양장미인이어서 양재과목은 인기학과였다.
재봉실 시설도 훌륭해서 우리는 좋은 선생님 밑에서 재봉틀 실습은 물론 치수를 재는 법에서부터 기본형 옷본을 떠서 자유자재로 변형시키는 법까지 철저한 기본교육을 받았다.
결혼할 때도 양재노트만은 챙겨갈 정도로 그때 받은 교육은 오래도록 쓸모가 있었다.
내가 딸애들의 원피스는 사 입히지 않고 거의 내 손으로 해 입힌 것도 생각해보니 그 양재노트 덕분이었다.
그 여자하고 그런 옛날 얘기까지 하게 된 것은 이미 구직을 위한 상담의 한계를 벗어난, 막혔던 대화의 욕구였다.
동년배인데다 섬세한 감정 표현까지 가능한 공통의 언어를 갖고 있다는 걸로 나는 그 여자에게 첫날부터 우정 같은 걸 느꼈다.
취직과는 상관없이 가끔 놀러 오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전엔 누구에게도 그렇게 넉살 좋게 군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내 이야기를 섬세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들었던 듯하다.
얼마 안돼 나는 그 여자의 소개로 양장점에 취직을 할 수가 있었다.
특수한 고객만을 상대로 하는 맞춤옷집인데 주인은 불란서 여자라고 했다.
임금도 냉동회사와는 댈 것도 아니게 후했다.
그 여자가 나를 과대평가해서 잘못 소개한게 분명했으므로 뒷일이 걱정돼 사양하려고 했지만. 하필 그날 그 여자는 정신없이 바빴고,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나는 떠다밀리듯이 새로운 일터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불란서 양장점은 일본인들 거주지역하고 가까운 깨끗하고 고요한 뒷골목에 있었다.
일본여자 소개로 불란서 양장점에 왔다는 느낌 때문인지 결벽증에 가까운 청결함과 하찮은 것도 멋있어 보이는 분위기가 나에게는 일본과 불란서의 의좋은 공존처럼 신기하게 여겨졌다.
양장점이라고 해도 밖으로 면한 쇼윈도는 없었고, 그림에서 본 유럽의 성당 문처럼 생긴 문을 밀고 들어가면 비로소 큰 유리창이 보이고 그 안에는 창백하고 도도하고 어딘지 슬퍼 보이는 마네킹들이 공단이나, 사텐, 시폰 같은 고급 천으로 만든 주름이 풍부한 드레스를 치렁치렁하게 입고 읍한 자세로 고즈넉이 서 있었다.
불란서 여자의 작업실은 이 응접실 풍의 작은 홀을 거쳐서 들어가게 돼 있고 그 안은 밝고 능률적으로 정돈돼 있었다.
그 여자는 주름은 없었지만 깡마르고 강파른 얼굴이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고, 오렌지 빛 루주를 진하게 바른 입술이 한련꽃을 문 것처럼 생생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불란서 여자와 재봉사들이 말하는 걸 나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여자는 나에게 쉬운 영어로 간단한 지시를 했고 가끔 일본 말도 했다.
어떤 말도 아주 조용히 속삭이듯이 말했기 때문에 눈치로 알아듣는 게 더 편했다.
거의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미국 땅에서 여러 번 던져졌던 침묵 중에서 이 곳의 침묵은 아주 편안했다. 단절이 아니라 용해 같은 거였기 때문이다.
내가 맡은 일은 불란서 여자가 떠주는 본대로 천을 재단하는 일이었다.
나는 양재 선생한테 배운대로 몸체의 앞뒤나 좌우를 뜰 때, 암홀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가게 놓고 재단했다.
무늬가 없는 옷감인 경우 그렇게 해서 옷감을 덜 들게 하는 건 재단의 기본이었는데도 불란서 여자는 그걸 매우 신기하게 여겼고 나를 칭찬해주었다.
얼마 안돼 나는 그 여자가 나를 신임하고 좋아한다는걸 알 수 있었다.
남편은 아직도 방황 중이었지만, 나는 순전히 내 힘으로 잡은 좋은 일자리로 인하여 비로소 이민생활이 일단 위기를 벗어났다는 안정감을 맛볼 수가 있었다.
일감은 연달아 있었지만 나는 옷을 맞추러 오는 고객을 거의 보지 못했다.
고객인가 싶은 이도 맞춤옷의 진짜 주인은 아니었고, 심부름꾼이었다.
미국사회에도 전화를 걸거나 하인을 시켜서 치수를 대주고 옷을 맞추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귀족사회가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틈이 날 때마다 소녀 적에 읽은 괴기소설로다 그런 상류사회를 유추해보곤 했다.
흑사병이 창궐하던 중세에 권세와 부를 한 몸에 지닌 성주가 선택된 귀족들을 외부세계와 철저히 차단된 성 안에 모아놓고, 흑사병과 맞선다.
흑사병은 커녕 바늘 끝이나 심지어는 시간이 흘러 들 틈도 없는 완벽한 방어 속에서도 그들은 흑사병의 공포에서 못 벗어난다.
그래서 허구한날 질탕 같은 무도회로 그 공포를 잊으려 하지만, 어느 날 낯익은 멤버 외에 낯선 손님이 섞여 있음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불청객이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불청객이 바로 흑사병이었고, 춤추던 귀족들은 차례차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간다, 는 이야기였다.
그 폐쇄된 성 안의 교만하고 이기적인 귀족들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옷이었다.
나는 불란서 여자가 재단한 이런 치렁치렁하고 유현한 옷보다는 그 여자가 모조진주로 손수 수놓는 비단 실내화나, 불란서 망사의 정교함이 돋보이는 베일, 그리고 자투리 헝겊을 날이 긴 반짝거리는 가위로 날렵하게 싹독거려서 한 송이 요염한 꽃으로 피어나게 하는 코사지 등을 더 좋아했다.
불란서 여자가 몰입과도 도취와도 같은 표정으로 그 일에 열중하는 걸 나는 숨죽이고 지켜보곤 했다.
검은색이나 은색 보라색 등 가라앉은 색상의 드레스에 한쪽 가슴을 장식하는 코사지는 거의 비슷한 계통의 색상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비현실적인 옷에다가 놀랍도록 생생한 현실감을 불어넣었다.
옷을 뚫고 걸어 나올 것 같은 생기는 생뚱스럽게도 간드러진 요염함이었다.
그 여자는 어쩌면 자기가 만든 엄숙한 옷에다가 장난을 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 여자가 다 된 옷에다가 장난을 치기위해 코사지를 만들 때의 무아지경을 볼 때마다 아침에 거울 앞에서 오렌지색 루즈를 안 칠한 그 여자를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그 양장점 종업원 중에서는 내가 가장 가벼운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미안감 때문에 나는 될 수 있는대로 늦게까지 남아 있다가 마무리 청소까지 끝마치고 퇴근하려 들었다.
어디서나 그놈의 미안감이 문제였다.
그러다보니 가게를 열고 닫는 열쇠까지 내 차지가 되었다.
커다란 거울이 걸린 잘 정돈된 불란서 여자의 작업실에서 나는 금지된 장난에의 유혹으로 가슴을 울렁거리며 아직 찾아가기 전의 맞춤옷을 이것저것 걸쳐보곤 했다.
계집앳적 엄마의 외출복을 몰래 입어볼 때 처럼 서양 여자들의 체격에 맞춘 옷들은 나에게 터무니없이 컸지만 고급천의 감촉은 황홀했고, 가슴에서 피어나는 코사지는 내 안에 남은 화냥기처럼 요요했다.
나는 내 하루 중 그 시간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감미롭고도, 마치 열병의 예감처럼 불안하고 달뜬 열정의 웅성거림을 내 안에서 감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양장점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유명한 양장점인 것 같았다.
어느 날 어마어마한 장비와 함께 그 지역 TV방송국 촬영팀이 들이닥쳤다.
미리 약속된 것인듯 나만 놀라고 아무도 안 놀라며 그들을 맞이했다.
휘황한 조명등이 설치되고 여기저기다 플러그를 꽂고 마이크랑 카메라가 이동하면서 그들은 서로 거침없이 떠들었다.
물론 영어였고, 나는 못 알아 들어서가 아니라 그런 소요가 마치 여지껏 내가 편안하게 안주해왔던 침묵이 흘러 나가는 소리만 같아서 불안했다.
장비를 설치하는 기술자중에 동양인이 한 사람 있었다.
동양 사람 중에도 한국 사람이 아닌가 싶게 친근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에게 우리말로 이야기를 시켜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두 팔을 크게 벌려 못 알아듣겠다는 몸짓을 해 보이고는 이내 무관심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그를 관찰했고, 마침내 조작하는 기계가 말을 잘 안 듣자 일본말로 욕을 하는 걸 들었다.
그가 맡은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짜고짜 일본말로 말을 시켰다.
이번에는 그도 반가워했다.
내가 일하는 양장점이 TV에 나올 만큼 유명한가를 그에게 물은 게 잘못이었다.
그들은 특이한 직업을 취재 중이었고, 불란서 여자는 부자들의 수의를 비싼 값으로 잘 만들기로 소문난 여자라고 했다.
내가 가게에 혼자 남아 걸쳐본 야회복은 수의였던 것이다.
나는 그 날로 그 양장점을 그만두었다.
다시는 그렇게 편안한 직업을 못 가지게 되리라는 걸 알고도 더는 그 일을 계속하기가 싫었다.
정말로 그 후로는 그렇게 편안한 직업을 못 가져보았고, 남편이 안정된 직업을 갖기까지 안해본 고생이 없었지만 그 직장을 그만두지 말걸 하는 후회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좀 괜찮은 일자리를 얻을까 해서 그 일본인 직업소개소를 다시 기웃거려보는 짓 따위도 하지 않았다.
마치 홀딱 반해 얼싸안고 정을 나누던 사내의 정체가 실은 해골이었더라는 괴기담 속의 처녀처럼 날로 수척해질지언정 지난날을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직접 송장을 다루는 것도 아니겠다, 그만큼 편안한 일터를 놓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러나 송장에 대한 금기가 워낙 격렬하고 유구한 내 나라의 문화를 극복한다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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