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 만난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아이가 무엇에든 열심이길 바란다. 공부도 그렇고 노는 것도 그렇고 자기가 속해 있는 그룹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를 바란다. 물론 그런 어린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어린이도 있다. 놀라운 것은 객관적으로 보기에 충분히 열심인 어린이의
부모들조차 아이에 대해 불만인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떨까? 아이들도 부모님의 생각처럼 무엇에든 열심히
몰입하고 싶어한다. 공부도 잘하고 싶어하고 놀이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싶어한다. 이런 어린이들의 속성은 이미 4살 경부터
발달한다고 한다. 보울비라는 심리학자는 이 때부터 어린이는 부모님이 원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부모님과 어린이들의
생각은 같은 셈이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표시한다. 어린이들 또한 자신은 노력하지
않으면서 부모님의 잔소리만을 탓한다. 결국 서로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뿐 서로에게 도움이 될만한 실마리를 찾지는 못한다.
원인이 무엇일까?
물
론 서로의 생각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지금 당장 성공적인 학업적 성취나 사회관계적 성취를 보이길 바란다.
물론 부모님은 아이를 위한 희생조차 감수한다. 그러나 어린이의 입장에서는 의식하지는 못할지라도,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마음에서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하고 싶을 것 아니냐고 스스로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부모들은 대부분 용납할 수가 없다.
아이니까 아직 몰라서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결과를 위해 어린이를 몰아부치면 그다음엔 습관이 붙어서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가 만난 아이 중에 A는 오랜 외국 생활을 한 친구다. 6살 때 외국의 유치원을 다녔다. 말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유난히
활동적인 A는 늘상 극성스런 아이로 낙인 찍혀 있었다. A는 주변의 모든 사람이 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고, 본능적으로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3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이제 A는 의사소통이 자유로왔고,
자신을 잘 지키게 되었다. 그곳에서의 생활도 잘 적응하고 있었다. 그럴 즈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말이 서툴렀고 한국
아이들의 정서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아이들로부터 배척당했고, 그는 또 다시 자신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누가 조금만
건드리면 바로 주먹이 나갔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선생님 앞에서도, A는 다른 사람의 말은 일체 듣지 않고 녹음기처럼 "저 아이가
먼저 그랬어요"만 반복했다. 선생님도 부모님도 A를 이해하지 못했다. A는 공부도 못했고, 친구와도 잘 지내지 못했다. 나는
A의 부모에게 무조건적인 수용을 요구했다. 한편으로 A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도록 훈련했다. 물론 폭력적인 방법은 절대
금지했고, 문제가 생기면 교사가 해결해주기로 약속했다. 6개월 후에 그의 부모는 달라진 A를 신기해 했다.
A는 왜 변했을까? 어떻게 대부분의 부모들이 원하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놀기도 열심히 하는 아이로 바뀌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그
는 자기 스스로 바뀌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일은 어떤 것이 그에게 유익한 지 자각시켜준 일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방법보다는 신뢰할 만한 더 좋은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어린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하다.
나는 아이들이 부모님의 바람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듬뿍주고, 옳은 것을 가르쳐주며, 기다려주면 시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방법으로 자녀들을 양육했고, 성공했다.
나의 아이는 누가 만드셨는가? 하나님 아니시던가?
그렇다면 얼마나 잘 만드셨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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