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에이지 운동의 음악들. - 곽용화
뉴에이지 음악에 대한 오해
필자가 제주도에서 뉴에이지 음악에 대한 강의를 할 때의 일이다.
강의에 참석했던 사람들 가운데 일간지 J일보의 K기자가 있었다.
뉴에이지 음악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K기자는 나름대로
어떤 위기 의식을 느꼈는지 다음날 신문에
'뉴에이지 음악, 청소년들의 영혼 오염시킨다' 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그날 오후, 신문이 배포되자 마자 신문사로 항의전화가 빗발같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수많은 항의 전화를 견디지 못한 기자는 당황한 나머지
필자를 찾아왔다.
청소년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음악에 대한 정보를 주려고
그 글을 썼는데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고 실망하는 K기자를 위로하면서
필자는 그 기자를 통해 뉴에이지 음악에 대한 위험성을 제주도민들에게 알리신
하나님의 계획을 느낄 수 있었다.
K기자에게 걸려왔던 항의전화 가운데 대부분은 뉴에이지 음악을
청소년들이 들을 수 있는 건전한 음악으로 추천해야 할 기자가 오히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건전한 음악을 매도한다는 내용이었다.
뉴에이지 음악은 지금 일반적으로 다른 장르의 음악보다 매우 건전한 음악으로
인식되어 있는데 이러한 점은 크리스천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뉴에이지 음악에 대한 강의를 들은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전혀 예상 밖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그저 부담없이 들으면서 사색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음악인 줄로만 알았는데
반기독교적인 음악이고 뉴에이지 운동의 도구로 사용되는 음악인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뉴에이지 음악이 다른 대중음악 장르에 비해 건전하고
좋은 음악으로 추천되고 있는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주제들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뉴에이지 음악에서는 록이나 헤비메탈, 랩 음악 등에서 나타나는
반사회적인 주제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둘째는 비트가 강하지 않은 음악이라는 점이다.
뉴 에이지 음악에서 비트는 아무 의미가 없다.
가끔씩 약한 비트들이 들어 있지만 오히려 비트를 배제한 음악이라는 표현이
더 나을 정도로 부드러운 음악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트가 강한 음악, 특히 요즘 유행 하는 전자기기를 이용한
강한 비트를 사용하는 랩음악이나 댄스음악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준다.
셋째는 기성세대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음악문화를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뉴에이지 음악을 연주하는 곳에서는 청소년들의 비명소리가 없다.
플래카드를 흔들면서 심하면 졸도까지 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연주하는 사람들의 의상도 매우 단순하고 자연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들에게 이상한 옷차림을 입도록 영향을 주지도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음악을 즐기면서 깊은 사색에 빠지도록 만든다
넷째는 자연회귀사상을 담은 노래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데
현대문명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자연의 포근함을 안겨주어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을 찾도록 해준다는 점과
자연보호운동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이렇게 놓고보면 뉴에이지 음악은 전혀 이상이 없는 음악인 것처럼 여겨진다.
적어도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뉴에이지 음악의 건전하고 자연스러운 모습 뒤에 감추어져 있는
영적인 본질을 크리스천들은 볼 수 있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의 경우를 한번 살펴보자.
첫번쌔의 경우에 있어서 비록 비윤리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주제들을
다루지는 않지만 반성경적인 내용을 다룬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음란이나 폭력을 주제로 하지 않는다고 다 좋은 음악은 아니다.
뉴에이지 음악은 이러한 주제들 대신에 반기독교적인 영적 주제들을 다룬다.
지난호에서 다루었듯이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방법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음악이 바로 뉴에이지 음악인 것이다.
두번째로 비트가 강하지 않다는 점도 살펴보자.
이러한 점은 듣는 사람들을 명상으로 유도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인간이 신이라는 의식의 전환을 위한 명상에 빠지도록 만들고
허무주의나 우울증에 빠지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세번째의 경우는 비록 문제가 되는 음악들보다는 건전한 음악문화를
형성하는 것 같지만 육체적인 타락으로 나타나는 시각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음악들 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인 타락으로 빠지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음악이 더 위험한 음악인 것이다.
네번째로 뉴에이지 음악이 다루는 자연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이 아니라
범신론이 바탕이 된 자연이라는 점이다.
자연으로의 회귀는 인간이 신적 본질을 찾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어느 곡에서도 자연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이 되려는 교만한 인간의 욕심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뉴에이지 음악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크리스천들은
영적인 분별력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