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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 시오노 나나미(31)

Joyfule 2010. 7. 3. 08:36
 

   로마인 이야기 - 시오노 나나미(31)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2장 로마 공화정   
이것이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사실을 바탕으로한 진실이라는 증거로, 
우리의 이런 사고 방식으로 구축된 국력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격조높고, 이론이 여지가 없는 정론이다. 
자유주의자의 바이블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2천 500년이 지나 인류는 진보하고 있을 터인데도, 
20세기 말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페리클레스처럼 간결하고 명쾌하며
품위있는 연설을 할 수 있는 지도자를 과연 가지고 있을 까. 
그리스를 시찰하기 위해 저 멀리 로마에서 찾아와,
1년 동안이나 머물렀던 세 명의 로마 인이 본 것은 바로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였다.
흔히 말하는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는 
기원전 460년부터 기원전 430년까지 30년 동안이다. 
후진국 로마의 원로원 의원 세 명이 선진국 그리스를 시찰하기 위해 방문한 것은 
기원 전 453년부터 기원전 452년까지 1년 동안이라고 한다. 
페리클레스 시대 말년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립이 불을 뿜어
'펠레폰네소스 전쟁'으로 돌입하지만, 이것은 기원전 431년의  일이다. 
로마인이 방문했을 때부터 20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다. 
또한 그 무렵부터는 반석 같았던 페리클레스의 권력에도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고, 
페리클레스는 장수를 쏘려면 우선 말을 쏘라는 격언을 실천한 반대파 앞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감옥에 보내지 않기 위해 애원까지 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이것도 로마의 시찰단은 보지 못했다. 
로마의 시찰단은 페리클레스의 정책이 구름 한 점 없는 상태로 
순조롭게 시행되고 있던 시대의 아테네를 보았던 것이다. 
그들이 본 것은 아테네인을 수족처럼 부려서 
자기 생각을 착착 실행에 옮기고 있던 페 리클레스, 
하얗게 빛나는 대리석 신상과도 비슷한 페리클레스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장 매료되어 아테네 민주정치의 신봉자가 되었을테고, 
자기 나라도 반드시 이런 체제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페리클레스의 말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타국인의 '학교'인 
아테네의 생활방식이 낳은 결과는 페르시아조차도 인정할 만큼 
눈부신 번영과 강대한 힘이 되어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는 이 아테네를 모방하지 않았다. 
강대한 아테네도 항상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스파르타를 모방하지도 않았다. 
쇠퇴기에 접어든 나라를 찾아가 거기에 나타난 결함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절정기에 있는 나라를 시찰하고도 
그 나라를 흉내내지 않는 것은 보통 재주가 아니다. 
학생들의 졸업여행이 아니라, 
실무경험도 풍부하고 나이도 지긋한 원로원 의원 세 명이 시 찰한 것이다. 
기원전 5세기 중엽이라는 이 시점에서, 그리스를 시찰한 이들 로마인은 
그 접 촉을 통해 모방이 아닌 또 다른 무언가를 생각한 것이 아닐까.
세 명의 로마인이 그리스에서 1년 동안 머물면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귀국한  뒤에는 무엇을 보고했는지를 전해주는 사료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이 시대의 로마를 누구 보다도 자세히 기록한 리비우스조차도
 "유명한 솔론 법을 필사하고 그리스 국가들의 현황과 법률 및 
그 성립 과정을 조사하기 위해 시찰단이 파견되었다"고 썼을 뿐이다. 
그들이 귀국 한 뒤에 관해서는, 
귀국한 세 사람을 포함한 열 명의 위원이 '12표법'을 만들었다고 적혀 있을 뿐이다. 
어쩌면 세 사람은 자료를 남겼지만 그게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기원전 390 년에 켈트족이 침입했을 때, 
로마는 불바다로 변화여 수많은 사료가 소실되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리스를 시찰한 로마인의 감상을 탐색할 방도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확실한 사료의 뒷받침이 없으면 
다룰 수 없는 학자나 연구자와는 달리, 우리는 아마추어다. 
아 마추어는 자유롭게 추측하고 상상하는 것도 허용된다.
나는 로마가 그리스를 흉내내지 않았다는 것이 
곧 그리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방하지 않았다는 것도 결국 영향을 받은 게 되지 않을까. 
관찰하고 통 찰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시찰하였다면 별문제지만, 
시찰단원으로 선발된 세 사람은 그 전 후의 업적으로 보아도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던 게 분명하다.
자유와 질서의 양립은 인류에게 주어진 영원한 과제의 하나다. 
자유가 없는 곳에는 발전이 없고, 
질서가 없는 곳에서는 그 발전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어느 한쪽을 일으켜 세우면 
다른 한쪽이 일어서지 못하는 이율배반의 관계에 있다. 
이 두 가지 이념을 현실에서 양립시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명제가 되어 왔다. 
아테네와 스파 르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에 해답을 주었다. 
기원전 5세기 중엽이라는 시점에서 이 두 나라를 시찰한 것은 
로마인이 아니더라도 유익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 이 세 로마인의 입장에 섰을 때, 당시의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어떻게 보였을까?
세제는 곧 군제라는 방식을 채택해온 로마인은 
군사대국인 스파르타에 일종의 친근감을 느꼈을 게 분명하다. 
스파르타인이 중요시한 실질강건주의도 이보다 200년 뒤까지 
실질강건 을 모토로 삼은 로마인에게는 공감되는 바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스파르타 사회는 너무나 배타적이었다. 
타국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국내에서도 계급이 고착도어 있는 스파르타 사회는, 
건국 초기부터 다른 부족과 융합하는 것이 예사였던 
로마인에게는 이질적으로 보였을 게 분명하다. 
또한 군사면에서도 스파르타는 군무에만 종사하는 병사 양성을 
지상 목적으로 하는 반면, 로마는 병사가 보통 생활인이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복종 로마에서도  미덕으로 여겨졌지만, 
스파르타처럼 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원칙은 아니었다. 
스파르타인은 사유재산에 집착하는 것을 경멸했지만, 
최초의 로마 법은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생겨났다. 
로마인은 스파르타만큼 자유를 억압하지 않아도 질서를 유지할 수 있고, 
스파 르타만큼 양병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나라를 방위할 수 있다고 믿은 게 아닐까. 
또한 스파르타인의 생활방식은 국방에는 적합하겠지만, 
바로 그렇게 때문에 발전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도 그들은 통찰한 것 같다. 
스파르타에는 질서는 있어도 정신의 자유가 없었다.
반면에 아테네에서는, 페리클레스의 교묘한 정치 덕분이라고는 하지만, 
자유와 질서가 균형있게 양립해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당시 로마는 공화정일 뿐 아니라, 한때의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평민 계급이 현저하게 대두한 상태였다. 
이들의 요구를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성문법을 만들기 위해 
그리스에 파견된 것이 그 세 명의 시찰단이었다. 
기원전 5세기 중엽의 로마는 클레이스테네스 시대의 아테네와 비슷한 상태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아테네식 민주정치로 이행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처지에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로마는 진보적인 로마사 전문가들이 유감스러워하는 바처럼
 "민주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 쳐 버렸다.
이 아테네에 1년 동안이나 체재한 세 명의 로마인은 
페리클레스의 언동을 접하고 그것을 관찰할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