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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차일드가의 가계도 

Joyfule 2011. 12. 23. 09:18

 


 

로스차일드가의 가계도 

 

▲ 메이어 암셸 마이어의 다섯 아들들과 자손들..2010년에 데이비드 로스차일드가
회장자리에 있던 영국 투자은행 'NM 로스차일드&선스'-각국 정부나 왕실,부호들의
돈을 250년동안 은밀하게 관리해서 '비밀의 화원'이라고 불리던 곳에 로스차일드가
의 일원이 아닌, 외부인 니겔 히긴스가 회장으로 추대되면서 화제가 되었었습니다.

 

하지만 니겔 히긴스의 역할은 내부 조직강화 및 관리에 그치고, 실질적 고객관리는
여전히 데이비드 로스차일드가 맡는 형태입니다.그의 아들 알렉산더 로스차일드가
2008년 NM로스차일드에 입사한 상태로 데이비드가 CEO자리를 물려주려고 하자
'시간을 더 달라'며 고사하였고,후계 공백이 생길것을 대비 회장을 지명한것입니다.

 

▲  메이어 암셸 로스차일드 이후 로스차일드(Rothschild) 가문의 전체 가계도

 

현재 로스차일드가(家)의 주요 인물들

 

Philippine Mathilde Camille de Rothschild (1933~)
사토 무통 로스차일드 와인(Château Mouton Rothschild)의 소유주

 

Eric Alain Robert David de Rothschild (1940~)
파리 올리앙스(Paris-Orléans)와 샤토 라피트 로쉴드 와인(Château
Lafite-Rothschild)을 이끌고 있음

 

David René James de Rothschild (1942~)
Rothschilds Continuation Holdings의 회장.

 

Benjamin Edmond Maurice de Rothschild (1963~)
Edmond Rothschild의 아들. Edmond de Rothschild Group의 회장

 

Nathaniel Philip Victor James de Rothschild (1971~)
Jacob Rothschild의 아들.로스차일드가의 후계자, JNR Limited의 회장

 

David Mayer de Rothschild (1978~)
Evelyn Rothschild의 아들.환경단체 Adventure Ecology 설립,환경운동가

 

Alexandre Guy Francesco de Rothschild (1982~)
David Rothschild의 아들.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던 NM로스차일드&선스 근무

 


 

 로스차일드가의 문장(Coat of Arms)

 

로스차일드가(家)의 붉은 방패

 

▲ Rothschild shop ' Two-headed eagle red shield'

1743년 프랑크 푸르트에 골동품 가게를 연 '메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의
아버지가 그의 문앞에 사인으로 걸어 놓았던 붉은 방패(red shield)입니다.
로스차일드가 이후 자신의 성씨에 사용하기도 했던 것으로 붉은 방패에는
'두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 즉,로만 이글이 그 가운데 그려져 있었습니다.

 

머리가 두개 달린 위 독수리는 과거 '비잔틴 제국'의 상징으로 사용되었고
오늘날 이것은 러시아의 국가 문장(Coat of Arms)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 Double Headed Eagle Byzantine Empire Coat Of Arms
'비잔틴 제국'이 사용했던 두개의 머리가 달린 독수리 문장

 

▲ Russian Coat of Arms
현재 러시아의 국가 문장으로 사용되는 모습

 

▲ emblem for Scottish Rite Freemasonry
Scottish Rite 프리메이슨 엠블럼으로 사용되는 그림


로스차일드가의 문장(Coat of Arms)

 

 

▲ Rothschild Coat of Arms

로스차일드가의 공식 문장(Coat of Arms)입니다.
좌우에 사자와 유니콘이 방패를 들고 있고 맨 위쪽에는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있습니다.방패의 화살을 손에 쥐고 있는 한쪽 팔이 대각선의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고 중앙에는 작은 방패가 또한 그려져 있습니다.

 

▲ Prince Charles Coat of Arms

위 그림은 영국 찰스 황태자의 공식 문장입니다. 방패,투구,투구장식
투구 깃, 모토가 쓰여진 리본등 모든 장식이 갖춰진 문장 형태입니다.
방패 그림의 좌우에는, 왕관을 쓴 사자와 유니콘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중앙 방패와 사자와 유니콘의 목에는 3개의 짧은 리본을 가로
줄 아래에 늘어뜨린 흰 리본들이 있습니다.그리고 사자의 발아래에는
'타조깃털 3개'가 유니콘의 발 아래에는 '붉은 용'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맨 아래 리본에 적혀 있는 글자는"'Ich Dien"인데, 독일어로
그 의미는 "I Serve"입니다.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검은 방패에 안에
금빛의 15개의 동전이 있는 문장은 콘월 공작의 문장입니다.

 

▲ Queen Elizabeth II Coat of Arms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문장입니다.영국 찰스 황태자의 문장과
거의 비슷합니다.중앙에 방패를 둘러싼 벨트에는 가터 훈장의 내용이
쓰여있습니다.'Hon Y Soit Qui Mal Y Pense'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 의미는 프랑스어로 '악(惡)을 생각하는 자에게 수치를'이라는 뜻으로
에드워드 3세가 창시하여 가터 기사단에 수여했던 훈장의 내용입니다.
훈장수여는 가터기사단(Kights of the Garter)의 일원이 된다는 것인데,
실제 훈장엔 블루 벨벳리본에 금실로 위의 문자가 수놓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맨 아래의 리본에 적힌 글자는 "Dieu et Mon Droit"입니다.
역시 프랑스어인데 그 뜻은 "신과 나의 권리" 입니다.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

 

▲ Coat of Arms of The City of London

 

영국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의 공식 문장입니다.
방패, 투구, 투구장식, 투구 깃, 모토가 쓰여진 리본등의 모든 장식들이
갖춰진 완전문장 형태입니다.방패 양쪽에는 용 두 마리가 있고 가운데
레드 크로스(red crosses)가 그려진 방패를 함께 들고 있습니다.

 

맨 아래 리본에 쓰여진 글자는 라틴어로 'Domine dirige nos'입니다.
그 뜻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신이여, 우리를 인도하소서' 란 내용입니다.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은 런던 내에 있는 금융중심지를 말합니다.
잉글랜드 은행을 비롯해 많은 금융기관이 밀집해 했으며 자본시장, 상품시장,
보험시장 등이 모두 집중되어 있습니다. 1.12 제곱마일(2.90 ㎢) 정도의 좁은
지역으로 런던타워~성바오로 성당까지,테임즈강~ 런던 월까지 지역입니다.

 

뉴욕의 월가와 함께 시티 오브 런던은 '세계금융의 중심지'입니다.중앙은행인
영국은행과 증권거래소,왕립어음교환소등을 포함, 각국의 금융회사 본사들과
지사가 밀집되어 있습니다.약 1평방 마일 면적으로 스퀘어마일로도 불립니다.


 ▲ Coat of Arms of The City of London

실제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의 공식 문장이 부착되어
거리 곳곳에서 사용되고 있는 사진으로, 측면에서 본 모습입니다.


▲ Coat of Arms of The City of London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의 공식 문장을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많은 건물에서 문장을 볼수 있습니다.가운데 방패 안에 있는
흰 바탕에 레드 크로스는 시티 오브 런던의 'flag' 모양이기도 합니다. 


로스차일드가(家) 다섯개의 화살

 

▲ 역시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장(紋章).

다섯 개의 화살은 이후 유럽 각지로 흩어져 은행을 차린,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의 다섯 아들을 의미합니다. 화살을 한 데 묶은 것은 '함께
뭉치면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 Edmond de Rothschild Group Logo enlargement
   현재 Edmond 로스차일드 그룹의 로고를 확대한 모습 

 

▲ LCF Rothschild Group insignia.

LCF 로스차일드 그룹 휘장.LCF 로스차일드 그룹은 1953년 프랑스 로스차일드
'Edmond de Rothschild'가 세운 회사로 주로 PB부분을 담당하는 뱅킹 그룹으로 본사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고, 프랑스 파리,룩셈부르크에도 위치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회사명을 'Edmond de Rothschild Group'로 바뀌었습니다.

 

 

로스차일드가와 워털루 전쟁 그리고 화폐발행권

 

 

<실제 '화폐전쟁' 책 내용 中 에서 부분 발췌>


워털루전투와 로스차일드 가

 

네이선 로스차일드(Nathan Rothschild)는 로스차일드의 셋째 아들로, 다섯 형제 가운데 식견과 담력이 가장 뛰어났다. 1798년, 그는 아버지로부터 프랑크푸르트에서 영국으로 건너가 로스차일드 가의 은행 업무를 개척하라는 명을 받는다.

 

네이선은 학식이 깊고 성격이 과감한 은행가였는데, 그의 내면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금융에 천부적 소질을 갖춘 네이선은 1815년 신출귀몰한 수단으로 런던에서 손꼽히는 은행의 거두로 성장한다.

 

네이선의 큰형 암셀 로스차일드는 프랑크푸르트에 로스차일드은행 본점을 창립했다.
로스차일드의 둘째 아들 살로몬은 오스트리아 빈에 지점을 세웠고, 넷째 아들 칼은 이탈리아 나폴리에, 다섯째 아들 제임스는 프랑스 파리에 지점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로스차일드 가문이 세운 은행은 세계 최초의 국제은행 그룹이 되었다.

 

다섯 형제는 1815년 유럽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이때 유럽에서는 대륙의 운명을 결정할 워털루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만약 나폴레옹이 최후의 승리를 거머쥔다면 프랑스는 의심할 바 없이 유럽의 주인이 되고, 웰링턴 장군이 프랑스군을 무찌르면 영국이 유럽의 형세를 주도할 것이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로스차일드 가는 멀리 내다보는 눈으로 필요한 전략 정보를 수집할 정보망을 구축해놓았다. 이 방대한 비밀 정보망은 산업 스파이들로 구성되었다.

 

유럽 각 나라의 수도와 주요 도시뿐 아니라 중요한 교역과 상업 요지에 파견된 그들은
갖가지 상업과 정치 정보를 수집해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트, 빈, 나폴리를 오가며 전달했다. 이 정보망은 효율과 속도 및 정확성에서 웬만한 정부의 정보 조직보다 훨씬 뛰어났고, 다른 상업적 경쟁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로스차일드은행은 거의 모든 국제 경쟁에서 뚜렷한 우위를 선점하게 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마차와 배가 유럽 각지와 해협을 누볐으며, 거리마다 로스차일드은행의 스파이들이 배치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는 어마어마한 현금과 채권, 정보를 주무르는 금융가의 큰손으로 군림했다.

 

그들이 독점한 최신 정보는 순식간에 증권시장과 상품시장으로 전파되었다.
당시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단연 워털루전투의 결과였다.
 
1815년 6월 18일, 벨기에 브뤼셀 근교에서 전개된 워털루전투는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과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국가의 운명을 걸고 벌이는 한 판 승부였다. 또한
수많은 투자자가 거액을 놓고 벌이는 도박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 도박에서 이기면 천문학적인 돈을 움켜쥐지만, 지는 날에는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이 전쟁의 결과를 궁금해했다.
런던 증권거래소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모두가 초조하게 워털루전투의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영국이 패할 경우 영국의 국채(consols) 가격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승리한다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터였다. 전쟁이 한창일 무렵 로스차일드의 스파이들은 양측 군대 내부에서 최대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느라 민첩하게 움직였다. 이들 중에는 최신의 전황을 가까운 로스차일드 중계 지점으로 전달하는 사람도 있었다.

 

저녁이 되어 나폴레옹의 패색이 짙어지자, 로스차일드 측의 정보 전달원은 즉시 브뤼셀로 말을 달려 오스탕드 항에서 배로 갈아탔다. 그가 특별 통행증이 있는 로스차일드 가의 쾌속선에 뛰어올랐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이때 영국해협은 풍랑이 무척 거셌다.

 

2,000프랑의 비용을 치르고서야 위험을 무릅쓰고 해협을 건네주겠다는 선원을 찾을 수 있었다. 정보 전달원이 6월 19일 새벽 영국 포크스턴의 해변에 도착했을 때,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직접 부두까지 나와 맞아주었다. 네이선은 급히 편지 봉투를 뜯고 제목만 대충 훑어보고 나서 즉시 런던의 주식거래소로 달려갔다.

 

네이선이 빠른 걸음으로 주식거래소로 들어서자 초조하게 전쟁의 결과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숨을 죽였다. 모든 사람의 눈은 네이선의 무심한 듯 전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을 주시했다. 네이선은 갑자기 걸음을 늦춰 ‘로스차일드의 기둥’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석고상처럼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거래소를 가득 메우던 소란스러움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모두가 네이선의 눈초리에서 뭔가 읽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윽고 네이선이 주변에 있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거래원들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거래원들은 묵묵히 거래 창구로 가서 조용히 영국의 국채를 팔아 치우기 시작했다.

 

홀 안은 술렁거렸다.귓속말로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쩔 줄 몰라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는 사람도 있었다. 수십만 달러어치의 영국 국채가 맹렬한 기세로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국채 가격은 눈깜짝할 새 바닥으로 뚝 떨어졌고,
이에 자극을 받은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국채를 팔아댔다.
그때까지도 네이선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자기 자리에 기대어 있었다.

이때 누군가 외쳤다.


“로스차일드가 알아냈다! 웰링턴이 전쟁에서 패했다!”

 

이 소리에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놀란 사람들은 앞다투어 투매에 나섰다.
투매 열기는 순식간에 사람들을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다. 모두가 따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값도 안 나가는 영국 국채를 당장 팔아야 조금이라도 손해를 덜 볼 것 같았다.
몇 시간에 걸친 투매 광풍이 휩쓸고 지난 후 영국 국채는 액면가의 5%도 안 되는 휴지 조각으로 변해 있었다.

 

네이선은 이 모든 과정을 시종일관 태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눈빛이 한 번 번뜩였다. 오랫동안 훈련받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신호였다. 거래요원들이 이번에는 영국
국채를 닥치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6월 21일 밤 11시, 웰링턴 장군의 특사 헨리 퍼시(Henry Percy)가 런던에 당도했다.
그리고 나폴레옹 대군이 여덟 시간의 고전 끝에 무려 3분의 1의 병력을 잃고 무참히 패배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프랑스는 이제 끝장난 것이다!

 

이 소식이 런던에 도착한 시간은 네이선의 정보보다 무려 하루나 늦은 후였다.
그 하루 동안 네이선은 20배나 되는 차익을 챙겼다. 나폴레옹과 웰링턴이 전쟁으로
얻은 재산을 합친 금액보다 훨씬 많았다.

 

워털루전투로 네이선은 영국 정부 최고의 채권자로 등극했으며, 그때부터 공채 발행을 주도하고 잉글랜드은행(Bank of England)의 실권을 장악했다. 영국 국채는 정부가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근거다.

 

이제 영국인들은 그동안 정부에 내던 세금을 로스차일드은행에 내야 했다.

이 같은 징수 형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영국 정부는 국채를 발행해서 재정 지출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한다. 다시 말해서 영국 정부는 화폐 발행 권한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민간은행에서 돈을 빌려 쓰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8%의 이자를 내야 했다. 원금과 이자는 모두 금화로 계산했다.

네이선이 영국 국채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는 것은 국채 가격이나 영국 전체의 통화 공급량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의미다. 이제 영국의 경제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손아귀 안에 들어와 있었다.야심가 네이선이 오만한 대영제국을 보기 좋게 정복한 것이다.
 
"나는 해가 지니 않는 잉글랜드제국을 통치하는 왕이 누군지 상관하지 않는다.
대영제국의 통화 공급을 통제하는 사람이 곧 대영제국의 통치자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나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등장한 시대 배경

 

"수표나 신용화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극소수의 사람은 그 시스템이 형성하는
이윤에 큰 관심을 두거나, 그 시혜자인 정치가와 결탁해 자기편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 시스템으로 파생되는 자본이 가져오는 거대한 이익에 대해 알
도리가 없다. 그들은 압박을 받으면서도 전혀 불만을 품지 않는다.
심지어 이 시스템이 자신의 이익을 해치지 않을까 의심하지도 않는다."

-로스차일드 형제 1863년
 
로스차일드는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불길처럼 퍼지고 금융업이 전에 없이 번성하던 시대에 성장했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금융의 실체와 개념이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유럽
전역으로 퍼져갔다. 새로운 금전의 실체와 개념은 1694년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되면서
모험 정신이 충만한 은행가들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했다.

 

17세기 전반에 걸쳐 금전의 개념과 형식에는 커다란 변화가 발생했다. 1694~1776년에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선보인 것을 계기로 은행이 발행하는 지폐가 유통 중인 금속화폐의 총액을 사상 처음으로 넘어섰다. 산업혁명은 철도, 광산, 조선, 기게, 방직, 방위산업, 에너지 등 신흥 업종에 거대한 융자 수요를 창출했다.

 

그 규모는 금이나 귀금속을 전문으로 다루던 장인들로부터 시작된 골드스미스 은행사(Goldsmith Banker)의 해묵은 저효율과 극히 제한된 융자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로스차일드 가문을 비롯한 신흥 은행가들은 이렇게 중요한 기회를 포착해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현대 금융업의 역사적 흐름을 주도했다.

 

사람들의 운명은 어쩔 수 없이, 또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제도에 의해 결정되었다.1625년 이후 두 차례에 걸친 내전과 정국의 혼란으로 영국의 국고는 바닥이 난 상태였다. 1689년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결혼한 윌리엄 1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가장 심각했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전쟁까지 치르느라 윌리엄 1세가 이끄는 영국 정부는 기진맥진해 있었다. 이때 윌리엄 패터슨(William Paterson)을 비롯한 은행가들은 네덜란드에서 배워온 새로운 개념을 소개했다. 즉 민영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을 설립해 국왕의 방대한 지출을 위한 융자를 시행하자는 것이었다.

이 민영은행이 정부에 제공한 120만 파운드의 현금은 정부의 ‘영구적 채무(perpetual loan)’가 되었다. 금리는 연 8%에 4,000파운드의 관리비를 책정했다. 이렇게 하면 정부는 매년 10만 파운드만 내고 그 자리에서 120만 파운드의 현금을 쓸 수 있었으며, 원금을 영원히 갚지 않아도 되었다.

 

정부는 물론 더 많은 ‘특혜’를 제공해서 잉글랜드은행이 국가가 승인한 은행권을 독자적으로 발행할 수 있게 했다.그동안 골드스미스 은행가에게 가장 유리한 부분은 은행권 발행에 있었다. 은행권은 골드스미스은행에 금화를 보관했다는 영수증이었다.

 

많은 양의 금화를 휴대하기가 매우 불편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금화 보관증으로 거래를 하고, 골드스미스은행에서 이 보관증을 금화로 바꿨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굳이 은행에 가서 금화로 바꾸는 대신 보관증을 화폐로 삼아 사용하기 시작했다.

 

머리 회전이 빠른 골드스미스 은행가들은 매일 금화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눈여겨보다가, 실제의 금보다 많은 보관증을 발행해 은밀히 대출을 해주고
이자를 챙겼다. 대출받은 사람이 원금과 이자를 갚고 나면 차용증을 회수해 폐기해버림으로써 아무 일 없는 양 시치미를 뗐다.

 

그러나 이자는 그들의 호주머니에 이미 들어온 후였다. 골드스미스은행의 금 보관증은 유동 범위가 점차 넓어지고 받아주는 곳이 많아지면서 이윤도 점점 커졌다. 잉글랜드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의 유통 범위는 다른 은행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국가가 인정한 이 은행권이 곧 국가의 화폐였다.

 

잉글랜드은행은 주식을 공모하기 시작했다. 2,000파운드 이상을 구매한 사람은 잉글랜드은행의 이사 자격을 부여받았다. 공모를 통해 1,330명이 잉글랜드은행의 주주가 되었고, 14명은 은행 이사가 되었다. 여기에는 윌리엄 패터슨도 끼어 있었다.

1694년에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은행에 왕실 특별허가증(Royal Charter)을 내주었고, 최초의 현대적 은행은 이렇게 탄생했다.잉글랜드은행의 핵심은 국왕과 왕실 가족의 개인 채무를 국가의 영구적 채무로 변환하는 것이었다. 전 국민의 세금을 담보로 잉글랜드은행이 채무에 기반을 둔 국가화폐를 발행했다.

 

이렇게 해서 국왕은 전쟁에 필요한 돈을 확보했으며, 정부도 뜻대로 정책을 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은행가들은 그동안 꿈꿔오던 거액의 대출을 해주고 짭짤한 이자 수입을
챙기게 되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이었다.

 

다만 국민의 세금을 담보로 했다는 점이 옥에 티였다. 이렇게 강력한 새로운 금융 수단이 생기면서 영국 정부의 적자는 수직으로 상승했다. 1670~1685년에 영국 정부의 재정 수입은 2,480만 파운드였고, 1685~1700년의 정부 수입은 두 배 넘게 증가한 5,570만 파운드였다.

 

그런데 같은 기간 영국 정부가 잉글랜드은행에서 대출한 액수는 17배나 급증해 80만
파운드에서 1,380만 파운드가 되었다.아이러니적 국채를 묶어놓는하게도 이 제도는 국가화폐의 발행과 영구 구조였다. 그래서 화폐를 신규 발행하면 국채가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국채를 상환하면 국가의 화폐를 폐기하는 셈이 되므로 시중에 유통할 화폐가 없게 된다. 따라서 정부는 영원히 채무를 상환할 수 없다. 이자를 갚고 경제도 발전시켜야 하므로 화폐 수요는 필연적으로 늘어날 테고, 그 돈은 다시 은행에서 빌려와야 했기 때문에 국채는 계속해서 불어날 수밖에 없다.

 

이 채무에 대한 이자 수입은 고스란히 은행가의 지갑으로 들어갔으며, 이자는 국민의 세금으로 부담해야 했다.과연 영국 정부는 그때부터 다시는 채무를 갚지 않았다. 2005년 말 현재, 영국 정부의 채무는 1694년의 120만 파운드에서 5,259억 파운드로 늘어나 영국 GDP의 42.8%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토록 거액의 돈을 위해서라면, 국왕이나 대통령이라도
민영화한 국립은행의 길을 막는 사람은 제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네이선 로스차일드, 런던 금융시티를 장악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세계 금융시장을 주도하면서 다른 분야도 거의 장악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남부 지역 전체의 재정 수입을 담보로 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유럽 모든 국가의 국왕과 정부 각료가 이들의 영향력 안에 있었다.

 

-벤저민 디즈레일리. 영국 수상. 1844년
 
런던 금융시티는 그레이터 런던 지역 중심에 있는 약 2.6제곱 킬로미터 면적의 지역이다. 18세기 이래 줄곧 영국 및 세계의 금융 중심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곳은 독립적인 사법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바티칸공화국과 유사한 ‘국가 속의 국가’라 할 수 있다.

비좁은 이 지역에는 잉글랜드은행 본점을 포함한 세계의 주요 금융기관들이 운집해 있으며, 현재 영국 GDP의 6분의 1을 창출한다. 이러한 런던 금융시티를 주도하는 사람은 영국을 주도하는 셈이다.

 

네이선이 영국에 도착할 무렵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대치하면서 양국의 무역이 단절된 상태였으므로 영국 상품이 유럽에서 비싸게 팔렸다. 네이선은 프랑스에 있는 동생
제임스와 손을 잡고 화물을 영국에서 프랑스로 되팔아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그 후 네이선은 영국 재무부 관리 존 해리스로부터 영국군이 스페인에서 곤경에 처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은 프랑스로 진격할 준비를 끝낸 상태였으나, 유일한 문제는 군비 부족이었다. 물론 영국 정부의 담보가 있었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 은행은 웰링턴이 내미는 은행권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장군의 군대에는 금이 절실하게 필요했다.상황을 지켜보던 네이선은 큰돈을 벌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방으로 금을 알아보았다. 때마침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실어온 금을 팔려고 했다. 영국 정부도 이를 구매하려 했으나, 금 가격이 너무 비싸 내리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네이선은 윌리엄 왕자의 현금 300만 달러와 영국과의 밀수로 벌어들인
거액을 들여 동인도회사에서 80만 파운드의 금을 사들였다. 그러자 금 가격이 순식간에 치솟았다. 금 가격은 내릴 기미도 안 보이는데 군대에서는 화급을 다투는지라 영국 정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네이선에게 비싼 가격에 황금을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거래로 네이선의 금고는 더욱 두둑해졌다.
네이선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음 행동에 나섰다. 자신이 판 황금을 웰링턴 장군의 군대로 직접 호송하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삼엄한 경계로 영국을 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송 길에는 큰 위험이 따랐다.

 

영국 정부는 비싼 값을 치르고라도 황금을 옮기기를 원했다. 네이선은 겨우 열아홉 살
난 동생 제임스를 시켜 황금을 프랑스로 운반하겠다는 사실을 프랑스 정부에 통지했다. 영국 정부가 알면 난리가 날 일이었다. 자칫해서 프랑스로 금이 흘러 들어가면 영국의 재정은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정부가 경찰을 보내 호송대 보호까지 자청할 정도였다. 내로라하는 프랑스 관리들도 뇌물을 받고 모르는 척 눈감아주었다.

 

네이선 일행이 운반하는 황금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 정부의 지원을 받아 당당하게
프랑스의 은행에 도착했다. 그는 프랑스 정부의 환영 만찬에 참석하는 한편으로 황금을 웰링턴 장군이 쓸 수 있도록 은밀히 보내 금화로 환전했다.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로스차일드의 운반 통로를 통해 스페인의 영국군 수중에 전달했다.

 

그 수법이 얼마나 치밀했던지 할리우드 영화 뺨칠 정도였다.

 

프로이센에 주재하는 한 영국 외교관은 이렇게 말했다. “런던 금융사무에 대한 로스차일드의 입김은 놀랄 만큼 세다. 그들은 런던 금융시티의 외환 거래 가격을 완전히 쥐고 흔든다. 은행가인 그들의 권력은 상상 이상이어서 네이선이 화가 나면 잉글랜드은행도 벌벌 떨 정도다.”

어느 날 네이선이 형 암셀이 경영하는 프랑크푸르트의 로스차일드은행에서 발행한 수표를 잉글랜드은행에 제시하고 현금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는데, 잉글랜드은행은 자기 은행 수표만 환전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를 괘씸히 여긴 네이선은 이튿날 아침 일찍 아홉 명의 은행 직원을 대동하고 잉글랜드은행으로 갔다.

 

그리고 이 은행이 발행한 수표를 제시하고 현금을 요구했다. 그 결과, 단 하루 만에 잉글랜드은행의 금 보유액이 반으로 줄어버렸다. 네이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튿날
더 많은 수표를 가지고 갔다. 걱정이 된 잉글랜드은행의 고위급 책임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앞으로 며칠이나 더 수표를 교환하러 오실 겁니까?” 네이선이 차갑게 대답했다. “잉글랜드은행이 내 수표를 거절했는데, 내가 당신네들 수표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소?” 그의 말에 놀란 잉글랜드은행은 즉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공손한 태도로 네이선의 앞에 선 고위급 책임자는 앞으로 로스차일드은행의 모든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주는 것은 물론이고 이 일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겠다고 알렸다.

 

네이선은 워털루전투를 통해 런던 금융시티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영국의 경제 명맥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이때부터 화폐 발행과 황금 가격을 포함한 중요한 결정권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로스차일드 금융제국
 
너희 형제들이 단결하기만 하면 세상의 어떤 은행도 너희와 경쟁이 안되며, 너희를 해치거나 너희로부터 이익을 취할 수도 없을 것이다. 너희가 함께 있으면 세상의 어떤 은행보다 큰 위력을 거머쥐게 될 것이다.

-데이비슨이 네이선에게 보낸 편지에서. 1814년 6월 24일
 
M.A. 로스차일드는 1812년 세상을 떠나기 전 다음과 같이 엄격한 유언을 남겼다.
 
1. 가문 은행의 모든 요직은 반드시 가문 내부에서 맡아야 하며,
외부인을 써서는 안 된다. 가족  가운데 남자만이 상업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2. 사촌끼리 결혼함으로써 재산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는다
(이 규정은 초기에는 엄격히 지켜졌으나, 나중에 완화되어 다른 유대인 은행가 집안과의 통혼까지로 범위가 확대됨).

 

3. 재산 상황을 절대로 외부에 공개해서는 안 된다.

 

4. 재산 상속 시 변호사의 개입을 절대 금지한다.

 

5. 집안의 모든 장자는 각 집안의 우두머리이며, 가족이 만장일치로 동의할 경우에만 차남을 후계자로 할 수 있다.

이 유서의 내용을 위반하는 자는 재산 상속권 일체를 박탈당한다.
 
중국에는 “형제가 마음을 합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자른다.”라는 속담이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가족 내부의 통혼을 통해 재산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100여 년 세월 동안 가족 내부의 통혼이 18건이었으며, 그중 16건은 사촌 남매간의 결혼이었다.

 

1850년을 전후해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총 60억 달러의 재산을 축적했으리라 짐작된다. 수익률을 6%로 계산하면, 15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이들 가족의 자산은 최소한 50조 달러 이상으로 추정된다.

가족의 엄격한 통제, 은밀한 물밑 작업, 기계처럼 정확한 협조, 빠른 시장 정보 수집
능력, 냉철한 이성, 금권에 대한 끝없는 욕망, 그리고 이 모든 것에 기반을 둔 금전과 재산에 대한 깊은 통찰과 천재적인 예지 능력 등이 로스차일드 가가 200년 동안 전 세계의 금융 및 정치와 전쟁의 냉혹한 소용돌이 속에서 활약하며 인류 역사상 가장 방대한 금융제국을 세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20세기 초까지 로스차일드 가문이 통제한 재산은 당시 세계 총 재산의 절반 정도로 추정된다.

 

로스차일드은행은 유럽의 주요 도시에 분포하고 있다. 그들은 치밀한 정보 수집 및 전달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데, 심지어 유럽 국가의 왕실과 귀족들도 때로 그들의 정보망을 이용할 정도였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국제 금융 청산 시스템을 처음으로 설립해 전 세계 황금시장을 통제하는 데 이용했다.

그들은 가족 은행 체계 중 처음으로 실물 황금을 운반할 필요가 없는 계정 청산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 세상에서 로스차일드 가문만큼 황금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런던 황금 정가 시스템에서 물러나겠다고 선포한 2004년, 그들은 장차 세계적으로 전례 없는 금융위기의 중심에서 슬며시 벗어나면서 자신들과 황금 가격의 관계를 떼어놓고 있었다

 

빚더미에 앉은 달러 경제와 사방에 위기가 도사린 세계의 법정화폐 체계나 외환보유
체계는 한바탕 청산의 폭풍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얼마 안 되는 황금을 보유한 아시아 국가들이 몇 년 동안 축적한 재산은 미래의 승리자에게 ‘재분배’될 것이다.

 

헤지펀드는 재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다만, 이번 대상은 파운드화나 아시아 통화가 아니라 세계경제의 기둥인 달러가 될 것이다.은행가의 입장에서 볼 때 전쟁은 큰 호재다. 평화 시기에는 감가상각이 느리게 진행되던 각종 고가의 시설과 물품이 전쟁 때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기 마련이다.

 

전쟁의 당사자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싸움에서 이기려고 하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긴 쪽 정부든 진 쪽 정부든 은행 채무라는 함정에 빠져들고 만다. 잉글랜드은행의 설립 때부터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121년 동안(1694~1815년) 영국은 56년을 전쟁 가운데 보냈으며, 나머지 시간의 절반은 전쟁 준비에 할애했다.

 

전쟁을 책동하고 그 자금을 대는 것은 은행가의 이익에 들어맞는다. 로스차일드 가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혁명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거의 모든 근대 전쟁의 배후에는 그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현재 주요 서방 선진국의 최대 채권자다.
M.A. 로스차일드의 부인 구틀 슈내퍼는 세상을 뜨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들이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면, 전쟁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도 없어질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유럽의 주요 공업국가의 화폐 발행 권리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수중에 떨어짐으로써 신성한 군주의 권리가 ‘신성한 금권’으로 대체되었다. 이때 대서양 저쪽에서 번영을 구가하는 아메리카 대륙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