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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은 철저한‘헌법의 수호자’ 4.

Joyfule 2007. 3. 19. 02:27

링컨은 철저한‘헌법의 수호자’

 

 

사가(史家)들은 이 명제에 관하여 지난 140년간 논쟁을 많이 해왔다.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한 예로서, 링컨이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대표적인 영미 관습법인 하베아스 코르푸스(habeas corpus·신병인도법:영장 없이 시민을 체포구금할 수 없다는 법)를 유보시킨 일은 유명하다.

▲ 버지니아주 리스버그에서 1861년 7월 남북전쟁 당시를 재연하는 모습.
1861년 4월 12일, 남부연합의 반란군이 연방 소유인 섬터 요새를 포격함으로써 미국은 전쟁에 돌입한다. 수도 워싱턴DC는 남쪽에는 버지니아주, 북쪽에는 메릴랜드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버지니아에는 반란세력의 수도인 리치먼드가 있고, 메릴랜드도 노예제도가 인정되고 반란세력이 득시글거리는 소위 접경주였다. 그래서 메릴랜드가 연방에서 이탈하게 되면 워싱턴DC는 반란세력에 둘러싸여 북부와 차단될 위기에 처했다.

메릴랜드 주의회가 소집돼 연방 이탈을 결의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링컨은 지체 없이 “메릴랜드주의 반란세력 용의자를 몽땅 영장 없이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대법원장이었던 로저 B 터니가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했다”고 지적하자 링컨은 “대법원장도 가두어 버리겠다”고 을러댔다.

국무장관 윌리엄 H 수워드가 깜짝 놀라서 “우리 대통령, 참 대단하시다! 어쩔 작정이냐”고 묻자 링컨은 “이 보세요, 국무장관님! 이 세상에서 제일 지고(至高)의 법은 개인이나 국가나 생존법입니다. 나라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마당에서 그까짓 신병인도법이 무슨 소용입니까!”라고 일축해 버렸다.


남북전쟁의 4년 동안 링컨은 단 한 번도 남부연맹의 행정수반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링컨은 남부 반란세력이 연방에서 떨어져 나가 만든 미 연맹(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한번도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연방의 법이 반란 주에 미치지 못한 것이지, 남부연맹이 나라는 무슨 나라냐!”고 링컨은 생각했다.

▲ 스프링 필드 잭슨 가의 링컨하우스. 링컨은 1844년 5월 이집으로 이사왔다.(왼쪽)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4명의 얼굴이 조각된 사우스다코타 주 러시모어산. 왼쪽부터 조지 워싱턴,토머스 제퍼슨,시어도어 루스벨트,에이브러햄 링컨.(오른쪽)

링컨은 나라를 지키고 노예들을 해방시킴으로써 미국을 미래로 전진시켰다. 그는 이렇게 미국의 ‘진보적 혁명’에 성공했지만 오히려 역사가들은 링컨을 보수주의 정치인으로 정의하고 있다. 영어로 진보는 progressive, 즉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보수란 영어로 conservative이다. 신중하고, 검증된 가치를 따르고, 손발을 움직여 노력하는 것이 바로 보수이다. 링컨 연구가이자 프린스턴 대학에서 미국 역사를 가르치는 제임스 맥피어슨 석좌교수가 역사가들의 링컨관(觀)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시카고의 링컨 관련 행사 포스터.

“한 세대 전, 당시 링컨 연구에서 가장 선두에 위치했던 제임스 G 랜달 교수는 ‘제16대 대통령은 국가가 직면한 근본적 명제, 즉 연방과 노예제도에 관해서 보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랜달 교수에 의하면 만일 보수란 말의 정의를 ‘조심성’ ‘이미 실험이 끝난 가치에 대한 분별 있는 수용’ ‘성급하게 새로운 것을 추종하지 않는 것’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발전을 좇는 것’ 등으로 해석한다면 링컨은 분명히 보수적이었다.”


랜달 교수는 링컨이 보수적이었다는 예로, 링컨의 노예문제에 관한 해결방안을 들었다. 링컨은 노예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몇 세대에 걸쳐서라도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 해방을 주장했다. 링컨은 구체적으로 노예 소유주에게 변상을 해주고 해방된 노예들은 외지에 소개이민으로 내보내 정착시켜서 연방 내의 인종적 갈등이나 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하는 쪽을 생각했다. 링컨은 “극단적 정책을 피하고 중간적 입지를 선호하며 협상을 통한, 그리고 상호양보의 정신에 입각해서 목적을 달성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랜달 교수의 결론에 의하면 링컨은 혁명(revolution)이 아니라 진화(evolution)를 믿었다. 그는 “(링컨은) 파종을 하고 가꾸어서 수확하는 것을 믿었지, 뿌리를 뽑아 파괴하는 식의 해결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후 많은 역사가들은 랜달 교수의 이런 해석에 공감해 왔다. 대표적인 예를 둘만 들어보자. 해리 윌리엄스 교수는 “링컨은 대부분의 문제에서와 같이 노예문제에 관해서도 보수적이었다”고 말했고 놀먼 그래브너 교수는 ‘에이브러햄 링컨: 보수적 정치가’란 논문에서 “링컨은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황을 억지로 바꿔 가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보수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링컨이 가장 위대했던 점은 과연 무엇인가? 몇 마디로 쉽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링컨이 천성적으로 숙명론자이고 수동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1864년 4월, 켄터키 출신의 동향 친구 앨버트 G 호지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수동적 천성을 자인했다. “내가 이제까지 일어난 일들을 조종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반대로, 이제까지 일어난 일들이 저를 조종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링컨’의 저자인 하버드대 역사학부 명예교수 데이비드 허버트 도널드는 링컨의 숙명론이랄 수 있는 초절주의(超絶主義·transcendentalism)에서 링컨의 가장 존경할 만한 장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연민, 아량, 남의 잘못을 덮어주는 관용, 유연성 등이 바로 그것이다. 남북전쟁 중 링컨의 좌우명은 “무정책이 나의 정책”이란 것이었다.


링컨은 과감한 기획을 세워서 남보다 훨씬 앞장서 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응하여 또는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처하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링컨은 그 누구도 감당하기 힘들었던 남북전쟁을 해낼 수 있었고 부러지지 않고 성공한 것이다. 링컨을 간단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의 위대한 점을 하나만 짚으라면 바로 이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