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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Joyfule 2018. 7. 14. 13:26

 먼저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가 하나님의 일꾼이나 되는 양

살기 등등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많이 핍박하였습니다.

 

사도행전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날뛰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자기를 죽이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나는 날마다 죽노라"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예수님이 살아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성도님이 계십니다.

그의 사무실은 수많은 차량들이 신호를 받기 위해 대기하는 지점에 있었는데 그쪽 면에 통유리가 크게 있었습니다. 거기에 회사 홍보문구나 전화번호를 넣으면 참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 자리를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사도행전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 성경구절을 통유리 전체에 새겨넣었습니다.

그 곳을 지나는 차량들은 무조건 그 성경구절을 읽을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눈에 크게 띄었습니다.  

아마 그 자리를 회사 홍보에 사용했다면,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었을텐데도

그는 예수님께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귀한 자리를 내어 드린 것입니다.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우리는 입으로는

"예수님은 저의 주인이 되십니다" 라고 매일 고백합니다만,

우리의 가장 중요한 것 앞에 섰을 땐 예수님은 그 자리에 있지 않는다는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우리 구주가 되신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생각도,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가진 모든 것도 다 내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드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 앞에 어깨에 힘을 주고 나타났습니다.

그는 율법을 잘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십계명을 잘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으로부터도 칭찬과 존경을 받던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마 19:21)

예수님의 이 한마디에 그는 소리도 없이 예수님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 청년이 지금 천국이 있을까요?

아니면 지옥에 있을까요? 

"여러분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계십니까?"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고 계십니까?"

 

쉽게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분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입니다.

그는 진정 예수님이 그의 구주가 되신 분입니다.

그의 소망은 진정 이 땅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 나라에 있는 자입니다.

 

사업을 하다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알게 됩니다.

저는 아주 간단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돈 앞에서 정직한가? 아닌가? 라고 분별합니다.

그리고 그가 돈 앞에서 정직하면 그를 믿어줍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상이 좋고, 말을 잘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예의가 발라도

돈 앞에 정직하지 않은 사람과는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이는 천국에서의 원리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셨을까요?

그 부자청년은 자신이 십계명을 잘 지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고 착각했지만,

사실 그는 사람의 눈에 보이기 좋게 그의 명예욕을 채우기 위해

거룩한 척, 경건한 척,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했을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경주는 눈에 보이는 것과의 싸움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의 싸움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들과의 싸움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높아진 내 속에 있는 그 무엇,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내 속에 있는 그 무엇,

그것들과의 싸움이 진정 우리 신앙의 경주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상당히 위험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오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암송하고 인용하는 말씀입니다만, 사실 간단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이 실제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면

절대로 주를 위해 살지 못하고 주를 위해 죽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사는 시늉은 할 수 있어도

주를 위해 죽는 시늉은 할 수 있어도 진정 죽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도

예수님보다 앞서는 것이 있다면 그는 주를 위해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고 사도들이 죽었습니다.

또한, 그 이후 수 많은 죽음 위에 지금의 기독교가 이어져 오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저는 해외 나가서 선교하다 순교할 겁니다."

그때 저는 그분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매님, 먼저 자매님이 예수님 앞에서 죽어야 됩니다."

그녀의 육은 자신의 생각과 마음대로 펄펄 날뛰고 있는데 어찌 예수님을 위해 순교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순교가 아니라 그냥 죽으러 가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던 것처럼

사도들이 죽으셨던 것처럼

바울이 매일매일 죽었던 것처럼

우리 육신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죽여야 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수정과 같은 맑은 복음의 빛이 우리를 통해 세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예수님이 강하게 우리 안에서 살아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죽었습니까?

아니면 살아서 인생의 주인이 되어있습니까?

평안한 하루 되십시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