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관 자료 ━━/聖地巡禮

메르넵타 석비( Merneptah Stele)의 `이스라엘`

Joyfule 2015. 10. 1. 08:27

 

 

메르넵타 석비( Merneptah Stele)의 `이스라엘`

 

 

메르넵타 석비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File:Merneptah_Israel_Stele_Cairo.JPG)

 

높이 3.18m, 폭 1.63m의 석비로 1896년 Flinders Petrie 가 테베의 메르넵타 기념신전에서 발견했다. 현재 이스라엘 비문은  카이로 고고학 박물관 1층에 보관 전시 중이다. 3.7m 의  검은 화강암 돌로  한 면은  아멘호텝3세  비문 과 다른 한 면은 메르넵타 비문이  기록되어있다. 이 석비의 중요성은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자료 가운데 가장 최초의 것이란 사실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개인의 이름으로 알려진 것이 있다. 기원전 2500년 에블라의 유적에 2번, 우가릿 토판, 기원전 853년 아시리아 왕 살만에셀 3세의 비문에 2번, 기원전 840년의 모압 왕 메사 석비, 그리고 텔 단(Tel Dan)에서 발견된 기원전 850년의 석비 조각에 나타난다. 하지만 집단으로서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메르넵타 석비이다.

 기원전 1207년 무렵 이집트 파라오 메르넵타(Merneptah, 람세스 2세의 후계자)의 재위 다섯 번째 해에 리비아(Libia)를 상대로 승리하고 세운 이 비문에 ‘이스라엘’이 언급되어 있으며, 이는 기원전 9세기에 이르기까지 성서가 아닌 곳에서 이스라엘을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후기 가나안 시대의 모습에 앞서 이집트 왕조에 대한 간단한 연대를 본다 (N. Grimal 1995:392-393). Hyksos Dynasties XV-XVI and Dynasy XVII (Thebes) 1674-1553 B.C. New Kingdom 1552-1069 B.C. Dynasty XVIII 1552-1295 B.C. Ahmose 1552-1526 B.C. Thutmose III 1479-1425 B.C. (Hatshepsut 1478-1458 B.C.) Amenhotep III 1390-1352 B.C. Amenhotep IV 1352-1338 B.C. Dynasty XIX 1295-1188 B.C. Seit I 1294-1279 B.C. Ramses II 1279-1212 B.C. Merneptah 1212-1202 B.C.  람세스 2세 13번째 아들인 메르넵타 (1212-1202 B.C.)가 왕위에 오른 때는 그의 나이가 60대 였을 때였다.

 

힛타이트와의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난 이후 동방으로부터의 소요는 잠잠해졌다. 람세스는 자신의 관심을 이제는 국내 문제와 건축 사업에 쏟았다. 하지만 the Libyans의 위협은 언제나 상존하였다. 서쪽으로 이집트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해 이집트는 서쪽 변방 지역과 Libya, 멀리는 현대의 el-'Alamein에 이르기까지 지중해를 접하고 있는 해안지역에 여러 병거성들을 지어야 했다. 이런 지역들의 수비대들은 쉽게 the Libyans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메르넵타가 통치를 시작할 즈음 the Libyans은 이집트를 다시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메르넵타는 이집트를 위협해 오는 무리들을 맞기위해 자신의 군사들을 재정비하였다. 이런 와중에, 메르넵나는 역시 팔레스틴에서 일어난 일련의 반란 세력들을 맞았다. the Libyans의 침입은 메르넵타의 통치 5년에 발생한 것으로 the Rebu prince Mereye에 의해 주도되었다. the Libyans들과 함께 연합한 세력들은 the Meshwesh, the Temeh and the Tehenu였다.  이 전쟁에 관한 내용은 룩소르에 있는 메르넵타의 장제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카이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명 이를 가리켜 이스라엘 비문 (Israel Stela)이라고도 한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이 비문 거의 끝 부분에 언급되어 있는데 '이스라엘'이 성경 밖의 자료에 나타나기는 처음이다. 이 비문에 따르면, 가나안으로의 군사적인 원정은 the Libyans와의 전쟁이 있기 전이 분명하다. 이는 메르넵타 통치 5년에 기록된 the Amada Stela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에서 바로는 as the Reducer of Gezer로 묘사되었다.

메르넵타의 가나안으로 향한 군사적인 원정은 아마도 그의 통치 3년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J. H. Breasted, Ancient Records of Egypt, III, par. 605). 이 군사적인 원정의 역사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가끔 의문이 있다. 그러나 가나안으로 향한 메르넵타의 원정은 카르낙에 기록된 비문에서도 역시 언급되어 있다. F. Yurco는 원래 람세스 2세에 의한 원정이 아닌 메르넵타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주장하였다. 아스글론이 두 비문을 통해 언급된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아스글론이 람세스 2세에 의해 포위된 것은 사실 람세스가 아닌 메르넵타의 원정 결과라는 견해이다. 사실 아스글론은 람세스 2세의 전쟁 기록가운데 그 어느 곳에도 언급이 없다. 그러므로 카르낙에 언급된 가나안과의 전쟁 기록과 메르넵타 비문 사이에는 서로 상응하는 점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Yurco는 결론으로, 메르넵타 비문에서 이스라엘을 언급한 일은 실질적인 역사적인 관점에서 기록된 것으로 주장한다 (is founded upon an actual historical event). 이스라엘 비문은 하나의 고리를 가지면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지리적인 안목으로 묘사되었다.  

 

메르넵타 석비  (출처-http://www.bible.ca/archeology/bible-archeology-victory-stele-of-merneptah)

 

The princes are prostrate and say 'peace', A 

Not one raises his head among the Nine Bows.

Desolation is for Tehenu; Hatti is pacified; B

Plundered is Canaan with every evil C

Carried off is Ashkelon, D

Seized upon is Gezer, D.1

Yeno'am is made as that which does not exist D.2

Israel is laid waste, his seed is not; C.1

Kharu has become a widow because of Egypt B.1

All lands together are pacified; A.1

Everyone who was restless has been bound

by the king of Upper and Lower Egypt.

Ba-en-re Meri-Amon; the Son of Re.

Mer-ne-Ptah Hotep-hir-Maat, given life

 

like Re every day.

 

방백들은 꿇어 엎드리며 ‘자비를!’이라고 외친다.

무릎 꿇은 아홉 명 가운데서 머리를 드는 자가 하나도 없다.

테헤누는 황폐해졌고, 하티는 평정되었다.

온갖 악이 횡행하던 가나안은 약탈되었다.

아스글론은 사로잡혔고, 게셀은 장악되었다.

야노암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되었다

이스라엘은 황폐해졌고, 그 씨가 말랐다.

후루는 이집트를 위한 과부가 되었다.

온 땅이 평정되었다.

소요를 일으키던 자들은 모두 결박되었다.

상류와 하류 이집트의 왕, 메르넵타에 의해. (ANET 378)

메르넵타 비문은 구조적으로 다음과 같은 시행을 가지고 있다. 서론과 마지막 부분은 the Libyans을 포함하는 the Nine Bows와 그리고 온 땅에 평화가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 다음에는 Hatti와 Kharu (즉 Syria와 Palestine), Canaan, Israel (즉 Palestine), 그리고 Ashkelon, Gezer, 그리고 Yeno'am (즉 세 도성들)이 언급되었다. 그 다음에으로 비문은 이제 내용을 외부로 돌려 설명한다. 즉 Hatti와 Kharu를 포함하는 the Nine Bows를 묘사한다. 비문은 작은 지리적인 범위 곧 Hatti-Kharu 즉 가나안내에서 이야기를 계속한다. 여기에서 가나안과 이스라엘을 세분화하여 이름들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언급된 도성들은 아스글론, 게셀, 그리고 예노암이다.

 

(출처- http://www.bibleprobe.com/merenptahstele.jpg) 

 

메르넵타 석비, 이스라엘   (출처- http://ib205.tripod.com/israel_stela.html)

 

(출처-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9/9d/Israel_segment.jpg)

 

(출처- https://rapgod.files.wordpress.com/2012/03/sharome-yellow.png)

 

(출처- http://4.bp.blogspot.com/-P6Ej0_Xv1t4/UY1WSAapPLI/AAAAAAAAzu0/Iz5n5Nnq-uI/s1600/614809_original.png)

 

메르넵타 석비  (출처- http://www.bing.com/images/)

 

메르넵타 [Merneptah]     (출처- http://cafe.daum.net/inchonbible/GuYC/)

 

리비아의 침략을 물리친 이집트의 왕(BC1213~BC1204 재위).으로 람세스 2세의 13번째 아들이다. BC 1213년경 왕위에 오를 때는 거의 60세였다. 이집트는 람세스 2세 통치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군사력이 약화되었다. 메르넵타는 통치 초기에 아슈켈론· 게제르· 예노암 등 팔레스타인 지역의 도시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이 시기의 전투를 묘사한 부조가 알카르나크에 있는데 전에는 이것을 람세스 2세의 치적으로 보았음). 그러나 메르넵타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서부 국경지대였다. 리비아인들은 삼각주 오아시스 서쪽 완충지대를 뚫고 들어와 이집트 영토를 침범했다.

 BC 1209년경 메르넵타는 해상민족이 삼각주 끝에 있는 거대한 행정·종교 중심지인 멤피스와 헤리오폴리스를 공략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소아시아와 에게 해 지역에서 밀려나 중동지역을 떠돌면서 리비아와 연합하여 전력을 강화했다. 메르넵타는 위험에 빠진 멤피스의 수호신 프타에게서 꿈에 계시를 받은 후 군대를 정렬해 다가올 싸움에 대비했다. 정확한 전투지점은 아직도 논란거리이지만, 이 전쟁에 대한 4개의 사료를 종합해보면 삼각주 끝의 어느 서쪽 지역으로 생각된다. BC 1209년 어느 봄날 새벽 리비아인들과 그 동맹군들이 나타났고, 극렬한 전투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메르넵타는 보병대와 전차들을 후방에 두고 궁사(弓士)들을 내보냈다. 6시간 동안 궁사들은 적을 대량으로 학살했고, 이집트의 보병과 전차부대는 지휘관의 도망으로 우왕좌왕하는 적들을 섬멸했다.

이 전투에서 이집트는 리비아와 해양민족을 9,400여 명이나 죽이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집트는 평화를 되찾았으며, 메르넵타는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거대한 기념판 4개를 새기도록 지시했다. 이중 유명한 '이스라엘 스텔라'는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던 반란을 진압했던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메르넵타는 이스라엘 민족도 싸워서 이긴 민족 가운데 하나로 여겼다. 히브리 학자들은 이 자료에 기록된 상황이 〈구약성서〉의 〈출애굽기〉 후기에서 〈판관기〉까지의 시기와 거의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수단에서 발견된 자료에도 메르넵타 왕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후로 추정되는 시기에 하(下)누비아의 반란을 진압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기념물을 거의 세우지 않았지만 이집트의 국방·외교 면에서는 선왕(先王) 람세스 2세에 못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출처-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7m2600a )

 

<베를린 돌판 No. 21687 (베를린 국립 박물관 소재)>

 

베를린 석비  (출처- http://www.bible.ca/archeology/bible-archeology-Israel-berlin-statue-pedestal-relief-no-21687)

 

돌판 No. 21687 (베를린 국립 박물관 소재)

 

2001년에 Manfred Goerg는 베를린 박물관에 소장된 부조(No. 21687)에 새겨진 한 지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했다. Goerg는 세번째 지명이 옛철자로 기록된 "이스라엘"이라고 제안하고, 그 부조는 19왕조 시대에 제작되었지만, 그 지명은 더 오래된 목록에서 복사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논문이 독일어로 되어 있어서, 그의 제안이 영어권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이번에 Goerg가 다른 두 영어권 학자와 함께 이전의 논문을 보강 번역하여 Journal of Ancient Egyptian Interconnections에 게제하였다. Goerg의 제안이 맞다면, 지금까지 이스라엘에 대한 최초의 성경 외적 언급이 메르넵타의 승리비석이었지만, 지금부터는 그것이 베를린 박물관에 소장된 지명 목록이 될 것이다. (글 출처- http://blog.daum.net/koowon/7107098)

 

돌판 No. 21687 (베를린 국립 박물관 소재)        (출처- 출처- http://blog.daum.net/koowon/7107098)

 

돌판 No. 21687 ,그림: Peter van der Veen          (출처- 출처- http://blog.daum.net/koowon/7107098) 

 

가운데 육상경기장 모양의 링 안에는 "가나안"이라는 말이 쓰여 있다. 왼쪽의 링 안에는 "아스글론"이라고 쓰여있다. 오른쪽의 링안의 글자는 훼손되어 일부만 보이지만, Goerg은 다음과 같이 훼손 부분을 재구성한다. 이렇게 재구성된 글자는 "이스라엘"이라고 읽힌다. 이와같이 아스글론, 가나안, 이스라엘이 동시에 나타나는 다른 곳은 메르넵타의 승리비석이다. 호프마이어는 승리비석에서 이스라엘의 철자는 "신"인 반면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철자는 "쉰"이라고 지적하며, 이것을 이스라엘로 읽는 것이 반대하지만, "신"과 "쉰"이 마소라학자들의 결정임을 생각하면 이스라엘의 본래 철자가 "쉰"인지, "신"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스라엘의 어원에 관해서 "야곱"의 이야기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다른 이름인 "예수룬"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즉 이스라엘은 "야사르-엘" 엘이 완전하다는 어원을 가질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출처- http://blog.daum.net/koowon/71070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