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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얼굴

Joyfule 2012. 1. 29. 23:59

    

 

목성균 수필 연재 - 얼굴

어릴 때 내 별명은 잔나비였다. 얼마나 못생겼으면 같은 진화경로에서 뒤쳐진 유인원(類人猿)에 비유되었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초등학교 때 사진을 내 놓고 내 얼굴을 보면 흡사 잔나비다. 좁은 이마와 보통이 넘는 긴 인중하며, 툭 불거진 광대뼈하며, 중도에 진화가 멈춘 얼굴이다.
그래도 살아오면서 내 별명에 일말의 위안이 되는 세계사적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열도를 평정하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의 얼굴이 잔나비와 흡사했다고 한다. 아! 얼마나 고무적인 사실인가. 나는 우리의 성웅 이순신 장군만큼 풍신수길을 숭상한다. 못생겼기 때문이다. 신경림의 시 파장(罷場)처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유유상종의 심정이다.

어느 해 저문 날, 한산섬 제승당에서 뵌 이순신 장군의 영정은 너무나 준수하고 당당했다. 잔나비 상호인 내가 감히 우러러 뵙기조차 황송할 지경으로 잘생긴 존영이었다. 그런데 그 어른의 필적(匹敵)이었던 적장 풍신수길이 잔나비처럼 못생겼다니, 나는 하도 기쁜 나머지 이순신 장군의 존영 앞에서 감히 회심(會心)의 미소를 지었다. 내 얼굴에 대한 콤플렉스가 일순간에 해소되는 것 같았다.
“잔나비야-!”
누가 내 별명을 불렀을 경우 나는 아주 당당하게
“임마, 잔나비가 뭐야, 차라리 풍신수길이라고 해-.”
나는 상대의 얼굴이 아무리 잘생겼다 해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대꾸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 게 안되었다. 풍신수길과 같은 영웅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풍신수길의 얼굴이 윤곽만 나와 비슷했지 뚜러질 듯 쳐다보는 안광(眼光)하며, 굳게 다문 입매의 의지하며 얼굴의 격이 내 얼굴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자라면서 잔나비라는 내 별명이 인중 긴 딱따구리로 바뀌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그것은 우리 할머니 때문이다. 인중이 길면 장수한다는 속설에 만족하신 우리 할머니는 툭하면 동무와 어우러져 저무는 것도 잊어버리고 노는 동네 고샅에 날 찾아 나오셔서 “어이구, 우리 딱따구리 그만 놀고 들어가서 밥 먹어야지-.” 하셨다. 할머니의 그 말에 동네 애들도 덩달아서 나를 딱따구리라고 불렀다. 그래도 그 별명은 들어줄 만 했다. 못생긴 내 얼굴을 전반적으로 들먹인 게 아니고 인중만 들먹인 별명이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결함을 국소적인 결함으로 가려주신 것이다. 할머니의 태산 같은 손자에 대한 사랑이 그 침울한 내 별명 마저 없이해 주셨다.

그러나 인중이 길면 장수한다는 건 백제 근거 없는 말이었다.
누가 상갓집에 문상을 가서 조문하길 “얼마나 애통하십니까. 그렇게 인중이 긴 어른이 인중 값도 못하시고 졸지 돌아가셨으니---.” 그러자 상주가 답하기를 “원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그럼, 인중 긴 딱따구리는 천년이고 만년이고 산답디까.” 했다는 것이다. 몰상식한 상주와 문상객이다. 내 고향 동네 사랑간에 전해 오는 우스개 소리에 불과할 뿐일 터이다. 아무튼 인중의 길이와 장수(長壽)는 비례하는 게 아니란 말이 되므로, 나는 내 인중을 믿고 장수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늘 위장이 부실해서 이러다 나 위암에 걸리지 걱정이 되면 그래도 믿느니 인중뿐이다.

가끔 대검 중수부에 소환되는 지도층 인사들이 검찰청 현관 저지선에 걸음을 멈추고 서서 사진기자의 카메라 앞에 얼굴을 추켜든 모습을 본다. 하나 같이 준수하고 잘 생긴 얼굴들이다. 잔나비처럼 생긴 얼굴은 없다. 당당하게 서서 후랫시를 받는 얼굴들, 수 억 내지 수 백억 짜리 얼굴들이다. 배임, 횡령, 알선수뢰, 그런 범죄형의 얼굴이 내 눈에는 그저 당당한 지도자의 얼굴로만 보일 뿐이다. 내 안목(眼目)은 얼마나 틀리는 저울 눈 같은 것인가. 그들이 거기서 비열을 애써 감추고 떳떳한 체 후랫시를 받고 서 있는 동안 나는 그들의 혐의를 인정하고 싶지 안았다. 모든 것은 법정에서 밝혀질 거라는 그들의 말처럼 무슨 착오가 발생했지 싶기만 했다.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정체를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관상쟁이도 사람의 얼굴을 보고 미래의 운수는 알아도 마음 속은 모른다. 관상쟁이가 사람의 얼굴을 보고 마음 속까지 알 수 있다면 수사관이나 면접관을 겸했을 것이다. 그러면 사회가 일급 수처럼 깨끗할 지는 몰라도 일급 수에 사는 몇 안 되는 종의 고기만 살아서 사회는 너무 단조롭고 재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사회 지도층 인사의 얼굴은 피지도 층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의무가 있다고 본다. 그 건 잘생기고 못생긴 것과는 다르다. 나는 내가 못생겨서 그런지 몰라도 가급적이면 못생긴 얼굴에 더 호감이 간다. 이목구비가 성형외과적 병상(病狀)이라서 남에게 혐오감을 준다면 안 되지만 이목구비를 제 위치에 모두 구비한 얼굴이라면 못생겼으면 어떤가, 내 얼굴도 안인데, 인간미나 풍기면 되는 것이다.

여하튼 나는 피하지방층이 두꺼워서 표정 짖기 불편한 얼굴은 지도자의 얼굴로는 부적격이라는 견해를 주장한다. 철면피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개발도상 국가의 지도 층 인사라면 당연히 국가번영을 위한 노심초사로 지방을 과연소(過燃燒)해서 피골(皮骨)사이에 굳기름이 안 섞인 살코기만 약간 붙은 담백한 얼굴이라야 한다. 예를 들면 간디 옹 같은 얼굴을 말하는 것이다.

굳이 국가의 번영을 위해서 노심초사까지는 못 해도 얼굴만은 그러한 척 만들어 가지고 있는 것이 바람직한 지도자의 얼굴이다. 그런 얼굴 만들기는 레슬링선수나 권투선수의 감량의지와 멋쟁이 아가씨의 다이어트를 생각하면 전혀 불가능한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한루의 변 사또와 그 일행 같은 기름진 돼지 얼굴을 추켜들고, 나라의 발전과 안위를 혼자 다 짊어지고 노심초사하는 척 하는 지도자들이 나를 신경질 나게 한다. ‘임마 네놈 신경질 좀 나기로 대수냐’고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국민적 정서가 그렇다.
나는 지금 잔나비 같은 내 못 생긴 얼굴이나 합리화해보자고 괴변을 늘어 놓는 게 아니며, 내 얼굴의 구조적 취약성 때문에 잘 생긴 얼굴을 매도하는 건 더더군다나 아니다. 검찰청에 소환되는 하도 많은 지도 층 인사들의 한결같은 얼굴에 대한 나의 수필적 견해를 피력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