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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이끄는 삶 - 1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

Joyfule 2006. 12. 12. 01:29

 
목적이 이끄는 삶 -  1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막12:30).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일부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 모두, 영혼 모두, 생각 모두 그리고 우리의 힘 모두를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마음이 반밖에 없는 헌신, 부분적인 순종 그리고 남는 시간과 돈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 삶의 작은 부분들이 아닌 온전한 헌신을 원하신다.
한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하기 가장 좋은 시간, 장소 그리고 스타일에 대해 예수님과 토론한 적이 있다. 예수님은 이러한 외부적인 요소들은 무의미하다고 말씀하셨다. 어디에서 예배하는지는 왜 예배해야 하고, 예배할 때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얼만큼 드려야 하는지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하셨다. 예배드리는 데 바르고 그른 방법이 있다.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예배드리자”(히 12:28, TEV).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에는 네가 특징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정확할 때 기뻐하신다
사람들은 때때로 “나는 하나님을…라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예배드리고 싶은 모습의 하나님에 대해 나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대하기 편안하고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만들어 그것을 예배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우상 숭배다.
예배는 말씀의 진리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기초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대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성경에 거짓없이 드러나신 분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진실할 때 기뻐하신다
‘영으로 예배하라.’ 이때의 영은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영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대문에 우리는 지금의 몸에 잠시 거주하고 있는 영이고 하나님은 그 영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드셨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에 우리의 영이 반응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네 마음(Heart)과 영혼(Soul)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예배가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셨다. 바른말을 하는 것보다는 그것이 진심으로 하는 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없는 찬양은 찬양이 아니다. 그것은 가치 없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 말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태도를 보신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예배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하나님을 즐기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감정과 연관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깊은 감정을 가지고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감정을 허락하셨다. 하지만 그 감정들은 조작된 것이 아닌 진정한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위선을 싫어하시기 때문에 예배에서 쇼나 속임수 또는 가짜를 원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솔직함과 진정한 사랑을 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완벽하게 예배드리지 못할 수도 있지만, 성의 없이 해서는 안 된다.
물론 마음을 다하는 것으로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마음을 다하지만 잘못 예배드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령과 진정 모두 요구되는 것이다. 예배는 진정한 것이어야 하고 정확해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는 감정적인 동시에 교리적이다. 우리의 마음과 머리를 모두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음악 때문에 감동받는 것을 성령에 의해 감동받는 것과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둘은 절대 같지 않다. 실제로 감정적이고 내면에 와 닿는 음악이 때로는 예배를 방해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음악으로 인해 초점이 하나님에서 우리의 감정으로 옮겨지기 때문이다. 예배를 드릴 때 가장 큰 방해 요소는 우리 자신인데, 이것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관심과 걱정이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에 대해 다른 의견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의견들은 주로 성격과 배경의 차이에 의한 것이다. 성경에는 많은 찬양 형태들이 나와 있다. 고백, 노래, 큰 소리로 외치기, 공경의 마음을 가지고 서 있기, 무릎 끓기, 춤, 간증, 악기 연주, 손 높이 들기 등은 그 중 몇 가지일 뿐이다(히13:15, 시7:17, 스3:11, 시149:3, 150:3, 느8:6). 가장 좋은 찬양 스타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배경과 성격에 바탕을 두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솔직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내 친구 게리 토마스(Gary Thomas)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과 마음 설레는 관계를 갖기보다는 만족스럽지 못한 상투적인 예배의 관습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독특하게 만드신 스타일에 맞지 않는 예배 방식이나 경건의 방법을 스스로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의도적으로 모두 다른 모습으로 만드셨는데 왜 모든 사람이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고 의문을 제시했다. 그는 많은 기독교 서적들을 읽고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데 2천 년 동안 사용되어온 많은 다른 방법들을 발견했다. 그 중에는 야외로 나가는 것, 공부하는 것, 노래, 독서, 춤, 예술품 창작,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 고독, 교제 그리고 그 외의 수십 가지의 다른 활동들이 있었다.
자신의 책 「거룩한 길(Sacred Pathways)」에서 게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9가지 방법을 분류했다. 자연주의자들은 자연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장 크게 느끼고, 감각주의자들은 그들의 감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청각뿐 아니라 시각, 미각, 후각 그리고 촉각을 모두 사용하는 아름다운 예배를 드린다. 전통주의자들은 의식, 성찬식, 상징 그리고 변하지 않는 구조 등을 통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고, 금욕주의자들은 고독과 단순함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선호한다. 행동주의자들은 악과 맞서고 불의와 싸우며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박애주의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줌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한다. 열성적인 사람들은 찬양을 통해서, 묵상하는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지식인들은 공부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한다.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맞는’ 방법은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지 않으시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예배 가운데 단순하고 정직한 자신의 모습으로 있는 사람들”(요4:23, Msg). 
하나님은 우리가 사려깊게 예배드릴 때 기뻐하신다
예수님은 신약 성경에서 “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네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생각 없이 찬송을 부르고, 상투적인 말로 기도하며, 다른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주를 찬양하라’고 별 뜻 없이 외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예배하지 않는 이상 예배는 의미 없는 행동 또는 빈 감정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이 예수님이 ‘중언 부언’(마6:7)이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문제다. 성경적인 어휘도 과용하면 지겨운 상투적인 표현이 될 수 있는데 그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쓰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단어나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노력을 하기보다 상투적인 말들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쉽다. 그래서 나는 말씀을 여러 다른 번역서로 읽어볼 것을 권한다. 그것은 우리가 예배드릴 때 보다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찬양, 할렐루야, 감사, 아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보라. “우리는 당신께 찬양드리고 싶습니다”라는 말 대신 동의어 목록을 작성해서 감탄한다, 존경하다, 소중히 하다, 경외하다, 경의를 표하다. 감사하다 등의 단어를 사용해 보라. 또한 구체적이어야 한다. 만약 누군가 우리에게 다가와서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라고 열 번 반복한다면 우리는 “왜?”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스무 번의 의미 없는 칭찬보다는 두 번의 구체적인 칭찬을 받는 것이 우리는 더 좋을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시다.
또 다른 아이디어는 하나님의 다른 이름들을 목록으로 작성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들은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지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하나가 그분의 성품의 여러 다른 면모를 나타내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새로운 이름을 말씀해주시면서 하나님은 누구이신가를 조금씩 드러내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러한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중 예배 역시 사려 깊게 드려지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전서 14장 전체를 통해 “모둔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14:40)고 결론을 내렸다.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참여했을 때 그들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이 예배에 처음으로 참석해 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만약 그들이 여러분이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들이 ‘아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아주 멋진 방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곳에 처음 온 사람들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고전14:16~17,CEV). 예배에 참석한 불신자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명령이다. 이 명령을 간과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불순종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좀더 자세한 설명을 원한다면 내가 쓴 
「새들백교회 이야기(The Purpose Driven Church 도서출판 디모데)」의 13장과 14장을 참조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현실적일 대 기뻐하신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왜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원하시는가? 왜 그분은 “너의 영을 내놓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이는 우리의 몸 없이는 이 지구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생에서 우리는 새로운, 더 나은, 한층 업그레이드 된 몸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땅에 있는 동안 하나님은 “네가 지금 가진 것을 내놓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예배에 대해 현실적으로 말씀하시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나 오는 모임에 못 가. 하지만 마음만은 함께할게”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아무 의미도 없다. 무가치한 것이다. 우리가 이 지구상에 있는 한 우리의 영은 우리의 몸이 있는 곳에만 있을 수 있다. 만일 그곳에 몸이 없다면 우리도 없는 것이다.
예배에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제물’의 의미를 종종 ‘죽음’과 연관시킨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산 제물로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산 제물로 사는 것의 문제는 제물이 제단을 떠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자주 그렇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여, 전진하라”고 주일에 찬양을 하고 월요일에는 직무 이탈을 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올 때 기뻐하셨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보이실 희생을 미리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하나님은 속죄 제사와 다른 예배의 제사들, 즉 우리의 삶, 사랑, 감사, 찬양, 겸손, 회개, 헌금, 기도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 그리고 힘든 사람을 돕는 것 등을 통해서 기뻐하신다(시50:14, 51:17, 54:6, 131:2, 막12:33, 롬 12:1, 빌 4:18, 히13:15, 16).
진정한 예배는 대가가 따른다. 그래서 다윗은 이것을 깨닫고 “내가 아무런 대가를 치루지 않아도 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지 않겠다(삼하 24:24 TEV)라고 말했다.
우리가 예배의 대가로 지러야 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자기 중심성(self-centeredness)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동시에 높일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거나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서 예배드려서는 안 된다. 더 이상 스스로에게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예배가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한 것임을 가르쳐주셨다. 
그것은 항상 편리하고 편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가끔 예배는 의지의 표현이다. 수동적인 예배란 말은 모순되는 말이다.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때, 피곤하지만 예배를 드리려 가기 위해 일어날 때, 또는 지쳐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도울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의 재물을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영국의 찬양 인도자 매트 레드맨(Matt Redman)은 자신이 목사님에게서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어떻게 배웠는지 다음과 같이 말해준다. 그 목사님은 예배가 음악 이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른 방법으로 예배하는 방법을 배울 때까지 예배 시간 동안 노래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 기간이 끝날 무렵 그는 ‘예배의 마음(heart of Worship)’ 이라는 곡을 썼다.
노래 이상의 것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노래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깊은 곳을 보십시다.
당신은 나의 마음을 보십니다.
문제의 중심은 마음에 잇다.
Day 13
내 삶의 목적에 대하여
생각할 점 : 하나님은 나의 전부를 원하신다.
외울 말씀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12:30).
삶으로 떠나는 질문 : “ 지금 무엇이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인가, 나의 개인적인 예배인가? 하나님을 기쁘
시게 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