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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이끄는 삶 - 14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때

Joyfule 2006. 12. 13. 02:00

 
목적이 이끄는 삶 -  14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때  
“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낮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사 8:17)
우리가 어떻게 느끼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신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행복한 상황이 펼쳐질 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상황이 언제나 좋을 수는 없다. 그럴 때에는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하는가? 하나님이 몇 백만 킬로미터 덜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어떻게 하는가?
가장 깊은 경지의 예배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시험을 당할 대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삶을 내어드리며, 그분이 멀게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친구 관계를 시험하는 것은 주로 이별과 침묵이다. 물리적으로 먼 거리에 있거나 이야기를 할 수 없을 때 친구 관계는 시험을 받는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항상 가깝게 느껴지지만은 않을 것이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 는 “모든 관계에 가까워지는 시기와 멀어지는 시기가 있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도 추는 항상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움직인다. 바로 그때가 예배드리기 어려운 시기다.
그 관계가 더욱 성숙지기 위해서 하나님은 멀어진 것 같은 시기, 즉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거나 우리를 잊으셨다고 생각되는 때를 통해 시험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백만 킬로미터 덜어져 있는 것같이 느끼신다.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는 영적인 메마름, 의심 그리고 하나님과 멀어진 이 시대를 ‘
영혼의 어두운 밤(the dark night of the soul)’ 이라고 표현 했다. 
헨리 나우웬(Henry Nouwen)은 ‘부재의 사역(the Ministry of absence)’이라고 표현 했다. 
A. W. 토저(A. W. Tozer)는 ‘밤의 사역(the ministry of night)’이라 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마음의 겨울(the winter of the heart)’이라고도 했다. 
예수님 외에 다윗보다 하나님과 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사람’(삼상13:14, 행13:22)이라고 
기꺼이 부르실 정도였지만 다윗은 종종 하나님의 부재에 불만을 표현하곤 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10: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머리 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22:1).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43:2, 참고-시44:23, 74:11, 88:14, 89:49).
물론 하나님은 다윗을 떠나지 않으셨고 또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나는 너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을 것이다”(신31:8, 시37:28, 요14:16~18, 히13:5)라고 약속하시지만 “네가 항상 나의 임재를 느낄 것이다”라고 약속하지는 않으셨다. 실은 하나님 자신도 때로는 우리에게서 얼굴을 숨기신다는(욥23:8~10) 사실을 인정하신다. 가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일부러 모습을 숨기시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플로이드 맥클렁(Floyd McClung)은 이렇게 묘사한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드니 모든 영적인 느낌이 사라졌다. 기도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악마를 꾸짖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영적인 행동을 한다. 친구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거나, 생각할 수 잇는 모든 죄를 고백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다닌다. 그리고 금식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영적인 슬럼프가 얼마나 오래 갈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며칠? 몇 주? 몇 달? 끝은 날까? 마치 기도가 천장에서 튕겨져 떨어지는 것 같다. 절망 속에서 우리는 ‘도대체 내 문제가 무엇인가’라 고 소리친다.”
사실 우리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아주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시험과 성숙을 위한 과정의 일부일뿐이다. 모든 크리스천은 최소한 한 번씩 그리고 보통은 여러 번 이런 과정을 겪게 된다. 고통스럽고 당황스럽지만 우리의 믿음이 발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다 욥은 이 사실을 알고 삶에서 하나님의 임제를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다음의 말씀과 같이 소망을 가졌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8~10).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가 나셨다고 느끼거나, 우리가 죄로 인해 벌을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사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끊어지기도 한다.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의 영을 슬프시게 하며, 우리의 불순종, 다른 사람과의 갈등, 세상 일로 분주함, 세상과의 친밀함 그리고 그 외의 죄들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수도 있다(시51편, 엡4:29~30, 살전 5:19, 렘 2:32, 고전8:12, 약4:4).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감정과 멀리 느껴지는 감정은 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하는 믿음에 대한 시험, 즉 “내가 그분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거나, 내 삶에 그분이 역사하심의 가시적인 증거가 없을 때에도 나는 계속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배드릴 수 있을까?”와 같은 시험인 것이다.
크리스천들이 오늘날 예배에서 저지르는 가장 흔한 실수는 하나님보다 경험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배드리면서 어떠한 느낌을 추구하고 그것이 마음속에 생기면 예배 드렸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정에 의존하지 않도록 하시려고 때로는 감정을 거두기도 하신다. 감정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대한 감정일지라도 그것은 예배가 아니다.
초신자일 때 하나님은 많은 감정의 확신을 주시고, 가장 미성숙한고 자기 중심적인 기도에도 응답해주신다. 그분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자라면서 그분은 이러한 의존 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으실 것이다. 하나님이 어디에든 계신다는 사실과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는 현상은 전혀 다른 것이다. 전자는 진리고 후자는 감정이다. 하나님은 항상 계신다. 심지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대에도 계신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를 단순한 감정으로 측정하기에는 너무 심오하다.
물론 하나님도 우리가 당신의 존재를 느끼기 원하신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을 느끼기보다 신뢰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은 감정이 아닌 믿음이다.
우리의 믿음이 가장 많이 자랄 수 있는 상황은 삶이 모두 무너지고 잇는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그런 때다. 욥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하루 만에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가족, 사업, 건강 그리고 소유하던 모든 것을. 그리고 가장 절망적인 것은 욥기 37장 동안 하나님은 한마디도 않으셨던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 도대체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아무 의사 소통 없는 위기의 때에 어떻게 계속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데 어떻게 예수님만 바라볼 수 있는가? 욥이 한 대로 하면 된다. 그 때 그는 바닥에 엎드려 이렇게 말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고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 1:20~21).
하나님께 솔직한 감정을 말하라
하나님께 마음을 모두 털어놓으라. 감정을 모두 쏟아내라. 하나님은 우리의 의심, 분노, 두려움, 슬픔, 혼란 그리고 궁금증들을 모두 감당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욥은 이렇게 표현했다. “저는 조용히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화가 났고 분개하고 잇습니다. 말을 해야겠습니다!”(욥7:11, TEV) 그는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느꼈을 때 “내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시절, 하나님과의 우정이 내 집안을 축복했던 그날이 돌아올 수 있었으면”(욥29:4, NIV)이 라고 외쳤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심, 분노, 두려움, 슬픔 혼란 그리고 의문들을 모두 감당하실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절망적인 상황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았는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동시에 절망을 느끼며 다윗은 이렇게 썼다. “나는 굳게 믿고 말하였다. ‘나는 완전히 망했구나’ ”(시116:10:,NCV). 이것은 모순처럼 들린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지만 완전히 파멸되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다윗의 솔직함 속에는 그의 깊은 믿음이 드러나고 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고 둘째,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믿었으며 셋째, 그는 자신의 감정대로 하나님께 솔직하게 이야기 해도 여전히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초점을 맞추라
그분은 한결 같은 분이시다. 상황과 감정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특성에 매달리라. 우리가 알고 잇는 하나님에 대한 불변의 진리들을 머리 속에 떠올리라. 그분은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신다.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을 아신다. 나를 돌보신다. 그리고 그분은 나의 삶에 대해 멋진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V. 레이몬드 에드맨(V. Raymond Edman)은 말한다. “하나님이 빛 가운데서 하신 말씀에 대해 어둠 속에서 의심하지 말라.”
욥의 경우, 그의 삶이 하나하나 망가져가고 있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그러나 그때에도 욥은 여전히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이유들을 발견했다.
*그분은 선하시며 사랑이 많은 하나님이시다(욥10:12)
*그분은 전능하시다(욥37:5, 23, 42:2).
*그분은 내 삶의 모든 구체적인 부분까지 아신다(욥25:10, 31:4).
*그분이 모든 것을 통제하신다(욥 34:13).
*그분은 내 삶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욥23:14)
*그분은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욥19:25)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으라
영적으로 메마른 시기를 지날 때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인내함으로 의지해야 하고,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이 우리를 더욱 깊이 성숙의 단계로 이끌고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 감정에 바탕을 둔 우정은 그 깊이가 얕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 때문에 마음의 어려움을 당해서는 안 된다. 상황이 하나님의 특성을 바꿀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상황이 어떻든 상관없이 여전히 우리의 삶에 충만하게 임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편에서 우리가 느끼든 못 느끼든 서 계신다.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욥 23:12).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러한 믿음 때문에 욥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신실할 수 있었다. 소망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계속 기도하는 것이다. 그의 믿음은 고통 속에서도 강했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계속 그를 신뢰할 것이다”(욥13:15, CEV).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지만 그런 우리의 감정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계속 신뢰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깊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을 기억하라
만약 하나님이 다른 것은 하나도 해주지 않으셨다 치더라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해주신 것만으로도 그분은 우리의 남은 삶 동안 찬양받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이것이 우리가 예배드리는 가장 큰 이유다. 불행히도 우리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치르신 엄청난 희생, 그때 일어났던 끔직한 세부 사랑들을 잊곤 한다. 
그것은 우리가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익숙함은 자기 만족으로 이끈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은 옷이 벗겨진 채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맞고, 채찍질당했으며, 조롱당했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으며, 사람들은 그분을 경멸하며 침을 뱉었다. 잔인한 인간들에게 학대받고 조롱당했으며 동물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셨다.
그때, 피를 너무 많이 쏟아 의식을 거의 잃은 채로 그분은 힘겨운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올라가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히시고, 십자가 처형 중 가장 참기 힘든 죽음의 고문 과정, 즉 천천히 죽도록 방치되셨다. 그분의 피가 흐르고 있을 때 야유하던 사람들이 모욕적인 말을 하고, 고통을 비웃으며, 그가 진정 하나님이냐고 조롱했다. 
예수님이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는 동안 하나님은 그 추한 광경에서 눈을 떼셨고 예수님은 절망 속에서 이렇게 외치셨다. “나의 하나님이시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은 스스로를 구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말로는 그 순간의 암울함을 표현할 수 없다. 왜 하나님은 예수님이 그렇게 무시무시하고 악한 학대를 당하게 두셨을까? 왜 일까? 바로 우리가 영생을 지옥에서 보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영원히 함께 누리게 하기 위해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셨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의 의로움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그 죄값을 대신 치르게 하셨다”(고후5:21, TEV).
예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갖게 하시려고 모든 것을 버리셨다. 그분이 죽으심으로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엇다. 그 사실 하나님으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찬양해야 한다. 다시는 무엇에 대해 감사해야 할 지 고민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