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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이끄는 삶 - 10: 예배의 중심

Joyfule 2006. 12. 9. 02:21

 
목적이 이끄는 삶 -  10 예배의 중심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것이다. 
“항복(surrender)’이라는 말은 ‘복종(submission)’이라는 단어만큼 사람들이 싫어하고 인기가 없는 단어다. 그것은 패배를 의미하며, 그 누구도 패자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항복은 전쟁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게임에서 지거나 강한 상대에게 양보하는 것과 같은 좋지 않은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그 단어는 항상 부정적인 문맥에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체포된 범죄자는 치안 관계자들에게 넘겨진다(surrender)라고 표현한다.
오늘날의 경쟁적인 문화 속에서 우리는 노력하고 시도하는 것을 멈추지 말고, 절대로 항복하지 말라고 배웠다. 그래서 우리는 항복하는 것에 대해 많이 듣지 못했다. 만약 승리가 모든 것이라면 항복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우리 또한 양보하고 맡기고 순종하라는 것보다는, 승리하고, 성공하고 극복하고 정복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하나님께 항복하고 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은 예배의 중심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자비에 반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분에게 드린다.
 하지만 이는 두려움이나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것이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요일4:9~10,19). 로마서의 열한 장을 할애해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에 대해 설명한 후, 바울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온전히 들리 것을 권고한다. “친구들이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대한 자비를 베푸셨으니…여러분 자신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시오. 그를 섬기고 기쁘시게 하는데 헌신하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할 진정한 예배입니다”(롬12:1, TEV).
진정한 예배,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완전히 내어드렸을 때 가능하다. 위의 구절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 모두에 ‘드리다(offer)’라는 단어가 포함되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우리 스스로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의 전부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헌신, 예수님을 주라 하는 것, 십자가를 지는 것, 우리 자신을 죽이는 것, 성령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 그러나 무엇이라 부르든지 우리가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삶의 전부를 원하신다. 95%로는 절대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께 삶을 드리는 것을 방해하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두려움, 자만 그리고 혼란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지 못하고, 우리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기를 원하며, 항복한다는 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
신뢰는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 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의 주요 요소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을 드릴 수 없는데, 이와 더불어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전에는 그분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항복할 수 없지만 사랑이 그 모든 두려움을 없앤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은 더 쉬워진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분은 우리에게 많은 증거를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신다(시145~9). 
그분은 우리에게서는 눈을 떼지 않으신다(시139:3). 
그분은 우리 삶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 돌보신다(마10:30). 
그분은 우리가 모든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다(딤전6:17). 
그분은 우리의 삶을 위한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렘29:11). 
그분은 우리를 용서하신다(시86:5). 
그분은 노하기를 더디하신다(시145:8).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희생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고 싶다면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팔을 벌리고 계시면서 “나는 너를 이만큼 사랑한다! 너 없이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라.
하나님은 잔인한 노예 감독이나 거친 폭력을 사용해 강제로 굴복시키려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의 의지를 깨지 않고 우리를 설득하려고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롭게 하나님께 우리를 내어드릴 수 있게 하신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분이시고 자유케 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께 삶을 드릴 때 우리는 구속이 아닌 자유를 누린다. 우리가 자신을 완전히 예수님께 드리면 우리는 그분이 폭군이 아닌 구세주라는 것, 상사가 아닌 형제라는 것, 그리도 독재자가 아닌 친구라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기
우리 자신을 완전히 항복하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두번째 요소는 우리의 교만이다. 우리는 우리가 단순히 피조물이고 모든 것을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가장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유혹이다.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3:5). 그 욕구, 완전히 통제하려는 욕심이 우리가 살면서 받는 스트레스의 원인이다.
삶은 싸움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야곱처럼 하나님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싸움을 통해서 하나님같이 되길 원하지만 우리가 그 싸움에서 이길 방법은 전혀 없다.
A.W. 토저(A.W. Tozer)는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고, 아직도 인생의 의미를 찾고 있으며, 아직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아직 스스로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 자신을 상대로 명령하고 있고,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간섭하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며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다. 인간일 뿐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되려고 노력하면 우리는 결국 사탄과 같이 된다. 왜냐하면 사탄 역시 하나님이 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우리가 인간일 뿐임을 알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하지만 스스로의 한계에 직면하면 초조해하고, 분노하며, 키가 더 크거나 (혹은 작거나), 더 똑똑하고, 더 힘이 세고, 더 재능이 많고, 더 아름답고, 더 부유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갖고 싶어하고 모든 것을 하기 원하면서 그렇게 되지 않으면 화를 낸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셨음을 발견할 때 우리는 질투하고, 시기하며, 자기 연민에 빠진다.
항복한다는 것의 의미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은 수동적으로 단념하는 것이나 숙명론적인 것, 또는 게으름에 대한 핑계가 아니다. 현실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 반대를 의미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을 희생하는 것, 또는 변화해야 할 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잇다. 하나님께 삶을 내어드린 사람들은 때때로 하나님 대신에 싸움을 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은 결코 겁쟁이나 짓밟히고도 가만히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사고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은 낭비할 목적으로 주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섬기는 로봇을 원하지도 않으신다.
또한 하나님께 삶을 내어드리고, 항복한다는 것은 우리의 성격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독특한 성품을 사용하기 원하신다. 우리의 독특한 성품은 하나님께 드릴수록 더 강화된다. C.S. 루이스는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께 더 많이 항복할수록 우리는 더 진정한 우리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처음부터 우리 모두를 다르게 창조하셨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내 자신을 그분의 인격으로 채울 때에야 비로소 나는 진정한 내 인격을 갖기 시작한다.” 항복하는 것은 순종을 통해 가장 잘 표현된다. 
우리는 그분이 요구하는 모든 것에 대해 “예,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아니오,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될 수밖에 없는데 우리가 순종하기를 거부하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밤새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면서도 예수님이 다시 시도해보라고 하신 말씀에 항복하고 순종했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눅5:5). 항복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순종한다.
완전히 내어드린 삶의 또 다른 면은 신뢰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도 하나님이 이끄심대로 따라갔다. 한나는 언제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계획된 시간을 기다렸고, 마리아는 어떻게 될지 모르면서 기적을 기대했다. 그리고 요셉은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지 모르면서 하나님의 목적을 신뢰했다. 이들 모두는 하나님께 삶을 완전히 내어드렸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주관하거나, 우리의 생각을 강요하고, 상황을 통제하려고 애쓰는 것 대신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때 우리는 하나님께 항복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라, 항상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할 필요가 없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너의 삶을 주님께 드리고 인내하며 기다려라”(시37:7, GWT). 더 열심히 노력하기보다는 더 많이 신뢰해야 한다. 
또한 비난에 반응하지 않고,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서두르지 않을 대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 드린 마음은 인간 관계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다른 사람들을 밖으로 밀어내지 않을 대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 드린 마음은 인간 관계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다른 사람들을 밖으로 밀어내지 않고, 우리의 권리만 주장하지 않으며, 자신만 생각하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항복하기에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바로 돈이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다. 하지만 나는 또한 돈도 많이 벌어 편안하게 살고 은퇴하고 싶다.” 그러나 은퇴는 하나님께 항복한 삶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최대 관심인 돈과 하나님 사이에서 우리가 왔다갔다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고 말씀하신다. 스스로를 항복하며 내어드린 가장 훌륭한 예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날 밤 예수님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계획에 항복시키셨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당신이 이 고통을 거두어가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면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잇다는 것을 이미 믿고 계셨기 때문이다. 대신 “이 고통을 거두는 것이 당신을 위한 것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이 고통이 당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쓰인다면 저 역시 그것을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셨다.
진정한 항복은 “아버지, 만약 이 문제, 이 고통, 이 아픔 혹은 이 상황이 당신의 목적과 영광을 위해 필요하다면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정도로 성숙하게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피땀을 흘리실 정도로 고민하셨다. 삶을 항복하며 내어드리는 것은 힘들 일이다. 우리의 경우에 그것은 자기 중심적인 본성과 싸우는 치열한 전쟁이다.
항복의 축복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온전히 내어드릴 때 누리는 복에 대해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첫째 우리는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22:21). 둘째, 우리는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봉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7~18). 셋째,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집요한 유혹과 어려운 문제들을 그리스도께 맡길 때 그분의 능력으로 모두 해결받을 수 있다. 
여호수아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쟁을 앞에 두고 (수5:13~15) 하나님을 대면했다. 그는 그분 앞에 무릎을 끓고 경배를 드렸으며, 자기의 계획을 모두 맡겼다. 그 항복이 여리고에서의 승리를 가능케 했다. 이것이 바로 역설이다. 항복할 때 승리한다. 하나님께 항복할 때 우리는 더 강해진다. 하나님께 삶을 내어드리면 우리는 다른 것에 항복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는 말했다. “인간의 능력이 어느 정도 위대한지는 그가 얼마나 하나님께 삶을 드렸는지에 따라 설명될 수 있다.” 하나님은 항복한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마리아를 선택해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 이유는 그녀에게 재능이 있거나, 부유하거나,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마리아가 하나님께 완전히 삶을 맡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천사가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했을 때 마리아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하나님께 드린 삶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보다 강력한 것은 없다. “그러니 네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드려라”(약4:7, NCV).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
모든 사람은 결국 어떤 것엔가 또는 누구에겐가 항복한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 돈, 분노 혹은 두려움, 자만심, 욕망 그리고 자아에 항복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만들어졌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상을 만들어 그것에 항복한다. 우리는 항복할 대상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그 선택 뒤에 따라오는 결과들에 대해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E. 스탠리존스(E. Stanely Jones)는 말했다.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당신은 큰 혼돈에 항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삶을 드리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의 방법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삶의 방법이다.
 다른 어떤 것도 안 된다. 다른 모든 방법은 좌절, 실망 그리고 자기 파괴를 낳을 뿐이다. 킹 제임스 성경(The king James Version)은 항복을 ‘너의 마땅한 섬김’(롬12:1,CEV)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현명한 방법’ (롬12:1,CEV) 이라고 말한다. 삶을 모두 드리는 것은 어리석은 감정적인 자극이 아닌 이성적이고 지적인 행동이다. 가장 책임 있는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 우리가 가장 현명하게 행동하는 순간은 하나님께 ‘예’라고 대답하는 순간이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주시는 복을 막는 가장 큰 요인이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 즉 우리의 의지와 집요한 자만심, 개인적인 야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 스스로의 계획에 초점을 맞춰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의 가장 큰 일을 하려고 하신다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하실 것이다 그러니 모두 하나님께 드리라. 과거의 후회, 현재의 문제들, 미래의 야망, 두려움, 꿈, 약점, 습관, 상처 그리고 우리가 가진 열등감까지…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운전석에 앉게 하고 핸들에서 손을 떼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분의 손 안에서 통제 불가능한 것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지배하실 때 우리는 그 어떤 것도 감당할 수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울처럼 될 것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눈부신 빛을 보고 쓰러진 후 바울은 그의 삶에서 항복하는 순간을 맞이하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덜 극적인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지만 항복하는 방법과는 상관 없이 항복하는 것은 단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다(고전15:31). 항복은 시간 (Moment)이라는 개념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하고, 또한 연습(Practice)이라는 면과 연결시켜 생각해야 한다. 
즉 항복의 삶은 매순간 이루어져야 하고, 평생 해야 하는 것이다. 산 제물의 문제는 그것이 제단에서 내려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에 50번씩 삶을 다시 드려야 할 지도 모른다. 항복의 삶은 매일의 습관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 나를 따르려 한다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나를 따르기 위해 매일 매일 자신들의 삶을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눅9:23,NCV).
한 가지 경고하고 싶다. 우리가 완전히 항복한 삶을 살기로 결심할 때 그 결심에 따르는 시험이 있다. 때로는 그것이 불편하고,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으며, 비용이 많이 들거나,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려고 마음 먹은 것의 정반대의 것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대학생 선교회(Campus Crusade for Christ)의 창립자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크리스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은 빌 브라이트(Bill Bright)다. 전 세계에 있는 선교회 회원들과 사영리 소책자, 그리고 10억명이 넘게 본영화 <예수(Jesus)>를 통해 1억5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고 그들은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어느 날 내가 빌에게 이렇게 물었다. “빌, 왜 하나님은 당신을 사용하시고 당신의 삶에 그렇게 많은 복을 주시는 걸까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젊었을 때 나는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네. 나는 직접 계약서를 쓰고 밑에 서명을 했는데, 거기 ‘바로 이 날부터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라고 썼다네.”
당신은 그런 계약서에 서명을 했는가? 아니면 아직도 당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려고 하실 때 하나님과 논쟁하고 싸우고 있는가? 이제는 모두 내어드릴 때다. 하나님의 은혜, 사랑 그리고 그분의 지혜에 모두 항복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