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의성의 빈농(貧農)에서 태어나 해병대를 제대했고, 잘 나가던 은행원 생활을 청산하고 어느 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상륙’한 배짱 좋은 사나이. 빌딩 청소부로 미국 이민생활을 시작, 부동산에 눈을 뜬 그는 오늘날 미주 한인 최대의 부동산그룹인 뉴스타부동산그룹 및 부동산 경제채널 KNT의 최고경영자이자 지난 봄 로스엔젤레스 한인회장에 당선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를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말이 있으니, ‘빌딩 청소부에서 부동산 그룹 CEO가 된 사람’ ‘300달러로 매출 30억 달러가 넘는 기업을 일군 사나이’다. 맨주먹 쥐고 태평양을 건넌 그가 어떤 방법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했을까. 그 비결을 알아보기 위해 잠시 귀국한 남문기 회장과 만났다. 그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심사위원으로 참석하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필자에게 붙잡힌 셈이다. 그는 “5시에 세종문화회관에 도착해야 하니 딱 한 시간만 만나자”고 했다.
남문기 회장은 빨간 넥타이에, 자신의 회사 이름이 새겨진 정장을 입고 나타났다. 그는 정신없이 바빴다. 일정을 묻자 “말도 마소. 버지니아에 갔다가, 뉴저지, 미네소타를 거쳐 애틀란타에서 비행기를 탔어요. 내일은 고향인 경북 의성에 성묘를 다녀와야 하고…” 하고 답한다. 그는 토요일 새벽 중국으로 날아갔다가 다음날 세 시 인천공항에 도착, 다시 서울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을 끝내고 화요일 오후에 출국했다. 그에게 있어 시간이란 곧 ‘돈’이자 ‘기회’이며 ‘창의력을 배양하는 시간’인 셈이다.
在美 한인회를 하나로 묶는 작업 시도
남 회장이 최근 들어 미국 전역을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는 이유는 미국 한인회의 위상정립을 위해서라고 했다. 지금 미국 각지에서 활동 중인 한인회는 활동도 미약할뿐더러 대표성에도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미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회를 하나로 묶는 힘 있는 단체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역량들이 분산되는 바람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 회장은 “미국 전역에서 활동 중인 재미 한인회를 명실상부한 조직으로 통합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 7~8개 주를 순방하여 한인회장들과 회동했는데, 원칙적으로 다들 찬성하는 분위기”라고 했다. 이런 일들을 계기로 한인회 활동을 한 단계 격상시켜 명실상부한 한인 사회의 파워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의견이었다. 남 회장은 또 “지금까지 기업운영 경험을 LA 한인회에 쏟아 부어 LA 한인회가 더 활성화되는 계기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남 회장은 “처음 LA 한인회장 선거에 도전장을 던졌을 때는 재미 교포 사회에 새마을운동을 전파하고 싶었다”면서 “그 동안 기업 운영에서 쌓은 모든 경험과 노하우를 바쳐 한인 2세, 3세들이 미국 주류사회에 진출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한인사회가 더욱 번영하여 미국 내에서 무시못할 파워를 가진 세력으로 성장시키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남문기 회장은 지금은 미국 전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스타 기업인이 됐지만, 그 이름이 미국 사회에 알려지기까지는 땀과 눈물, 열정과 도전, 그리고 “불가능은 없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해병대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빌딩 청소부로 미국 생활 시작
1982년 1월 23일.
잘 나가던 은행 직원이던 청년 남문기는 주머니에 300달러를 달랑 넣고 미국에 도착했다. 우연히 주한미군 출신의 청소 사업가와 길거리에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첫 직업은 빌딩 청소부로 정해졌다. 그는 “어떻게 하면 청소를 잘 할 것인가”를 끝없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샘솟는 아이디어를 업무 현장에 적용했다. 청소원들이 새참 먹으러 나가는 시간이 아까워 자신이 손수 새참을 준비해서 현장에서 먹이기도 했다.
불과 6개월 만에 그는 청소의 달인(達人)이 됐고, LA 인근에서 최고의 프로패셔널 청소부라는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자기가 몸담았던 회사의 매출을 수십 배까지 신장시켜주었다. 그러나 그가 ‘청소업의 達人’에 머물기에는 꿈이 너무 컸고, 넓고 넓은 아메리카에는 기회가 너무 많았다.
그는 4년 만에 청소업에서 손을 떼고 부동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청소업을 하며 깨달은 교훈은 ‘부동산 경기가 살면 전체 경기가 살아나고, 부동산 경기가 죽으면 전체 경기가 죽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미국 경제의 지휘자는 부동산이었고, 부동산은 결코 망하지 않는 비즈니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부동산에 뛰어들기로 작정하고 죽기 살기로 부동산학을 파고들었고, 1987년 12월 16일 부동산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그는 이 날을 기리기 위해 자신의 기업인 뉴스타그룹의 송년회를 매년 12월 16일에 연다.
부동산업에 뛰어든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일간신문, 입간판, 옥외광고, 인쇄물 등을 가리지 않고 각종 매체를 동원해 광고 폭탄을 퍼 부었다. 버스정류장 벤치에도 그의 사진과 이름이 새겨진 광고를 붙였으며, 각종 판촉물을 만들어 그의 얼굴과 이름을 알렸다. 당시 광고에 새긴 슬로건은 오늘날까지 그의 좌우명이 된 “잘하겠습니다”라는 한 마디였다.
그는 골프장에 갈 때마다 ‘뉴스타부동산 남문기’라고 새겨진 골프티를 챙겨나가 자신이 치고 지나간 티 박스마다 몇 개씩 뿌려놓았다. 그의 뒤에 오는 골퍼 가운데 그의 이름이 박힌 티를 주워가라는 뜻에서였다. 첫 홀에서 티를 주울 때는 “누가 티를 흘리고 갔군” 이렇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세 번째 홀, 네 번째 홀, 마지막 홀에서 계속 ‘뉴스타부동산 남문기’가 새겨진 티를 주웠다고 생각해보자. 그는 ‘남문기’라는 이름을 확실히 기억하게 될 것이다.
1년 수입의 절반을 광고에 쏟아 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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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기 회장의 성공 스토리를 담은 책 '잘 하겠습니다' |
그는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알리기 위해 1년 수입의 절반을 광고비에 투자했다. 가히 융단폭격을 방불케 하는 대공세였다. LA 한인타운 한복판에 매월 수천 달러의 비용을 들여 자신의 얼굴과 연락처가 새겨진 빌보드 광고를 올렸다. 삼성, LG, 현대자동차 등 한국의 내로라하는 대기업들도 미국에 이런 공세적인 광고를 펴는 것을 망설이던 시절, 그는 부동산에 미친 사람이 되어 모든 것을 다 걸다시피 하는 비장의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광고 공세와 함께 그는 샘솟는 아이디어로 부동산 업계를 놀라게 하는 서비스 기법을 선보였다. 예를 들면 매각 의뢰를 받은 집의 오픈 하우스가 예정된 날이면 집 주변에 매물 안내 표지판을 부착하는데, 다른 에이전트들이 반경 1마일에 표지판을 꽂는다면 남문기는 2마일을 꽂았다. 또 1회의 오픈 하우스에 다른 에이전트들이 30개의 표지판을 부착하는 것을 알고는 그는 100개 이상의 표지판을 부착했다. 또 의뢰를 받은 고객의 집을 찾아가 잔디를 깎아주거나, 거래가 잘 성사되도록 청소 서비스를 해 주기도 했다.
광고작전이 주효했고, 기발한 서비스 기법 덕분에 캘리포니아 전체에 ‘남문기’란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는 1년 만에 스타가 됐다. 한 달에 28건의 매물을 소화하면서 적지 않은 돈을 만지게 되면서 그는 자신만의 회사를 차리고 이름을 ‘뉴스타’라 지었다.
뉴스타는 미국 전역으로 지사망을 넓혀갔다. 캘리포니아 전역으로 지사가 퍼져나감은 물론 뉴욕, 워싱턴, 버지니아, 메릴랜드, 조지아, 라스베가스, 뉴저지, 덴버, 필라델피아, 시애틀, 플로리다. 올란도, 샌프란시스코, 애리조나, 피닉스, 캐나다 밴쿠버 등에 지사를 열었다. 현재 북미 전역에 51개의 뉴스타 체인점이 활동 중이고, 한국에도 진출하여 현재 20개의 체인점이 운영되고 있다.
오늘날 뉴스타부동산 소속 에이전트는 1,200여 명, 그 중 300~400명은 벤츠를 타고 다닌다. 이 회사 소속 에이전트들의 자동차 번호판에는 ‘뉴스타’라는 로고가 새겨져 있다. 직원들은 ‘뉴스타 패션, 뉴스타 헤어스타일’이라고 알려진 감색 정장, 혹은 빨간색 정장에 뉴스타 로고가 새겨진 흰색 와이셔츠 , 단정하고 짧게 커트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
남 회장은 “뉴스타 소속 에이전트들이 앞장서서 지난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재미 한인교포들의 재산을 15조 원 가령 늘려주었다”고 말한다. 2000년에 35만 불 주고 사 준 주택이 80만~90만 불로 올랐기 때문이라는 것. 남 회장의 경우 2000년에 LA 한인타운 버몬트에 위치한 뉴스타 본점 건물을 255만 불에 구입했는데, 지금은 700만 불을 호가한다고 한다.
남문기
회장이 전하는 성공학 강의 1.꿈과 자기 암시의 효과 -꿈이란 미래에 대한 비전이다. 꿈이 없는 것보다 꿈이 있는 것이 꿈을 이룰 가능성이 훨씬 높다. 꿈을 세우고,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하고야 만다는 자기 암시를 걸어라. 2.성공한 사람을 벤치마킹하라 -벤치마킹이란 ‘베끼기’다. 성공하고 싶으면 성공한 사람을 따라 하라. 자신의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성공한 사람을 베끼는 것이다. 3.수도 펌프질 하듯 세일즈를 하라 -처음엔 물이 나오지 않아도 힘차게 펌프질을 하라. 일단 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천천히 펌프질을 해도 물이 잘 나온다. 4.시간은 돈이다 -아침 7시 이후까지 잠을 자는 것은 죄악이다. 가장 먼저 출근해 부지런히 일하라. 자투리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말고 잘 활용하라. 5.아이디어를 찾아주는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意自見) -책을 100번 읽으면 그 뜻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열심히 공부하면 그 뜻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6.원칙과 노력은 세일즈의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정직과 성실을 최우선으로 삼고 매사에 열심히 노력하라. 일을 사랑하고, 그 일에 미쳐라. 7.계획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계획하는 것과 같다 -계획을 세우는 데 한 시간을 투자하면 그것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네 시간 단축할 수 있다. 성공하려면 먼저 계획을 세우고, 일정 시간이 지난 다음에 과정을 분석한 후 또 다시 상황에 맞는 계획을 세워라 8.당신의 자신감이 고객에게도 전염된다 -스스로를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 또한 그를 믿을 것이요,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또한 그를 믿지 못한다. 자신감이야말로 성공의 으뜸가는 비결이다. 9.배짱을 가지고 밀어붙여라 -하면 된다. 안 되면 될 때까지. 최후의 승리는 실천하는 자의 몫이다, 어떤 일이든 이리저리 재다가는 찾아온 기회마저 달아나버린다. 10.콜드콜링(혹은 텔레마케팅)에서 성공하는 비법 -헤드폰 형태로 된 성능 좋은 전화기를 이용하라 -입가의 힘을 풀고 웃으며 말하라 -두 손을 마음대로 움직여 제스추어를 쓰며 말하라 -자료를 충분히 준비하고 대화하라 11.진심으로, 그리고 기술적으로 칭찬하라 -인연의 고리를 만들 명분을 찾으라. -서로 정이 통할 수 있는 끈을 찾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보여라.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어라. -다른 사람에게 혜택을 먼저 주어라. 식사비는 반드시 당신이 내라. 식사를 하면서 상대를 구체적으로 칭찬하라. 12.얌전한 새색시보다 톡톡 튀는 마당쇠를 고객이 알아준다 -자신을 알리는 데 주저하지 않아야 많은 고객을 확보할 수 있다. 고객이 먼저 다가와 주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행위다. -식당에 갈 때 단정한 유니폼에 이름표를 달고 제일 노출이 잘 되는 곳에 앉아라 -자동차 옆에 자석으로 된 이름표를 부착하라 -동창회나 향우회, 친목회 등의 모임에서는 가능하면 총무 등 주로 연락 업무를 담당하고나 가장 일을 많이하는 직책을 맡으라. 13.기회는 준비된 자의 몫이다 -‘얼렁뚱땅’과 ‘대충대충’이라는 기생충과 병균을 박멸하라. -공부와 다리품을 팔아라 -우스갯소리, 골프, 테니스 같은 특기를 개발하라 |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한 만큼 그는 뜻있는 곳에 돈을 쓰는 데도 열심이다. 남 회장은 미국 생활을 하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이 미국 최고의 갑부들이 펼치고 있는 ‘책임 있는 부자’(Responsible Wealth) 운동이라고 말했다. 상속세 폐지 반대, 공평 과세, 최저임금 인상,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확대, 최고경영자의 연봉 축소…. 이런 운동과 더불어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같은 갑부들은 자신의 재산의 거의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했다.
이런 모습을 보며 남 회장도 연간 50만 불 정도를 한인사회 및 미국 지역사회를 위해 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 회장은 “앞으로 교포사회를 이끄는 분들이 합심하여 한인 2세, 3세들이 시장, 주지사 등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데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1,000만 명의 한인(韓人) 이주 작전
남 회장은 5년 전부터 ‘미국 땅에 한인 1,000만 명 이주작전’을 개시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중의 하나인 미국에 한국인 1,000만 명을 이주시켜 미국 속에 또 하나의 한국을 건설한다는 프로젝트다. 그가 이 구상을 하게 된 것은 1992년 4월 29일, 생각하기도 싫은 LA 폭동을 경험하면서부터였다. 흑인들의 폭동이 걷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해병대 출신이었던 그는 해병전우회원들과 함께 완전무장하고 가든그로브 한인타운 복판에 위치하고 있던 자신의 회사에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가든그로브 지역의 한인타운을 지켰다.
이 와중에 그는 폭동의 불길이 한인타운으로 번져가는 것을 분석해 보았다. 흑인들의 폭동을 미리 예상한 경찰 등 공권력이 흑인 밀집지역으로부터 외부로 통하는 통로를 모두 봉쇄하고 흑인 밀집지역의 북쪽에 있는 한인타운으로 통하는 길만 열어놓았기 때문에 한인타운이 철저히 당한 것이다.
그는 “만약 한인 중 LA 시의원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통탄했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미국 내에 시의원도 한인이 맡고, 시장도 한인이 맡는 그런 도시를 만들기로 말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 도시의 이름을 ‘뉴스타 시티’로 정하고 그 도시의 공항 이름은 자신의 이름을 붙이겠다는 꿈을 세웠다. 뉴욕의 경우 뉴욕 시장을 지낸 라과디어의 이름을 붙인 라과디어 공항이 있고, LA공항에는 브래들리 LA 시장의 이름을 붙인 브래들리 터미널이 있지 않은가.
뉴스타 시티는 드넓은 미국 내에 한국인들이 살아갈 거점이며, 이 거점을 중심으로 더 많은 한인들이 북미 전역으로 진출하여 한인들의 생활공간, 경제공간을 넓힌다는 프로젝트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남 회장은 “뉴스타 시티 프로젝트는 우선 뉴스타 그룹에서 은퇴하는 분들이 모여 사는 도시로 출발하여 점차 그 규모를 넓혀갈 예정”이라면서 “LA에서 라스베가스 가는 쪽에 터를 잡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지금 당장 이민을 떠나라
이런 꿈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현재의 교민 300만 명 정도 가지고는 무리이며, 무엇보다 한국으로부터의 이민이 지금보다 더 활발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30~40대, 50대에 실직한 한국인들은 한국을 떠나지 못하고 좁은 한국 땅 안에서 뭔가 돌파구를 찾으려들 뿐 해외 이민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는 한국인들을 향해 “용기를 갖고 해외로 떠나라”고 외친다.
“제가 미국을 떠날 때만 해도 영어 한 마디 못하고, 주머니에 단돈 몇 백 달러 쥔 채 미국에 건너온 교민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래도 미국에 건너와 가족들 다 먹여 살리고 자녀들 일류학교에 넣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지금은 그 때에 비해 영어도 제법 할 줄 알고, 적어도 몇 만 불은 손에 쥐고 계신 분들이 많아요. 다만 새로운 미래에 도전하는 ‘용기’가 부족한 것이 문제입니다. 미국은 기회의 땅이고, 할 일은 무한대로 널려 있어요. 교육 잘 받고, 손재주 뛰어난 강인한 한국인들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는 “두 손에 몇 만 달러의 돈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는 용기”라면서 “용기가 있는 자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라고 말했다. 또 “미국은 직업의 귀천이 없는 나라”라면서 “어떤 직업이든 프로패셔널의 경지에 오르면 대접을 받는 나라가 미국”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세계의 중산층들이 자기 재산을 싸 가지고 이민을 오는 나라입니다. 워낙 사회가 투명하고 법치국가이기 때문에 경기변동이 크지 않고, 또 LA 지역의 경우 영어를 하지 못해도 얼마든지 생존이 가능한 나라입니다. 누구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면 두려움을 갖게 마련이지만, 그래서 100년 후를 내다본다면 한국보다는 미국이 훨씬 더 성공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정년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 ‘이민의 찬스’
남 회장은 한국 사회에 ‘정년’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민의 찬스’라고 말한다. 과거에는 정년이라는 달콤한 유혹이 있어 모험에 도전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요즘엔 어차피 극소수의 특수 업종을 제외하고는 정년 보장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한 살이라도 나이가 덜 들었을 때 자신의 인생을 걸고 ‘이민’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졌다고 지적한다.
그는 빈손으로 와도 좋고, 만약 퇴직금으로 30만 불 내외의 자금을 동원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면 소규모 자본으로 한국인들이 도전해 볼 만할 업종으로 세탁소, 샌드위치 가게, 도너츠 가게, 커피숍, 잡화가게 등을 추천했다. 이런 직업을 통해 자본이 축적되어 100만 불 정도가 되면 모텔업도 유망 업종이라고 한다. 한국인들이 많이 하고 있는 세탁소는 미국에서는 ‘고급 업종’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약간의 돈이 모이면 부동산에 투자할 것을 권했다. 미국 부동산의 흐름에 대해 남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1968년 평균 주택가격이 2만 3,210달러였는데 2003년에는 그보다 16배가 오른 37만 2,700달러였습니다. 미국 전국으로 보면 1968년엔 2만 100달러, 2003년엔 17만 달러로 8.5배가 올랐습니다. 그러니까 부동산은 사두면 언젠가는 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언론에서 미국 부동산의 거품이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보도가 줄을 잇고 있다고 하자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
“1988년 한 해에 부동산이 100% 오르는 등 급등하다가 1991년부터 95년 사이 부동산이 바닥을 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이자율이 10.5%였어요. 2000년부터 2005년까지 평균 이자율은 5~6%대였고, 현재 이자율이 6%선입니다. 지난 30년간 평균 이자율이 9.5%인데, 이 정도 금리로는 집값에 큰 영향을 주기 어려워요. 1990년대 초반에 20만 불 하던 집이 지금은 70만 불입니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도 주택 가격이 계속 올라 상투라고 겁을 내고 집을 안 산 분들 지금 크게 후회하고 있어요. 미국 부동산 투자는 지금이 적기입니다. 지금 사두면 10년 후엔 반드시 오르게 되어 있는 게 부동산입니다. 현재 한국인들이 주목하고 있는 LA지역은 샌프란시스코나 다른 지역에 비해 집값이 싼 편인 데다가 공급이 모자라 투자가치가 충분하다고 봐요.”
“LA 부근의 주택가격은 더 오를 가능성 높다”
남 회장은 “LA지역은 집값이 쉽게 떨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더 오를 가능성이 있는데, 언론이 하도 겁을 줘서 약간의 침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남 회장은 LA 도심에서 40마일 정도 떨어진 얼바인(남쪽), 발렌시아(북쪽), 랜초 쿠카망가(동쪽) 지역을 주목할 것을 권했다. 얼바인은 잘 계획된 전원도시로서 안전하고 주택가와 상업지가 공존하며, 제2의 실리콘밸리가 조성되고 있고, 학군도 좋아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발렌시아는 새 주택들이 많고, 매직 마운틴과 같은 산과 숲이 있는 도시라서 경관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며, 랜초 쿠카망가는 전반적으로 주택가격이 저렴하며 경관도 훌륭하고 학군도 좋아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지역이라고 한다.
남 회장은 “60평 정도 개인주택을 기준으로 할 때 얼바인은 65만~70만 불, 발렌시아는 50만 불 내외, 랜초 쿠카망가는 45만 불 내외면 구입이 가능하다”면서 “미국 부동산은 대부분 은행 융자를 받아 구입하므로 24~20만 불 정도만 가지면 이 지역 주택 구입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적당한 비즈니스를 찾아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틈틈이 모은 돈으로 내 집 마련을 하면 미국 정착은 성공한 셈이다. 남 회장은 “미국에서 뿌리 내리는 것이 한국보다 더 쉽다”면서 젊은 나이에 명퇴하고 실의에 빠져 있는 분들은 지금이라도 용기를 내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것을 권했다.
남 회장은 끝으로 “사업가로서 부동산뱅크, 부동산학교, 소유권 보증회사 등 부동산과 관련된 분야의 계열화를 완성하고 싶고, LA한인회장으로서 젊은 한인들의 주류사회 진입을 지원하며, 마지막으로 한국의 부동산 관련 업무의 선진화 및 법 정비를 돕고 싶은 것이 마지막 남은 과제”라고 말했다.
현재 미국에는 약 300만 명 정도의 한인 교포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그 중 LA 인근에 약 100만 명 정도가 모여 산다. 그런데 LA 인근 지역의 한인 인구가 500만 명이 되고, 1,000만 명이 된다면 법적으로나 행정구역상으로 그곳은 미국이지만 실제로는 한국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 회장의 설명.
“현재 인구 100만 명 정도가 모여 살고 있는 LA 인근의 경우 운전면허 시험도 한글로 치고, 투표도 한국어 투표용지로 합니다. 그렇다면 한인 인구가 1,000만 명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차원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미국으로 이민을 오시기를 바랍니다. 한국인들은 조국을 떠나야 위대해지는 민족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