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전도여행과 섬
로마로 압송돼 가던 바울이 무라에서 갈아탄 알렉산드리아호는 풍랑으로 인해 그레데 섬 동쪽 살모네 앞을 지나 남쪽 해안을 따라가다가 간신히 라새아 성에서 가까운 미항에 도착했다. 바울은 금식하는 절기가 지나 행선하기가 위태함을 알고 이곳에서 겨울을 보낸 후 이달리야(이탈리아)로 가기를 백부장에게 권했다(행 27:6∼11)
미항(Fair Havens)은 잘 정돈되지 않은 채 해수욕장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지명이 의미하는 ‘아름다운 항구’ ‘좋은 항구’라는 뜻 그대로 경치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리더노스곶의 동쪽에 있는 하나의 만과 동일시되는 미항의 항구는 동쪽과 남동쪽으로 열려있다. 라새아의 유적지를 발견했던 스프레트 선장은 1853년에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바울에게 드렸던 한 교회의 유적을 발견했다(행 27:8).
성경에 보면 바울을 로마로 압송해 가던 배가 이곳 미항에 정박해 있는 동안 바울은 이곳에서 겨울을 지나기를 백부장에게 권했으나 그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미항을 떠나 뵈닉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다(행 27:7∼15)고 기록하고 있다. 뵈닉스는 미항에서는 배로 3∼4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다. 그렇다면 선장과 선주가 말한 대로 몇 시간만 가면 겨울을 안전하고 편하게 보낼 수 있는 뵈닉스로 가는 것이 더 합리적인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몇 시간의 항해만 하면 겨울을 편하고 안전하게 보낼 수 있는데 구태여 불편한 미항에서 겨울을 보내자는 바울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바울의 태도를 더 기뻐하시는 것을 미항을 떠나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 지경에 이른 사건에서 깨닫게 하셨다(행 27:9∼26) 바울이 이곳에서 잠시 머무르는 동안 기도했다고 전해지는 바울동굴은 항구 언덕 위에 나무십자가를 세워놓았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다.
사모드라게 섬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들렀던 곳으로 성경에서 꼭 한번 언급된 곳이다(행 16:11). 사모드라게(Samothrace: 트라키아의 사모스라는 뜻) 섬은 트라키아 해안에서 떨어져 있는 그리스 군도상의 섬으로 에게해 동북부에 위치해 있다. 이 섬은 그리스로부터 흑해로 들어가는 굽은 뱃길에 위치하고 있어 고대에는 여행자들과 식민지 개척자들,그리고 상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항구 중의 하나였다.
이 섬에는 4개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그 중 가장 높은 펩가리산은 해발 1650m로 에게해의 선원들에게 등대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섬에는 BC 8세기에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이곳에서 트라키아인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 섬을 트라키아의 사모스라고 명명했다.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은 이 섬의 꼭대기에 서서 트로이 전쟁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전성기에는 해군기지의 역할도 한 곳이다.
19세기 중엽 ‘사모드라게의 승리’로 알려진 배의 유물이 발견된 후 시작된 발굴작업이 1938년 이후 재개돼 알렉산더와 그의 후계자들 시대에 건축된 12개의 건물 잔해를 포함하는 ‘위대한 신들의 사원’의 유적을 발굴해냈다. 이 위대한 신들에 대한 예배는 헤로도토스와 플라톤,아리스토파네스의 글에도 언급돼 있다. 그 예배의 제사에는 각 도시의 사절과 순례자들이 그리스 전국과 소아시아 지역에서까지 모여들었다.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때 네압볼리로 가는 도중 이곳을 방문했다(행 16:11). 바울이 탔던 배는 일단 사모드라게 섬에 기항했는데 아마 기항한 곳은 현재 이 섬의 북서쪽에 있는 가장 큰 항구인 카마리오티사 항구였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 교회의 유적이 1938년 이 항구의 변두리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바울이 마을 상륙을 기념해 세운 것인지도 모른다. 바울은 터키의 드로아에서 이곳 사모드라게를 거쳐 유럽의 첫 입항지인 네압볼리로 갔다. 항구에서 6㎞쯤 떨어진 유적지에는 아직도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특별히 니케(Nike) 신의 신전 기둥이 있다.
사모스 섬은 터키 트로길라온곶에서 1.6㎞ 지점에 있으며 에게해 동남부 이오니아 제도 중의 한 섬으로 에베소 남서쪽, 밀레도의 북서쪽에 있다. 이 섬은 동서의 길이가 43㎞,가장 넓은 곳은 24㎞ 정도이다. 흰 모래 해안과 마을,그리고 고기잡이 항구가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이곳을 한글개역 성경에서는 사모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섬의 주요 도시들은 바울 시대에는 자유시였다. 바울은 전도여행 중 기오 섬을 떠나서 사모스 섬에 들렀다가 다음날 밀레도로 갔다(행 20:15).
특히 피타고리온 항구는 피타고라스 정리로 유명한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의 고향으로 그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다. 그래서 이 항구 부두에는 삼각형 형태의 피타고라스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항구 옆에는 해수욕장,언덕 위에는 교회와 옛 성채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들은 기원전 11세기께 이오니아인들로 이들은 일찍부터 무역에 나서서 기원전 620년께에는 지브롤터 해협 밖에까지 진출하였다. 기원전 6세기에는 폴리크라테스라의 통치로 절정기를 이루었으며 문학 예술 철학 등 다방면으로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수도가 건설되고 항구와 헤라 신전도 건조되었는데 피타고리온 항구 산중턱에는 당시 바위를 파서 건설한 수로가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이후 아테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헬레니즘 시대에는 남쪽에 있는 로도스 섬(행 21:1)의 번영과 함께 쇠퇴하였다. 그후 기원전 133년 오랜 기간 로마의 속주로 있다가 15세기 이후에는 터키의 지배를 받았고 1923년에 로잔 조약에 의해 그리스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모스 섬의 동남쪽 해안에는 평야지대가 있어 포도 올리브 목화 등이 생산되는데 이곳의 포도는 예부터 맛이 좋기로 유명했으며 오늘날에도 이곳의 포도주는 국제적으로 인정 받고 있다. 그리고 이곳은 섬지역치고는 나무가 많아 조선업이 발달했는데 빌린 차로 섬을 가로지르자 지금도 산중턱에서 나무로 배를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 이곳에서 가장 큰 도시는 북쪽에 있는 바티항으로 천혜의 입지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해변에는 역사박물관이 있는 공공도서관을 비롯해 은행 여행사 영국?독일?프랑스영사관들이 들어서 있고 일렬로 늘어선 쇼핑점과 카페,레스토랑들이 아름다운 해안과 잘 어우려져 바티항의 독특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4만여명이 거주하는 이 섬의 중앙에는 해발 1433m나 되는 케르케테우스 산이 있다. 헤라 신전은 사모스 섬의 예배장소였으며 문화적으로 자랑할 만한 건축물이다.
이곳의 신전은 사모스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기원전 2000년초에 헤라 신전은 투박한 헤라상을 가진 단순한 은신처에 불과했으나 기원전 8세기에는 길이 100ft의 헤라 신전이 건축되었고 이후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던 기원전 7세기에는 더욱 화려한 신전이 재건축되었다. 그러다가 100년후인 기원전 6세기께에는 고대 그리스 신전 중 가장 큰 신전이 되었다. 독재자 폴리크라테스가 지배할 당시에는 길이가 108.7m나 되는 이오니아식의 장엄한 신전이 재건축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헤라 신전에는 기둥 1개만 외롭게 우뚝 솟아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부서지고 무너진 채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 신전에서는 기원전 6세기 중엽 사모스파의 작품인 여성 입상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원주를 연상시키는 원통형의 직립상으로 오른손은 겨드랑이에 붙이고 왼손은 가슴에 대고 있으며 세로로 섬세하게 주름이 새겨진 키톤(chitoon:그리스에서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남녀가 함께 입었던 옷)을 입고 있다. 이 여성 직립 입상 중에서 잘 알려진 것 가운데 하나가 현재 파리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케라뮤에스 봉납의 부인상’이다. 이러한 엄청한 규모의 헤라 신전이 있었던 사모스 섬에 오늘날 도시 뿐 아니라 산중턱과 꼭대기까지 쥬도코스 피기 수도원을 비롯하여 수많은 수도원과 교회가 세워진 것은 바울이 이곳에 최초로 뿌린 복음의 씨앗 때문이다
기오 섬은 에게해의 동부 중앙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터키 본토에서 직선거리로 8㎞밖에 안 떨어져 있지만 그 사이에는 작은 섬들이 산재해 있다. 기오 섬은 남북이 51.2㎞,동서가 12.8∼28.8㎞에 이른다. 이 섬의 가장 큰 항구는 섬 이름과 같은 기오 항으로 오늘날의 명칭은 시오(Chio) 또는 히오스(Hios)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고스 섬에서 레스보스(성경의 미둘레네)로 가려던 헤롯왕이 북풍에 의해 기오 섬에 밀려와 그 도시의 기둥들을 재건할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바울 시대에 기오 섬은 아시아의 로마 영토에 있는 자유도시 중의 하나였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던 노정에서 미둘레네로부터 남으로 항해하여 밤새도록 기오 맞은편 본토에 정박하였다가 다음날 보다 더 넓은 바다를 건너 사모에 도착하였다(행 20:14∼15). 그러나 나는 바울과는 반대 방향인 남쪽의 사모스 섬에서 이곳 기오 섬으로 들어왔다.
이 섬의 최초의 주민은 크레타인과 가리아인들이었으나 이오니아인에게 정복되었다.
이오니아인들은 이곳을 번창시켰다. 현재 이 섬의 가장 큰 기오 항은 비잔틴 시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도시답게 아직까지도 당시의 모습들이 남아 있다. 도시의 중심부에는 1210년 터키 시대에 세워진 성의 일부가 남아있는데 지금은 조각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의 특산물로는 청색의 대리석이 유명한데 지금도 많은 양의 대리석이 채굴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생산되는 비단은 프랑스 리옹으로 수출될 만큼 질이 좋으며 그 외에 오렌지 아먼드 유향수지 피혁 등도 수출 품목들이다. 항구의 서쪽에는수도원이 자리잡고 있다. 유네스코 지정문화재인 이 수도원은 1045년 세워진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건물 중심부는 기둥이 없는 15.5m 높이의 둥근 지붕에 정사각형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곳에는 당시의 유명한 성모 마리아의 이콘이 있다. 그러나 1822년 터키인들에 파괴돼 지금은 모자이크 벽의 일부만 남아 있다. 그리고 기오 섬에는 호메로스를 비롯하여 유명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가우다 섬은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바울이 탄 배가 유라굴라라는 광풍을 만났을 때 간신히 피난했던 곳이다(행 27:14∼16). 가우다섬은 오늘날의 그리스어로는 ‘가브도스’라고 하며 이탈리아어로는 ‘고조’(Gozzo)라고 한다. 이 섬은 그리스 최남단에 있는 작은 섬이다. 바울을 로마로 압송해 가던 배가 항해 중 풍랑을 만나 그레데 남쪽 해안을 따라 표류하다가 이곳 가우다 남쪽 아래쯤 왔을 때 간신히 피난할 수 있었다(행27:15∼16)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들른 로도(Rhodes) 섬은 고스 섬 남쪽으로 85㎞쯤, 터키 소아시아의 해협으로부터는 약 17㎞ 떨어져 있는 지중해의 작은 섬이다. 에게해 대부분의 섬과 마찬가지로 로도 섬도 터키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나 그리스에 속해 있다. ‘로도’는 섬 이름인 동시에 항구 이름이기도 하며 그 이름의 뜻은 ‘장미꽃’이다. 섬의 크기는 에게해에서 그레데 다음으로 크며 너비 67.2㎞,길이 27.2㎞가 된다.
이 섬은 땅이 비옥하고 기후가 온화하여 숲이 무성하고 농산물과 과일이 많이 생산된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도중 고스를 떠나 이곳을 거쳐 바다라로 갔다(행 21:1). 바울의 배가 정박한 곳은 공항 근처의 로도 항구가 아니라 남쪽에 있는 린도스라는 항구이다. 아크로린도스는 북쪽 로도스시에서 동해안을 따라 약 55㎞ 지점에 위치해 있다. 현재의 아크로린도스는 마을의 정상에 있다. 아크로린도스에느 바울의 정박을 기념하는 교회가 항구 남쪽 해안에 세워져 있다. 로도 섬의 옛 항구인 만드라키 항구(로도 항구 바로 옆)는 고대 7대 불가사의인 태양신 헬리오스 거상이 있는 곳이다.
사도행전 21장 1절에 언급되고 있는 고스 섬은 터키의 밀레도 항구에서 남쪽으로 68㎞ 거리에 있는 비옥한 작은 섬이다. 3만여명이 사는 작은 이 섬은 바울 사도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도중 일박하고 이튿날 로도 섬으로 향한 곳이다(행 21:1). 로마 제국이 통치할 때는 자치도시였으며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에는 주치의인 고안의 간언에 따라 모든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로마가 멸망한 뒤에는 오스만제국과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947년 그리스령이 되었다.
오늘날 섬 사람들은 대부분 중심도시인 고스시에 살고 있으며 섬 중앙에는 해발875m의 오로메돈 산이 있다. 지중해성 기후인 이곳은 옛날에는 고운 직물과 포도주가 명물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어업은 물론 밀 감귤류 포도 채소류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특히 작은 섬임에도 불구하고 구리와 철 등 광산물도 많이 나오고 있다.
고스 섬은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의 출생지이다. 또한 이곳은 화가 아펠테스(Apeltes), 시인 필레테스(Pilletes) 등을 배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기원전 5세기께 히포크라테스는 이곳에 의학교를 세웠다. 현재 이 섬의 코스(고스)시에는 2400년전 히포크라테스가 그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 된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다. 그래서 이 섬 서쪽에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유적이 있다. 아스클레피오스 유적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는데 왼쪽에 대신전터임을 보여주는 7개의 기둥이 서 있고 오른쪽에는 2개의 기둥이 남아 있는 또 다른 작은 신전터가 있다. 다시 계단을 오르면 아폴론 신전의 제단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항구 옆에는 바울 도착을 기념하는 그리스정교회가 있다.
로마로 압송되던 바울이 탔던 배가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나 14일 동안 표류하다가 도착한 멜리데(Melth) 섬은 오늘날 몰타공화국이다. 이곳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 남쪽에 위치해 있다. 멜리데 섬은 이탈리아 남부의 시실리 섬 남쪽 약 100㎞,아프리카까지는 약 340㎞ 지점에 있는 작은 섬이다. 현재는 몰타(Malta)라고 불린다. 섬의 길이는 약 29㎞,너비는 13㎞,높은 곳은 해발 258m 정도이다. 남서쪽은 바다와 급경사를 이루는 가파른 절벽이고 북동쪽 해안에는 크고작은 만이 많이 있다. 멜리데는 지중해를 동서로 횡단하는 여행자나 북쪽에서 남쪽 아프리카로 건너가는 여행자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다.
현재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조선소 폐쇄와 수출입 저조로 경제 사정이 매우 나쁜 상황이다. 바울이 이 섬의 추장인 보블리오를 만난 곳에는 기념교회만 세워져 바울이 보블리오를 만났다는 것만을 전해주고 있다.
바울과 일행은 이곳에 도착하여 보블리오를 만나 사흘 동안 그의 집에서 머무르면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바울은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있는 보블리오의 부친을 기도와 안수로 고쳐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병자도 고쳐주었다(행 28:1∼10). 그래서 이 섬의 가장 큰 항구 발레타시 언덕에는 보블리오를 기념하는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이는 보블리오가 바울과 일행 276명을 잘 대접해준 것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이다. 이 교회 앞에는 보블리오 동상이 세워져 있다. 표류하던 바울이 처음 도착했다는 곳은 발레타에서 북서쪽으로 12.9㎞쯤 떨어져 있다.
바울은 금식 절기가 지난 뒤 그레데의 미항을 떠나 항해하다 난파돼 표류하였고 이곳 멜리데 북서쪽에 상륙하였다(행 28:1). 오늘날 이곳 해안을 사람들은 바울만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겨울에 이곳에 도착했는데 날씨가 춥자 원주민들은 불을 피워 따뜻하게 바울 일행을 접대했다. 그때 뜨거움을 참지 못한 독사가 나와 바울의 손을 물자 원주민들은 ‘저가 살인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했다’(행 28:4)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은 손이 붓거나 쓰러져 죽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런 바울을 신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뱀에게 물린 바울이 죽지 않은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이곳 멜리데 섬은 이외에도 중앙의 라바트에 바울 기념교회와 카타콤 등 바울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있으며 모스타에는 유명한 모스타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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